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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 산업도시 경성, 그리고 변화들

BoardLang.text_date 2024.02.27 작성자 한국역사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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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도시 경성, 그리고 변화들 

 

1920~30년대의 산업화


 

한국역사연구회 근대도시공간연구반은 에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하는 유술기 선생님의 기고글입니다. (http://www.redian.org/archive/123937)

 

유슬기(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과정)

 

한국의 산업화 시대는 언제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1970년대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그 시기로 답할 것이다.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필두로 한 공장제 산업으로 고도성장한 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많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 글에서는 20세기 중반이 아닌, 20세기 초반에 있었던 산업화, 산업도시 경성의 모습을 말하려 한다. 영등포 지역에 하나 둘 공장이 생겨나 공업지대를 형성한 시기, 즉 1920-30년대로 대표될 수 있는 20세기 초반은 경성의 산업도시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변화하기 시작하는 경성


1907년 총독부는 이화동 부근에 공업전습소를 세웠다. 첫 입학생 모집에서 몰려든 사람들은 천여 명이 넘었다. 상업과 공업을 천한 것으로 여기던 사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조선인들을 공업전습소에서 기술을 습득하여 전문기술자로 성장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1)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에서 탈피한 조선인들에게 공업전습소는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공업 성장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경성 안의 공장 수는 증가하였다. 경성부 조사계에서 조사한 1920년 말 경성에 자리한 공장의 수는 400개였다.(2) 이 시기의 공장 수는 1차 세계대전(1914년~1918년) 이후 세계적인 경제난의 영향을 받아 감소한 수치라고 했지만, 1922년 말 이루어진 조사에서 이내 710개로 계속적인 증가추세를 보였다.(3)


[그림1] 1934년 기준 경성의 행정동별 공장 수 분포
 
 
[그림 1]은 각 동별 공장의 수를 표시한 지도이다. 『서울통계자료집 일제강점기편』에 기록된 1934년 이전까지의 경성 안 공장 분포는 위의 그림과 같다. 대다수 공장이 일제강점 이후부터 새로 각광받기 시작한 일본인 중심지인 청계천 남쪽과 용산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경성의 산업도시화 양상은 비단 공장 수가 증가하였다는 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신문기사에 의하면 일자리를 찾아 경성으로 몰려드는 조선인의 수 역시 증가하여 총 인구 중 30%가 공장 노동직으로 일한다고 한다.(4) 공장 수와 노동자 증가뿐만 아니라, 공장 부지 또한 증가하고 있어 도시 안에서의 활발한 공업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5) 도시 안으로 공장이 진입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도시문제들은 경성이 산업도시로 변모해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들은 다른 산업도시들에서 나타난 그것들과 동일했다.

19세기 영국의 에벤에저 하워드가 구상한 전원도시는 산업혁명 이후 중심도시의 산업도시화 과정 속에서 나타난 도시문제들을 피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아이디어는 20세기 초 런던으로부터 떨어진 곳에 레치워스 가든시티(Letchworth Garden City)로 구현되었다. 또한 이는 비슷한 시기 일본으로까지 넘어와 역시 도쿄 중심지에서 떨어진 곳에 덴엔초후(田園調布)를 만들었다. 그리고 식민지 시기 경성으로 전해졌다.(6)


[그림2: 좌] 하워드의 전원도시 구상도(에벤에저 하워드, 조재성·권용운 옮김, 『내일의 전원도시』, 파주: 한울, 2016)
[그림3: 우] 전원도시 내 구(區)와 중심부(에벤에저 하워드, 조재성·권용운 옮김, 『내일의 전원도시』, 파주: 한울, 2016)
 
 
[그림4:좌] 레치워스 가든시티 설계도(Josh Tidy, Letchworth Garden City In Old Photographs, Letchworth Garden City: Heritage foundation, 2016).
[그림5:우] 레치워스 가든시티 기차역(유슬기 촬영 2018.07.06.)
 
