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뒷담화] 최용건2: 만주시대, 김일성과 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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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뒷담화#11

최용건2: 만주시대, 김일성과 김책


김선호(현대사분과)


<만주로 간 조선공산당>

   최용건이 만주에 파견된 1930년대 당시, 만주는 조선공산당의 정통성을 자임하는 파벌들의 각축장이었다. 그는 만주에서 조선공산당 화요파에 들어간다. 화요파는 1924년 마르크스의 생일인 11월 19일 날 창립한 “화요회”로 시작했다. 화요파는 2개 사회주의단체가 결합된 조직이다. 조선청년연합회 서울파와 북풍회가 그것이다. 서울파의 중심인물은 김사국, 이영(해방 후 장안파공산당), 정백(해방 후 국민보도연맹 명예간사장), 최창익(조선독립동맹 부주석)이다. 북풍회의 중심인물은『임꺽정』의 소설가 홍명희, 일본 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김찬,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조봉암(초대 농림부장관)이다. 그 후 삼인당(三人黨)으로 유명한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가 한발 늦게 화요회원이 되었다. 삼인당은 본인들도 유명했지만, 부인들도 모두 저명한 혁명가였다. 박헌영의 부인은 조선공산당 창립멤버 주세죽, 임원근의 부인은 여성해방운동가 허정숙, 김단야의 부인은 조선공산당 재건위의 고명자였다. 삼인당은 늘 같이 다녔는데, 1922녀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을 국내로 옮기려 잠입하다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도 같이 했다. 부인들끼리도 친해 경성 사람들은 이들을 ‘여성 트로이카’라고 불렀다. 1920년대 초 세 명의 ‘맑스 걸’이 청계천에서 탁족을 하며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주세죽의 미모는 단연 뛰어나 경성의 4대 미인 중 한명으로 꼽혔다.


[사진1]  일제강점기를 풍미했던 세 명의 맑스 걸이 청계천에서 탁족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부터 고명자, 주세죽, 허정숙  잡지『삼천리』는 1931년 7월 1일, ‘붉은 연애의 주인공들’이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 많은 투사의 신변에는 묘령의 꽃과 같이 아름다운 ‘맑스 걸’, ‘엥겔스 레이디’들이 마치 그림자처럼 그 뒤를 따르며 살풍경한 사상운동 선상에 한 떨기 꽃수를 놓아줬다.”  ⓒ동아일보


[사진2]  1929년 모스크바 유학시절 찍은 박헌영ㆍ주세죽 부부의 가족사진  주세죽이 안고 있는 아이가 한 살된 딸 박비비안나이다. 당시 박헌영은 국제레닌학교,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중이었다.  ⓒ임경석,『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화요파는 1925년 4월 17일 서울 을지로1가에 있던 청요리집 아서원에서 최초로 조선공산당을 창당한다. 창설멤버는 안동 출신의 김재봉, 동래 출신의 김약수, 옥천 출신의 조동호, 예산 출신의 박헌영, 강화도 출신의 조봉암 등이었다. 다음날인 4월 18일에는 박헌영의 집에서 청년혁명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한다. 김약수의 본명은 김두전인데, 밀양 출신인 김원봉과 깨복쟁이 친구였다. 둘은 1918년 함께 중국으로 망명했는데, 이때 도원결의해서 이름을 약수와 약산으로 개명했다. 본명이 김창수인 김구 선생처럼 이후에도 평생 가명으로 살았다. 박헌영과 조봉암은 종로3가에 있는 YMCA에서 공부하다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당시 YMCA에서는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장면 등 쟁쟁한 인물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공산당에는 유독 안동 출신이 많다. 제1차 조선공산당 창당을 주도하고 책임비서를 맡은 김재봉,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권오설, 제2차 조선공산당 창립멤버 이준태, 제3차 조선공산당과 제4차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한 안상길이 모두 안동 출신이다. 그러나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는 7개월 뒤인 11월 22일,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괴멸된다. 이른바 ‘신의주사건’이다.

