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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 고려건국1100년/경기성립 1000년 학술회의 “고려 건국과 경기 성립의 역사적 의의”

BoardLang.text_date 2018.05.28 작성자 서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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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발표회 후기


고려건국1100년/경기성립 1000년 학술회의


“고려 건국과 경기 성립의 역사적 의의”


 

서은혜(중세1분과)


 

지난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역사적인 남북공동회담이 열렸다. 전 세계의 사람들이 판문점 회담을 바라보며 평화가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남북의 평화를 그 누구보다 바랄 사람들이 그 다음날 송도에서 모였다. 고려사 전공자라면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겠다는 선언을 들으며 고려사 연구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고려 건국 1100주년, 경기 성립 1000주년 기념 학술회의 <고려 건국과 경기 성립의 역사적 의의>가 열렸던 송도 컨벤시아 학회장에는 이른 시간부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사실 학술회의가 송도에서 개최된다는 안내를 보고 큰 고민에 빠졌다. 금쪽같은 주말에 새벽부터 일어나 멀고 먼 송도에 가야할 것인가.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니고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이니 좋은 발표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 기대되어 학술회의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더해 학술회의 전날 판문점 선언을 보고는 그에 따른 고려사 연구 저변의 확대 가능성에 대해 선생님들께서 어떤 고견을 가지고 있으실지, 어떻게 전망하고 계신지 들어보고 싶어졌다. 결국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추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역연 회장이신 이익주 선생님의 개회사로 학회가 시작되었다. 이익주 선생님은 고려 1100주년과 우리 학술회의를 축하하는 전야제가 성대하게 열렸다며 개회를 알렸다. 인천문화재단 이사님이 짧게 환영인사를 해 준 후 안병우 선생님의 기조 발제가 이어졌다.

 



 

안병우 선생님은 <재통일사회에서 귀족사회로>라는 제목으로 해방 직후부터 7차교육과정에 이르기까지 중등학교 역사 교육과정과 교과서 서술에 나타난 고려시대 역사상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정리해 주셨다. 교과서 서술에서 고려시대는 표제 없이 나오거나 대개 귀족사회라는 표제로 규정되었다. 고려시대의 500년의 역사적 성격을 한마디로 나타내는 것은 확실히 어려운 일이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고려 1100주년을 맞이해 고려 역사상에 걸맞는 새로운 이름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번 학술회의는 크게 두 주제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고려와 경기 지역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고려의 천하관과 고려시대의 경기에 대한 발표가 이루어졌다. 2부는 <고려와 개경에 대한 메타역사학적 접근>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먼저 이진한 선생님의 사회로 1부가 시작되었다. 학회의 시작이 조금 지연되어 발표와 토론이 매우 타이트하게 진행되었다.

 

첫 번째로 한정수 선생님이 <고려시대 천하관의 모색과 ‘해동천자’ 질서>라는 제목으로 발표해주셨다. 고려가 송, 거란, 금 등과의 국제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해동천자로 자부하며 천하관을 구축했으며 고려 태조의 훈요 속에서 이러한 천하관의 지향을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 발표는 신안식 선생님의 <고려 국도 개경 연구의 기초자료 현황과 전망>이었다. 신안식 선생님은 개경에 대한 연구를 오랫동안 하신 분으로 개경 연구 현황과 개경 관련 사료를 총망라하여 깔끔하게 정리해주셨다.





 

그 다음으로 정은정 선생님이 <고려 경기의 신축과 운영>을 발표해주셨다. 정은정 선생님은 고려시대 경기 제도는 성종대의 적기현제에 기원하여 현종 대에 시작되었다. 경기의 범위는 시기에 따라 신축하였으며 고려 말기 경기 좌우도의 분리를 비롯한 경기의 운영은 조선과 연속성을 보인다고 하였다.

 



 

1부의 마지막 발표는 강재광 선생님의 <강화 천도의 외교적 배경과 대몽전쟁기 경기도 권역의 군사적 대응>이었다. 강화도 천도는 6사가 강요되었던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 경기도 권역에서 펼쳐진 대몽전투를 네 유형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경기도에서의 승리가 강도의 대몽 방어 체계 형성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부가 시작할 즈음에는 빈자리가 꽤 있었는데 1부가 끝나고 살펴보니 학회장이 완전히 꽉 차있었다. 역시 고려 1100주년, 경기 1000주년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컨벤시아 건물에 딸린 식당에서 맛있게 점심을 먹고 난 후 2부가 시작되었다. 경기문화재단 김성환 선생님께서 사회를 맡아주셨다.

 

2부의 첫 발표는 조경철 선생님의 <주몽고려, 궁예고려, 왕건고려, 코리아의 단절과 계승>이었다. 고구려, 궁예가 건국한 국가, 그리고 고려의 국호가 모두 고려였음을 밝히고 현재 일반적으로 쓰이는 고구려, 후고구려, 고려라는 국호를 좀 더 역사성을 가지는 국호로 바꾸어 불러야 한다는 발표였다. 확실히 후고구려라는 국호에는 역사성이 결여되어 있음이 공감되었다.

 



 

그 다음으로 이규철 선생님이 <조선시대 공민왕 인식의 변화 과정>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해주셨다. 조선 초기 공민왕은 고려의 실질적인 마지막 군주로 이성계를 중용하고 대명 사대에 힘썼다고 하여 평가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조선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공민왕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면서 공민왕 나라를 망친 군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양정필 선생님의 <근현대 개성인에게 끼친 고려의 영향> 발표가 진행되었다. 개성인이 조선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들었던 발표이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설 때까지도 개성인은 고려 유민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려의 유풍을 여러 가지 형태로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 유민 의식은 김택영의 신고려사에서 정점을 찍었다.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발표는 조형열 선생님의 <해방 직후 고려 국호론의 전개와 고려 표상> 발표로 마무리되었다. 해방 한국의 국호논쟁에서 ‘고려’는 대한과 조선에 이은 제3의 제안으로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 다가올 통일 한국의 국호를 정할 때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 기대한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종합토론이 시작되었다. 종합토론은 채웅석 선생님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번 종합토론은 채웅석 선생님이 토론자들에게 발표 내용과 관련된 핵심적이면서도 심도 있는 질문을 던지시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듣는 형식이었다. 먼저 채웅석 선생님은 고려시대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하고자 한다고 운을 띄우고는 질문을 시작하셨다. 마치 8분의 토론자들이 짤막하게 발표를 하시는 듯 했다. 깊이 있는 토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지면을 빌어 진행되었던 문답을 간단히 소개하면 참 좋겠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때 거의 기운이 고갈된 상태라 받아 적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듣는 것이 내 한계였다. 지금 복기해보자니 거의 기억이 나는 것이 없어 안타까울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인천문화재단과 경기문화재단의 관계자 두 분이 각 재단에서 계획하고 있는 올해의 학술 관련 이벤트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예산이 늘어 물심양면으로 연구자들을 지원하고자 한다는 말을 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학회가 마무리되었다. 학술회의를 위해 수준 높은 발표와 토론을 준비해 주신 선생님들, 토요일 아침부터 멀고 먼 송도까지 와서 자리를 지켜주신 선생님들 모두 존경스럽다. 고려 건국 1100주년과 경기 성립 1000주년을 축하하며, 그리고 앞으로 고려사 연구가 호황을 맞이하기를 바라며 학술회의 후기를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