 
[그림6: 좌] 덴엔초후 지도(www.google.co.kr/maps)
[그림7: 우] 경성 위성도시계획(「大京城中心의 百年大計」, 『每日申報』, 1937.02.10.
 
 
[그림8] 덴엔초후 역(유슬기 촬영 2018.02.21)

 

 


산업도시 경성으로의 변화


그렇다면 경성에서는 어떤 변화와 어떤 도시문제가 발생했던 것일까?
 

1) 인구 수 증가와 주택난

일제가 벌인 토지조사사업은 농민들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들었다. 이들은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민 생활을 하거나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상경했다. 새로운 일터를 찾아 일본에서 경성으로 건너오는 이들도 증가했다. 그 결과, 경성 인구 수는 1920년대 급격히 증가한다. 1920년 250,000여 명, 1925년 303,000여 명, 1930년 355,000여 명으로 계속적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인구 증가에 따라 경성은 주택난 문제를 겪는다. 1921년 기사에 따르면, 경성 시내 가옥은 3만 9천 호이지만 거주하는 호구 수는 5만 4천 여 호로 1만 5천 호의 가옥이 부족하다고 한다.(7) 주택난은 시기가 지나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1920년대 후반으로 계속 이어진다. 특이한 점은 주택난으로 토막촌까지 생겨나는 형국임에도 불구하고 공가(空家)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택난은 날로 심해지는데 경성 시내에 1천 400여 호의 공가가 있고, 이것은 여유자금을 보유한 사람들이 이익을 챙기기 위해 집을 사서 월세를 놓다가 세를 내지 않는 임차인을 내쫓고 신용 있는 사람이 들어올 때 까지 공가(空家)의 상태로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후술하겠지만 더 많은 도시 빈민을 낳고, 좁은 곳에 더욱 밀집됨으로써 열악한 주거환경을 더욱 부추기는 셈이 되었다.
 

2) 열악한 주거환경

제한된 면적에 집중된 인구는 과밀로 인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바로 위생상의 문제이다. 1910년대와 1920년대는 전염병 발생률이 증가하였다가 감소하였다를 반복하며 나타나고 있다. 이에 총독부는 1925년 전문가에게 자문한 결과, 전염병 발생 장소에서의 일정한 공통점을 발견하였다. “집의 구조가 불완전하며 하수도가 불완전하여 그와 같이 병이 발생함”(8)이 전문가의 답변이었다. 인구의 증가에 따라 쓰레기와 분뇨의 양 또한 증가하였다. 쓰레기의 경우, 1925년에 18,380,710貫에서 1926년에 20,302,400貫으로 증가하였고, 분뇨의 양의 경우, 1925년에 414,141碩에서 1926년에 441,397碩으로 증가하였다.(9)

당시 경성은 면적에 비해 과밀한 인구 비율을 해마다 기록하고 있었다. 위생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인구증가는 보건상의 문제를 심화시켰다.(10) 특히나 주로 일본인이 거주했던 남촌에 비해 조선인의 거주비율이 높았던 북촌은 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지지 않아 진흙바닥에 악취까지 났다.(11)

또한 공장이 거주지역과 혼재해 있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도 있었다.


“경성부 내의 공장발전 상황을 살펴보면 최근 수 년 간에 원동력 증가율이 11%요, 직공 증가율이 2%요, 자본금 증가율이 20%요, 생산품 증가율이 25%나 되어 비교적 다른 것보다 장래 발전할 여지가 많을 뿐 아니라 경성이 공업도시로 이름을 날릴 날이 있을 모양인데 현재 경성 부내나 부외의 공장을 건축물법에 의지하여 보면 공업지역 내가 아니면 존치할 수 없는 것이 상업지역이나 주택지역 안에 있어서 석탄연기라든지 불똥이라든지 기계 회전하는 소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로 부근 일대는 불만상태에 빠지며 따라서 공장이 있는 동네 주민들이 그 공장으로 인하여 피해가 있다고 관계당국에 진정하는 사실이 이곳저곳 할 것 없이 끊일 사이가 없으며 그 외에도 상업지역과 주택지역이 한데 섞여 풍속상으로나 치안상으로 영향이 다대(多大)한 터인즉 지역을 확장한 뒤에는 상업공업주택 등으로 구역을 정리하여 적당한 지대에서 적당한 직업을 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12)