   1925년 11월 22일 밤 신의주 시내의 경성식당 2층에서 일단의 청년들이 결혼피로연을 열었다. 아래층에는 친일파 조선인 변호사와 일본인 순사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발단은 소음이었다. 2층 청년들이 떠들고 노래를 합창하자 식당주인이 올라와 아래층에 일본순사가 와 있으니 조용히 해달라고 간청했다. 청년들은 아래층 손님이 누구냐고 따졌다. 친일파 변호사가 와있다는 말에 청년들이 아래층에 내려가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해 사태를 진압했다. 며칠 뒤 경찰이 관련자들을 조사했는데 한 청년의 집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비밀문서가 발각되었다. 술자리 다툼으로 일어난 신의주사건으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관계자 66명이 체포되고 37명이 지명 수배되었다. 제1차 조선공산당은 이처럼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가장 먼저 박헌영과 주세죽이 체포되었다. 다음날 임원근과 허정숙도 체포되었다. 김단야는 체포를 피해 상해로 탈출했다. 부인 고명자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유학중이었다.


[사진3]  제1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김재봉과 제2차 조선공산당 창립멤버 이준태  김재봉은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이준태는 옆 동네인 풍산읍 상리 출신이다. 권오설은 앞산 너머에 있는 풍천면 가곡리 가일마을 출신으로 김재봉과 이준태의 후배다. 당시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렸다.  ⓒ안동대학교,『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안동대 박물관, 2002

   조선공산당 창립멤버 중 한명인 김찬도 상해로 탈출했다. 그는 1926년 4월 조선공산당 만주부 책임비서로 임명된다. 이어 만주로 파견된 조봉암, 최원택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조직했다. 그러나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파벌로 망한다고 했던가? 이후 화요파, 상해파, ML파, 서울파 등은 각 파별로 독자적인 만주총국을 건설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맹렬히 활동했으나, 정작 조선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은 몰락하고 있었다. 1928년 노동자출신 차금봉이 처음 책임비서를 맡은 제4차 조선공산당도 불과 4개월 만에 괴멸되었다.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 승인을 취소했다. 그리고 1928년 12월 만주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에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라고 지시한다. 최용건은 화요파에 파견되어 조선인들의 중국공산당 가입을 유도했다. 1930년 2월 하얼빈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각파 대표 연석회의에서 공식적인 입장이 정리되었다. 1930년 6월 10일부터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해방 때까지 중국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원으로 활동한다. 이로서 중국혁명은 조선해방의 선결과제가 되었다.


<허형식과 양림>

   만주로 파견된 최용건은 길림성과 흑룡강성을 누비며 소학교와 농민학교를 세운다. 최용건이 세운 모범소학교는 학생이 많을 때는 100명이 넘었다. 만주로 파견될 당시 그는 황포군관학교 졸업생들을 데리고 갔다. 최용건은 모범소학교 교장을 맡았고, 황포군관학교 생도들은 교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최용건은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최석천(崔石泉)과 김지강이라는 가명을 썼다. 중국 자료에는 주로 최석천으로 나온다. 최용건은 1929년 조선 청년 허형식을 포섭해 비밀당원으로 가입시킨다. 그리고 그를 후원해 1929년 중반부터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 사이에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최용건은 화요파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군사부장을 맡으면서 동시에 중국공산당 빈현 지부 서기를 겸임했다. 최용건이 포섭한 허형식은 저명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그 후 만주에서 항일영웅이 된다. 그는 의병장 왕산 허위의 조카로 본명은 허극이다. 고향은 경북 선산군 임은동으로, 철길 너머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 상모동이다. 삼촌 허위는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13도 창의군을 이끌고 동대문까지 진격했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당했다. 허위의 형 허훈은 땅 3,000마지기(60만평)를 팔아 군자금으로 내놓았을 뿐만 아니라, 허위의 형제들은 모두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1915년 집안 전체가 만주로 망명했고, 이후 남만주에서 석주 이상룡 집안과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왕산 허위의 집안은 우당 이회영의 6형제와 함께 영남 사림의 지조와 기개를 떨친 명문가이다. 당시 경상북도는 조선공산당과 무장투쟁의 저수지였다.


