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조선은 왜 도감과 같은 임시기구를 필요로 했을까? - 『조선시대 도감의 성립과 변천』-

BoardLang.text_date 2018.05.03 작성자 나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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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조선은 왜 도감과 같은 임시기구를 필요로 했을까?


 『조선시대 도감의 성립과 변천』


(2017.02.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전공 박사학위논문)


나영훈(중세2분과)


 

조선시대 官制 연구는 답보 상태에 있다. 관제 자체가 官僚制(bureaucracy)와 비견되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고, 『經國大典』에 이미 모두 정리되어 있어 법전을 보면 될 것이라는 식의 인식이 상존해 있다. 따라서 근대 한국사학 연구의 초창기부터 누적되어온 정치제도사 연구는 『경국대전』「吏典」 조항의 검토ㆍ분석과도 동일시되어 법전에 수록된 80여개 아문과 법전의 여러 제도 등의 해명에 집중하였다. 결과적으로, 조선시대 관제, 혹은 관료제는 막스 베버가 정의한 상설화되고 위계화 된 관료제, 그것에 대한 지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간의 선결해야할 과제는 역사학이든 정치학이든 베버가 설명한 동아시아 관료제의 특성이 家産官僚制냐, 아니면 베버의 이념형의 관료제에 가깝냐 하는 논의가 주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조선의 관제 혹은 관료제가,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 정착된 관제가, 베버의 bureaucracy와는 완전히 다른 체제라는 점에 있다. 동아시아 관제의 역사는 서구 유럽보다 오래되었고, 필자가 판단하기에 훨씬 세련되게 운영되고 있었다. 누적된 경험만 2,000년에 가깝게, 국왕을 정점으로 한 관제가 운영되고 있었다. 그래서 이는 서구의 관료제로서의 관점보다는 동아시아의 독창적인 행정체제, 즉 관제라는 표현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아이젠슈타트는 동아시아를 포함한 비서구 지역의 이러한 관료체제를 ‘역사적 관료제국’으로 표현한 바 있다. 그것은 근대 산업화 이전의 광범위한 비개인적 행정 체제를 통해 작동하는 고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권력이 특징인 정치체제를 말한다. 아이젠슈타트는 조선의 정치체제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명과 청을 이 분류에 넣어 설명하였다. 다만 그가 정의한 ‘역사적 관료제국’은 동아시아 국가의 관제 특성뿐 아니라, 서구 봉건제와 근대 관료제 사이에 존재한 전세계적인 군주와 이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 된 국가권력과 그 행정체제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개념이라는 점에서, 동아시아만의 관제 특징을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처럼 관제 연구에 대한 문제는, 결국 조선의 관료제가 얼마나 더 근대적이냐 아니냐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이보다 선결되어야 할 문제는, 곧 본질적인 부분인데, 동아시아 조선의 관제가 지닌 개념정의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너무도 확정적으로 동아시아 관제가 당연히 관료제, 즉 수직적이고 위계적이고 전문행정관료에 의해 유지되어 온, 베버의 관료제의 개념으로 설명되어 왔다.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경국대전』에 수록된 의정부와 6조, 그리고 그 예하의 屬衙門으로 계서화 된 常設官制 연구에 자연스럽게 집중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다양한 국가적 사무를 처리하는데 상설관서로만 해결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었다. 조선은 고려로부터 이어온 제도적 폐해이기도 하였지만, 임시적 기구인 都監과 所, 色 등을 활용해 건국 초기의 다양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궁궐과 도성 조성, 貢法과 儀禮ㆍ法制 재정, 노비 송사 문제 등 해결해야할 과제가 산적하였는데, 이는 상설관서를 새롭게 설치해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자연히 고려로부터 이어온 제도였던, 도감이란 제도를 통해 해결해야했다.