위의 기사는 공장과 주택이 혼재해 있는 상황임을 밝히며 이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상당함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업지역과 주거지역의 구분이 없음 역시 주민들의 안전상 해결해야 할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상업과 공업, 주택을 구역으로 정리하여야 함은 용도에 따라 토지이용을 제한해야함을 의미하고, 당시 경성은 이러한 규제 없이 혼재된 상태였다.


3) 주거지의 교외화

1차 대전 이후 일본은 서구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움’을 상징하는 용어로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주택 양식의 새로운 변화, 즉 서구적인 형태와 양식을 도입해 만든 것을 문화주택이라 하였다.(13) 문화주택은 위생적이지 못한 주거환경에 대한 문제를 인식하고 생활개선 및 주택개량운동이 활개하고 있던 시기에 조선으로 유입되었다.(14) 이후 1920년대부터 경성에서 문화주택 단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림9] 1920-30년대 문화주택지가 건설된 행정동 표시
 
 
대규모의 주택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문화주택지는 사대문 밖의 지역에서 조성되었다. 그 이유는 이상적인 문화주택의 입지조건(15)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입지조건 첫 번째는 복잡하지 않고 공업지로 인한 위생적이지 못한 곳과 거리가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대문 밖의 지역은 경성의 행정구역 확대와 함께 새롭게 경성으로 편입된 지역이기 때문에 도성 안 지역과 비교하면 비교적 개발 되지 않은 땅이었다. 도성 안으로 몰려드는 인구로 인한 과밀과 위생문제에서 새로운 대안으로 문화주택지 형성이 부상하였다.

문화주택지의 분양가는 약 20원 이상으로 최고가는 45원까지 달했다.(16) 이는 일반 노동자가 아닌 일정한 수입이 있는 당시 최고의 직업이라 호평 받던 샐러리맨이라도 문화주택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대출을 받아 최대 7년까지 월 단위 혹은 연 단위로 갚아나가야 하는 고가의 주택이었다.(17) 1935년의 기사를 통해, 당시 문화주택 개발이 어느 수요자를 겨냥해 지어졌는가에 대해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경남(京南) 일대는 부편입지로는 풍광 명미하고 교통이 편리한 이상적 주택지인 관계로 신축가옥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 7개월간 217호이다. 건축물을 보건데 대개 2층 문화주택으로 그 중 조선사람의 집은 불과 24호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전부가 일본 내지인의 소유이다. 그리고 이틈에 끼어있던 세민들은 할 수 없이 집을 팔고 한강 건너 광주(廣州)로 속속 이주하는 가엾은 정경이다.”(18)

192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문화주택의 개발지역은 1930대에 들어설수록 확대되어가지만, 조선인에게만큼은 보편화되어가고 있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문화주택은 경제적 여력이 뒷받침되는 일본인을 겨냥한, 그리고 불쾌한 생활환경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호하고자 한 주택개발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림 10] 문화주택 (이경아(2006) 논문)
 
 

 

산업도시 경성


앞서 살펴본 하워드의 전원도시 구상은 1903년 레치워스 가든시티 구현으로 나아갔고, 1916년 일본 도쿄 근교에 덴엔초후 설계로 발전했다. 이후 1930년대에 들어서서 하워드의 전원도시 구상안과 비슷한 형태의 위성도시 계획안이 발표되었다. 이전까지 경성은 산업도시로 변화해갔고, 그에 따른 도시문제 발생으로 인하여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의 “도시 내 공장 입지 → 인구 수 증가 → 주거지와 공업지의 혼재 → 중산층 교외로의 이주” 순서를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필자는 이에 대해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자칫 식민지 근대화론자가 아니냐는 오해를 살 수 있어서이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의 근대화 산업으로 조선의 성장을 유도했다는 것인데, 마치 경성의 산업도시화 양상이 이들 주장의 근거로 보일 수 있다. 아마도 아직까지 산업화 시대의 시작을 20세기 중반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교외지역 개발 · 신도시 개발의 시작을 1970년대 강남개발로 보는 것 또한 이와 같은 논의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필자는 사관에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사실을 인식하고 싶었고, 세계적인 추세 속에서 당시 경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각주>