[표1]  왕산 허위의 가계도  허위의 큰형 허훈은 대한제국시기 유학의 대학자로도 유명했다. 둘째형 허신은 젊어서 요절했고, 셋째형 허겸은 허위와 함께 의병투쟁과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허위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하자 허위의 형제들과 사촌들은 가솔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한다. 먼저 허겸이 망명했고 사촌형제인 허형과 허필도 몇 년 후 망명했다. 허형식의 사촌조카가 시인 이육사이다. 해방 후 허형식의 자녀들은 북한으로 들어간다.  ⓒ다음블로그 ‘윤덕호 감독의 블로그’


[사진4]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제3군 군장을 지낸 허형식  그는 2014년 중국정부가 ‘항일전쟁승리 기념일’을 앞두고 선정한 ‘항일영웅열사’ 300명 중 한명으로 선정되었다. 그와 함께 항일영웅열사로 선정된 조선인은 동북항일연군 지휘부 참모장 리홍광(李紅光), 동북항일연군 제7군 군장 리학복(李學福)이다. 여성으로는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에서 활동한 리봉선과 안순복이 포함되었다. 두 여성은 1938년 10월 흑룡강성 목단강에서 다른 6명의 여성 소속 부대원을 이끌고 1천여 명의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탄약이 떨어지자 강으로 뛰어들어 전사했다.  ⓒ흑룡강신문, 2011.7.22

   최용건이 만주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그때, 운남강무학교의 선배 양림도 만주로 왔다. 1927년 부인 리추악과 함께 소련으로 유학 간 양림은 소련 보병군정대학을 졸업하고,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파견되었다. 양림은 동만주에서 반일유격대를 조직하며 활동하였다. 그는 3년 후 다시 중앙당의 명령을 받고 중앙소비에트지구로 파견된다. 그 후 양림은 1934년 중국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서 역사적인 25,000리 대장정에 참여했다. 1934년 10월, 서금소비에트에 있던 8만 명의 중국 홍군은 70만 명에 달하는 장개석 군대의 포위를 뚫고 탈출을 시작한다. 그 속에는 조선인 혁명가들도 있었다. 1935년 10월 섬서소비에트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조선인은 양림과 무정(武亭)뿐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림은 1936년 황하도하작전 중 총상을 입고 사망한다. 양림이 전사하자 팽덕회는 유일한 조선인 생존자 무정을 자신의 사령부로 데려간다. 이후 무정은 팽덕회의 후원아래 팔로군 작전과장과 팔로군 초대 포병부대장을 맡게 된다. 함북 경성 출신인 무정은 서울 중앙고보를 중퇴하고 망명해 중국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인물이다. 졸업 후 국민당군에서 포병장교로 활동하다 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고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팽덕회와 함께 팔로군에서 가장 포를 잘 쏘는 명사수였다. 대장정 당시 양림의 활약상은 종군작가 에드가 스노우의『중국의 붉은별』에 기록되어 있고, 무정의 활동은 해리슨 솔즈베리의『대장정』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5]  중국 연안에서 모택동을 취재 중인 에드가 스노우  뉴욕 컬럼비아 대학을 졸업한 언론인이다. 주식투자를 해서 번 돈으로 세계 일주를 하다가 1929년에 특파원 자격으로 중국에 입국한다. 1932년 상해에서 유타주 출신의 몰몬교 신자 님 웨일즈와 결혼했다. 1936년부터 서구 언론인중 최초로 소비에트지구에 들어가 모택동, 주은래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취재한다. 그는 중국 혁명의 생생한 목소리를『중국의 붉은 별』로 집필해 서구에 중국공산당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한다. 1941년 미국으로 돌아왔고, 1949년에 님 웨일즈와 이혼했다. 1950년대에 매카시즘의 광풍이 불어오자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숨졌다.  ⓒ네이버블로그 ‘운현재’