 

그렇게 도감은, 고려와 조선초기를 거쳐 국가 중대사 처리에 필수적인 제도로서 기능하였다. 여러 제도적인 폐해가 드러났지만(상설화 되어 기존 관서와의 중복 설치문제, 비용문제, 인사포상문제, 횡령과 유용 등), 조선은 도감을 포기할 수 없었다. 작은 규모의 국가였던 조선에서 국왕의 장례나 혼례, 대규모의 토목공역, 주요 국가정책논의 등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행정관서에게 이러한 일을 전담시킬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국가적 총력을 기울여 이를 해결해야 했다. 조선은 이러한 국가적 역량을 동원해야할 일을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처리했다. 이는 유관기관을 동원해 하나의 기구를 만들고 그에 전권을 부여해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으로 조선은 당면한 국가적 과제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위계적이며 수직적이고 행정전문화 된 상설관서보다, 덜 위계적이고, 덜 수직적이며 그렇지만 더 기능에 전문적인 인적 구성을 통해 완료할 수 있었다. 이것이 도감이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렇게 도감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더 나아가 망한 이후에도 존속할 수 있었다. (마지막 도감은 1928년 순종의 부묘를 위해 설치한 主監이었다.)

 

특히, 여말선초의 都評議使司의 존재와 조선후기 새롭게 등장한 備邊司는 이러한 조선의 제도적 운영에 대해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한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경국대전』이 반포되고 이에 근거해 관서를 운영하려 했던 15세기말에서 임진왜란까지는 상설화된 정치행정기구의 활용이 가장 두드러지는 시기로 이해할 수 있다. 반면 임란 이후는 이러한 상설체계가 무너지고, 새로운 행정체제로서 비변사와 訓鍊都監, 宣惠廳 등이 등장하였다. 이들 기구는 모두 임시기구에서 시작된 기구로서, 이후 상설화되기는 하였지만, 국가 행정의 핵심을 이루는 기구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조선은 단지 『경국대전』 중심의 상설관서로만 운영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더 중요한 문제에 더 많은 임시기구가 설치되었다. 조선 500년간 확인된 도감만 900여개이고, 청이나 소, 색과 방 같은 위상이 좀 더 낮은 임시기구의 경우 그 수효조차 아직 짐작되지 않는다. 조선에서는 이처럼 많은 임시기구가 설치되었고, 이를 통해 국정의 주요 과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조선이 완전히 과두적인 체제로서 임시적 기구가 난립한 시기라고 정의할 생각은 없다. 한국사상 도감과 같은 임시기구가 가장 난립해 운영되었던 시기는 여말의 원 간섭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때의 도감은 국가의 대다수 정치ㆍ경제ㆍ사회 문제를 도감과 같은 임시기구를 설치해 처리하였고, 관서의 중첩과 이로 인한 비용낭비가 심각했던 시기였다. 조선은 건국 이후부터 이와 같은 혼란한 임시적 관제 운영을 개선하려 노력했고, 그것이 조선의 관제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최대한 상설관서로 국가를 운영하려 하였지만, ‘효율성’의 측면에서 도감과 같은 임시적 기구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다.

 

도감은 당면한 과제를 처리하기 위해, 정1품의 도제조를 선임하여 과업 총책임자로 선정하였고, 도제조는 비용 문제는 호조판서를, 의례 문제는 예조판서를, 토목 문제는 공조판서를, 인력 문제는 병조판서를, 각각 도감의 제조로 선임하여 6조를 통괄해 해당 사안에 가장 우선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무는 낭청과 감조관을, 해당 사무에 가장 적합한 전문가로 편성해 신속히 사안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소요되는 비용과 재원은 아끼지 않고 투입될 수 있었다. 이것이 도감을 통해 과업을 해결하였던 조선의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꽤 효율적으로 사안을 신속히 해결해줄 수 있었다.

 



[그림1] 영조국장도감의궤, 奎13581(규장각 소장). 도청 의궤의 이조별단이다. 의정부 좌의정인 신회가 총호사인 가운데, 제조로 참여한 인물들의 명단을 알 수 있다. 호조판서,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 6조의 장관이 참여하고 있다.