1. 서울공고백년사 편찬위원회, 『서울工高百年史』, 서울 : 서울공업고등학교 동창회, 1999, p.38
2. 「京城府內工場趨勢」, 『朝鮮日報』, 1921.07.28.
3. 「京城工場統計」, 『朝鮮日報』, 1923.10.19.
4. 「逐年倍增하는 朝鮮勞動者 이현상대로 삼십년만 계속되면 조선인 구할은 로동자가 될 모양」, 『東亞日報』, 1928.10.17.
5. 「工業化하는 경성 十七年間에 九倍 누구의 손으로든지 작고 발뎐 工場地帶益益擴大」, 『朝鮮日報』, 1929.07.03.
6. 염복규, 「‘전원 도시’로 가는 길?」,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13, 도시사학회, 2015, p.80
7.「住宅難의 活証據; 경성시내 가옥은 삼만구천호, 거주하는 가구는 오만사쳔여호, 不足이 實로 一萬五千戶 」, 『東亞日報』, 1921.09.10.
8.「傳染病防止로 下水道를 改修, 府內十五處에」, 『每日申報』, 1925.01.11.
9.「每年激增하는 京城府의 糞尿 인구 증가관계」, 『中外日報』, 1927.01.29.; 1貫은 3.75kg이고, 1碩은 144kg이다.(출처 : 위키백과)
10. 「人口密度率로 世界一인 京城에 每年增加三千人」, 『朝鮮日報』, 1927.05.21.
11. 「保健衛生에까지 差別徹底한 京城府 事實을 證明하는 南北村의 下水道施設」, 『朝鮮日報』, 1925.11.28.
12. 「工業發展과 不安한 府民 공장부근 주민들은 거멍과 불똥과 긔계소리로 대곤난 日이 急한 區劃整理」, 『朝鮮日報』, 1927.11.24.
13. 이경아, 『日帝强占期 文化住宅 槪念의 受容과 展開』,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p.2
14. 이경아(2006), p.37
15. ①상업의 번잡과 공업지의 불위생 등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곳, ② 남향의 토지로 서북에는 산을 등지고 수목이 많아 조망이 좋은 토지, ③ 시내에 가깝고 편리한 토지 (출처 : 『朝鮮と建築』4輯 5號)
16. 이경아(2006), pp.156-157
17. 南一, 「現代의 浮層 月給쟁이 哲學」, 『開闢社』, 1931.08; 「文化住宅 月賦建築 秘法」, 『三千里』, 1936.06
18. 「新築家屋 激增 大部分 文化住宅 面目一新하게 發展하는 反面 細民層을 不得已 轉出」, 『朝鮮日報』, 1935.10.31.

<참고문헌>

『東亞日報』, 『每日申報』, 『三千里』, 『朝鮮日報』, 『朝鮮と建築』, 『中外日報』, 위키백과
서울공고백년사 편찬위원회, 『서울工高百年史』, 서울 : 서울공업고등학교 동창회, 1999
염복규, 「‘전원 도시’로 가는 길?」, 『도시연구: 역사·사회·문화』 13, 도시사학회, 2015
이경아, 『日帝强占期 文化住宅 槪念의 受容과 展開』,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에벤에저 하워드, 조재성·권용운 옮김, 『내일의 전원도시』, 파주: 한울, 2016
Josh Tidy, Letchworth Garden City In Old Photographs, Letchworth Garden City: Heritage foundation,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