<민생단사건>

   최용건과 양림이 만주에서 활동하던 1932년, 만주의 항일세력은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른바 “민생단사건”이다. 민생단은 1932년 최남선의 처남인 박석윤과 북간도의 친일파 김동한의 주도로, 만주지역의 항일세력을 와해하기 위해 설립된 밀정조직이다. 민족자치를 내건 민생단은 5족협화(五族協和)를 내건 만주국이 설립되자 5개월 만에 해산되었다. 민생단을 주도한 박석윤은 전남 담양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한 수재다. 귀국 후『매일신보』부사장을 맡으며 친일파가 되었다. 민생단과 간도협조회의 밀정활동을 인정받아 만주국 폴란드 주재 총영사까지 승진했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귀국해 다시 만주국 협화회 중앙위원을 맡아 항일무장 세력에 대한 귀순공작을 펼쳤다. 해방 후에는 여운형의 대리인으로 조선총독부의 행정권 이양을 교섭했고, 북한에서 체포되어 1948년 사형 당했다. 또 한 명의 주도자 김동한은 러시아 10월 혁명 이전에 공산당에 입당한 오랜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러시아 이르쿠츠크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제정러시아 장교로 1차 대전에 참전한다. 1917년 러시아혁명 때는 적군 장교로 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1925년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된 뒤 전향해 친일인사로 돌변한다. 민생단이 해체된 이후에는 간도협조회를 조직해 회장을 맡아 독립군을 토벌한다. 간도협조회는 관동군 헌병대 소속 밀정조직이었다. 그는 1937년 12월 동북항일연군 11군 정치부 주임 김정국의 귀순공작을 벌이다가 살해된다.

   민생단은 불과 5개월 동안 존재했지만, 밀정에 대한 공포는 만주지역 공산당 간부들의 뇌리에 짙게 남아있었다. 민생단이 해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은 당내의 민생단원을 색출하기 위해 “반민생단투쟁”을 시작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만주 조선인 항일세력을 궤멸시킨 이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현재 조선로동당 비서 최룡해의 부친인 최현(崔賢)이라는 사실이다. 1932년 10월, 연길현 유격대 분대장 최현은 한 일본 헌병 통역관을 생포했다. 그런데 이 통역관의 자백에서 항일조직 내부에 민생단원이 있다는 정보가 나왔다. 이 사건을 발단으로 1932년 10월부터 만주에서 민생단원을 색출하기 위한 반민생단투쟁이 전개되었다. 반민생단투쟁은 만주에서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 뿌리는 중국공산당의 극좌노선에서 나왔다. 1931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회의에서 실권을 잡은 왕명(王明)과 이립산(李立山)은 농촌혁명노선을 버리고 대도시를 공격하는 극좌투쟁을 전개한다. 이 좌경노선을 선택하고 지원한 사람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을 장악하고 있던 스탈린이다. 1932년 1월 중국공산당 중앙은 당내에 AB단을 색출하라고 지시했다. AB단은 국민당 우파가 강소성의 중공당 조직을 파괴하기 위해 만든 비밀단체다. 반AB단 투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하룡이 지휘하는 3개 사단에서 반AB단 투쟁을 거친 후 생존한 사람은 겨우 3명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반AB단 투쟁을 선도한 인물은 강생(康生)이다. 산동성 지주의 아들인 강생은 상해에서 지하운동에 종사하다 1931년 중앙당 조직부장에 임명된다. 이때부터 그는 당내에서 밀정색출 투쟁을 전개한다. 1935년부터 강생은 모택동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다. 물론 모택동에게 산동성 후배 강청(후에 모택동 부인)을 소개시켜주었기도 했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강생은 타고난 첩보장교였다. 이후 중앙당 사회부장으로서 당내 일본 첩자와 국민당 첩자에 대한 색출에 나서 수많은 당원을 처형했다. 그중에는 광주 꼬뮨에 참가했던 김산도 있었다. 김산은 1936년부터 연안군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잠시 만주에 파견된 적도 있었다. 1938년 10월 강생은 김산을 일본첩자로 지목한다. 증거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일본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1938년 동지에 의해 처형당한다. 김산이 죽은 지 3년 뒤, 미국으로 돌아간 님 웨일즈는 뉴욕에서『아리랑』을 출판한다.