 

이제 조선이 상설적인 관서로만 운영된 ‘兩班官僚制’라는 틀에서의 설명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상설관서와 임시관서가 양립하여 운영된, 상당한 융통성을 발휘한 고도로 발전된 행정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고도로 발전한 행정체계의 일면, 즉 그 인사운영과 재정운영에 관해서는 조선후기부터 『儀軌』라는 기구운영의 보고서가 누적되어 있어, 그 효율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의 행정전반에 관한 이해도 가능하다.

 

한편, 현대사회는 막스베버의 관료제와 그 폐해를 1950년대부터 이미 인식하고 있었다. 여전히 베버의 관료제는 현대의 국가와 기업 등에서 각광받는 행정체제이지만, 최근에는 베버의 관료제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인 Adhocracy로 조직된 기업체도 많이 등장하고 있다. Adhocracy는 Matrix 조직과 Taskforce, Team조직, 위원회 등을 말한다. 이들 새로운 유형의 행정체제는 관료제와 달리 수평적이고, 전문적이고, 그러면서 임시적이다. 이는 조직을 중심에 두는 관료제와 달리, 과업을 중심에 두어 운영되는 제도이다. 사람보다 과업을 중점에 두어 사안을 처리하는데 효율성을 발휘한다. 물론, Adhocracy만으로 조직이 운영되면 조직구성원의 안정성이 결핍되고, 과업의 책임감이 상실되기 때문에, 관료제와 병행하여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 Adhocracy의 조직 성격이 도감의 조직 특성과도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 조직구성원 간의 관계가 완벽히 수평적이지는 않지만, 종9품에서 정1품까지 계서적인 틀을 갖춘 관제와 비교해, 도감은 감조관(참하관), 낭청(참상관), 제조(당상관)로 위계화되어, 동일 직급 내에서는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호조와 예조, 공조 등 유관 기구의 관원을 도감에 배속시켜 전문적인 사안의 처리가 가능하게 했으며, 과업 중심으로 설치되어 임시적으로 운영한다. 이 점들을 통해, 도감이 전근대판 Adhocracy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기구에 대한 연구는, 현대사회의 조직운영론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듯 도감의 연구는 조선시대 정치제도사 연구가 답보된 상태에서, 동아시아 관제 중심으로 조선의 관제 성격을 새롭게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의 일환이며, 조선 관제의 한 특성으로서 기존 관료제와는 차별적인 도감과 같은 제도적 운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정치제도사에 관해 새롭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권설관서의 특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차후에는 연구를 확장하여 본격적으로, 상설-권설 양립의 관제 운영을 특성으로 한 조선시대 관제의 총체적 이해가 필요하다. 이는 보다 더 긴 호흡을 필요로 하며, 두 가지 점에서 앞으로의 연구를 진행할 필요가 있다.

 

우선은 도감과 같은 권설관서를 실증적으로 완전히 파악해야한다. 도감뿐 아니라, 청이나 소와 같은 기구의 특성을 이해해야 한다. 특히, 청은 도감보다 훨씬 중요한 조선의 임시기구로 보인다. 도감은 조선후기로 가면서 왕실의례의 처리에 국한되어가는 성향을 보인다면, 청은 지속적으로 조선의 사회경제적 문제에 설치되었다. 진휼청, 선혜청, 어영청, 포도청, 상평청, 의약청 등 무수히 많은 청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다. 이들에 대한 제도적 특성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조선시대 상설관서에 대한 지속적 연구가 필요하다. 기존 연구와는 다른 시각에서 상설관서를 새롭게 검토해야한다. 임시기구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하고, 이와 함께 조선의 행정적 사안을, 특히 일반적이고 항상적인 문제를 처리했던 기구로서, 그리고 과업이 발생하면 이를 보조하는 역할로서의 상설관서 연구가 필요하다. 물론 상설관서가 조선 관제의 중심이란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상설관서와 권설관서가 양립된 상황에서의 조선 관제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시대 관제를 재구성해보고자 하며, 이는 조선국가의 한 특성, 즉 작은 정부로 큰 국가조직을 끌어갔던 효율적인 제도적 밑바탕이 무엇이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