[사진6]  항일투쟁 당시의 강생  그는 1933년에 소련에 유학 가서 첩보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공산당 내부의 ‘반혁명활동’을 색출하는 한편, 중국에 있던 미국 정보기관인 OSS에 정보원을 침투시킨다. 모택동의 부인 강청과 함께 문화대혁명을 주도했으며 1975년에 암으로 사망했다. 1980년 중국공산당에서 사후 제명되었고, 혁명공원에서도 유해가 제거되었다. 김산은 1984년 중국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위키백과


중국공산당 중앙의 밀정색출 투쟁은 만주로 전염된다. 1932년 10월부터 중국공산당은 만주에서 반민생단 투쟁을 시작한다. 동만특별위원회는 선전부장 리상묵을 훈춘현에 파견해 민생단원을 색출하도록 했다. 리상묵은 훈춘에 도착하자 그 지역 항일조직의 70%가 민생단원이라고 선포하고, 주요간부 60여 명을 체포했다. 6개월 동안 벌인 반민생단 투쟁에서 60여명 간부 중 1명만 살아남고 모두 처형되었다. 반민생단 투쟁은 자료에 근거해 진행된 것이 아니다. 민생단원 혐의를 받은 대원들은 고문을 받았는데, 육체적 한계에 몰려 무고한 사람을 허위로 자백했다. 자백은 자백을 낳았고, 민생단원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얼마 후 오히려 리상묵이 민생단원으로 몰리게 된다. 민생단원의 말로를 익히 알고 있는 그는 부대를 탈출해 일제에 투항한다. 오랜 항일투사였던 리상묵은 투항 후 진짜 일본이 밀정된다. 그는 동지들을 잡으러 다니다 결국 아편 중독으로 사망했다.

   1932년 10월부터 1936년 3월까지 3년 4개월 동안 지속된 반민생단 투쟁에서 조선인 간부 500여 명이 학살되었고, 1000여 명이 체포되거나 전향했다. 1931년 당시 동만특위 당원은 1,1000명이었는데, 1935년 당원은 겨우 181명만 살아남았다. 일제의 토벌로 죽은 이보다 반민생단 투쟁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렇게 혁명은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졌다. 당시 조선인이 많지 않던 북만주의 최용건은 반민생단 투쟁의 회오리를 비켜갔다. 반면 조선인이 많았던 남만주의 김일성은 직격탄을 맞았다. 1933년 그도 결국 민생단원이라는 혐의를 받게 된다. 이때 김일성을 구해준 사람이 최용건의 운남강무학당 동기인 주보중이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위원으로 있던 주보중은 민생단원으로 몰린 조선인들을 많이 구해주었다. 그 자신도 소수민족 출신이었고, 만주에서 조선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민생단 사건은 만주지역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 사건으로 1920년대부터 활동해온 조선인 고위간부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일제에 투항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새로운 조선인 간부들이 만주에 등장한다.


[사진7]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위원이었던 주보중(오른쪽)  1943년 소련 제88정찰여단에서 활동하던 시절에 부인 왕일지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주보중과 왕일지는 1939년에 결혼했고, 동북항일연군과 88정찰여단에서 함께 활동했다. 주보중은 해방 후에도 만주로 진출해 길료군구 총사령관과 길림성장을 역임하며 조선족자치주 설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주보중은 1948년 11월 김일성의 초청으로 가족을 데리고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의 가족과 함께 금강산을 구경하기도 했다.  ⓒ길림성도서관 홈페이지

<동북항일연군>

   1935년 코민테른은 일제에 대항하는 항일조직을 모두 통일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과 만주에 있던 모든 반일무장대가 결합해 동북항일연군이 결성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제1로군부터 제3로군까지 있었는데, 제1로군은 조선과 가까운 남만주, 제2로군은 동만주, 제3로군은 북만주에서 활동했다. 조선인들은 특히 제1로군에 많았다. 1로군 사령관은 하남성 출신의 저명한 농민혁명가이자 동북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을 역임한 양정우(楊靖宇), 2로군 사령관은 주보중, 3로군 사령관은 하얼빈 출신으로 최용건의 황포군관학교 후배인 조상지(趙尙志)가 맡았다. 주보중은 북한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인이다. 그는 1902년 운남성의 백족(白族) 출신으로 아버지는 구두수선공이었다. 18살에 운남강무학교를 입학했고, 졸업 후에는 국민혁명군에 가담해 북벌에 참여했다. 1928년에 소련으로 유학 가서 군사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1932년 중공 만주성위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만주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5년에는 동북반일연합군 제5군을 창설해 군장을 맡았다. 운남강무학교시절부터 양림, 최용건 등 조선인들과 친밀했던 주보중은 2로군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휘하의 조선인 간부들을 특별히 아꼈고, 죽음의 문턱에서 여러 번 구해 주었다.


[사진8]  해방후 주보중이 쓴 회고록 중 “8.15 동북광복시기 전(全) 동북항일연군 인원분포 개황” 주보중은 동북항일연군시절과 소련시절의 활동을 이처럼 자필로 기록하였다. 그의 회고록은 1991년 북경 인민출판사에서 “동북항일유격일기(東北抗日遊擊日記)”라는 제목으로 정식 출판되었다.  ⓒ길림성도서관 홈페이지

   최용건은 동북항일연군 2로군에서 제7군 대리 군장을 맡았다. 주보중이 이끄는 2로군 제5군에도 조선인 간부가 많았다. 2로군의 조선인 고위간부로는 7군 군장 리학복이 있다. 그는 요하노농의용군시절부터 최용건과 같은 부대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북만주의 3로군은 조상지가 지휘했는데, 허형식과 김책이 3로군 3군 군장과 정치부주임을 번갈아 맡았다. 중국인 조상지는 최용건보다 6살이나 어리지만, 1931년부터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아 군대 상관으로 있었다. 조상지는 1929년 심양에서 국민당 헌병대에게 체포된 적이 있는데, 이때 김책을 알게 되면서 그의 후원자가 된다. 또한, 조상지․김책․허형식은 1933년부터 같이 행동했다. 조상지는 흑룡강성 주하반일유격대를 창설했는데, 주하중심현위원회 비서가 김책이었고, 허형식은 김책의 지시로 지역에서 군중사업을 펼쳤다.

   남만주의 1로군은 양정우가 지휘했는데, 1로군에는 오성륜이 제2군 정치부 주임으로 최고위급 조선인 간부였다. 광주를 탈출한 오성륜은 해륙풍소비에트에 있다가 1930년에 만주에 도착했다. 그 시절 만주지역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투쟁경력에서 그에 견줄만한 인물은 없었다. 그는 이때 전광(全光)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그는 반석현에서 조직된 리홍광의 유격대를 발전시켜 반일의용군을 창설한다. 경기도 용인 출신인 리홍광도 간도 이주민이다. 18살 때 길림성에서 농민운동에 뛰어든 그는 1931년 삼도구에서 ‘개잡이대’라는 무장조직을 창설해 친일파와 지주를 공격했다. 리홍광의 ‘개잡이대’는 남만주 최초의 항일무장부대였다. 청년 리홍광은 타고난 군사지휘관이었다. 1933년 호란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홍광은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사장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된다. 그때 오성륜이 동북인민혁명군 1군 2사 정치부 주임으로 있었으니 리홍광의 지위를 가늠할 수 있다. 당시 리홍광은 25살, 오성륜은 37살이었다. 1936년 3월 만주의 중국공산당은 무장 부대와 별도로 조선인 반일단체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오성륜은 2사 정치부 주임으로 있으면서 1937년 반일단체인 조국광복회가 결성되는데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다.


[사진9]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 북만지역 지휘관들의 단체사진  사진을 발굴한 김명호 교수에 따르면, 앞줄 가운데 지휘봉을 들고 있는 사람이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이 되는 조상지라고 한다. 그는 1906년생으로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부터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를 맡아왔다. 당시 만주의 군사지휘관은 이처럼 20대의 청년들이었다.  ⓒ한겨레신문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된다. 동북항일연군 중에는 1로군에 조선인들이 가장 많았고, 그중에서도 특히 2군에 많이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들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최용건은 허형식을 통해 3로군에 있던 김책을 잘 알았고, 둘은 여러 번 대면했다. 최용건이 가장 잘 아는 인물은 당연히 광주 꼬뮨의 동지 오성륜이었다. 그는 1로군에 김일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만난 적은 없었다. 최용건과 김일성은 1940년 소련에 넘어가서 처음 만나게 된다. 김책도 소련에서 김일성을 처음 대면하였다. 만주시절 김일성은 최용건과 김책에 견줄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투쟁경력이나 당과 군대의 지위에서 김일성은 최용건과 김책보다 늘 한 급 아래였다.

   김일성은 1912년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현재 만경대)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은 가명이고 진짜 이름은 김성주(金成柱)다. 아버지 김형직은 소작농으로 평양의 미션스쿨인 숭실중학을 나왔다. 어머니 강반석은 장로교 신자로 아버지가 칠곡교회 장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자 김일성은 어린 시절 개신교의 세례를 받았다. 김성주는 어릴 때 길림성 무송현으로 이주했다. 1926년에 독립운동단체 정의부가 설립한 화성의숙에 입학한다. 당시 화성의숙의 교장은 천도교신자인 최동오였다. 김일성은 한국전쟁 때 서울에 있던 그를 찾아내 북한으로 데려간다. 그의 아들 최덕신은 국군에서 중장으로 예편했는데 1986년에 부인과 함께 월북했다. 김성주는 1927년 중국인 학교인 육문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이때부터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31년 무렵부터 김성주는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2년 안도현에서 유격대에 참여한다. 이 유격대의 결성일이 4월 25일이며, 현재 북한에서 인민군 창군일로 기념하고 있다(실제 창건일은 1948년 2월 8일이다). 이후 줄곧 중국공산당원으로 남만주에서 활동하다 소련으로 넘어갔다.


[사진10]  1940년대 초 소련 제88정찰여단시절의 김일성과 중국인간부 시세영  당시 김일성은 제88정찰여단 제1대대장(동북항일연군교도려 제1교도영장)을 맡았고, 시세영(柴世榮)은 제4대대장을 맡았다. 소련시절 김일성이 사복을 입고 있는 보기 드문 사진이다.  ⓒ다음블로그 ‘의미의 공간’

   3로군의 대표적인 조선인간부는 김책이다. 그는 1903년생으로 고향은 함북 성진이다. 최용건보다 한 살 아래고, 김일성보다 9살 위다. 김책은 가명이고 원래 이름은 김홍계(金洪啓)다. 어릴 때 길림성 연길로 이주했으며, 용정 동흥중학을 졸업했다. 동흥중학은 천도교도 최익용과 김홍성이 설립한 학교다. 이 김홍성이 김책의 형이다. 1927년 조선공산당 화요파 만주총국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길림성과 흑룡강성에서 주로 당 간부로 활동했으며, 1932년 주하유격대시절부터 군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김책은 부대지휘보다는 당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1938년 동북인민혁명군 3군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1939년에는 북만임시성위 서기에 올랐는데, 당시 만주의 조선인 간부 중에는 최고위급 당 간부였다.

<대토벌>

   관동군은 193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 만주지역에서 세 차례에 걸쳐 대토벌작전을 전개했다. 관동군의 토벌작전은 점차 작전기간이 길어졌고 규모도 커졌다. 1935년 이후부터는 수만 명의 토벌대를 동원했고, 비행기와 대포까지 투입했다. 그리고 기존처럼 토벌하고 철수하는 게 아니라, 유격근거지 인근에 주민들을 이주시켜 ‘집단부락’을 조성했다. 이 집단부락을 근거지로 토벌을 확대하자 유격대의 활동지역은 점차 축소되었다.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펼쳐진 관동군의 동계토벌작전은 동북항일연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북한이 “고난의 행군”이라 부르는 바로 그 때다. 김일성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1938년에 3만 명에 달했던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5월에는 겨우 1,400명만 살아남았고, 주요 지휘관들은 체포되거나 전사하였다.

   특히 남만주의 제1로군은 지도부가 궤멸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시작해 평생을 만주 항일유격투쟁을 이끌었던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는 1940년 2월에 전사했다. 그보다 앞서 1938년 1로군 1사장 정빈이 일제에 투항했다. 1940년 제1로군 2방면군 참모장 임수산과 1로군 경위려 려장 박덕범도 변절했다. 관동군은 양정우의 머리를 잘라 각지에 순회 전시를 한 뒤 포르말린에 담아 관동군사령부에 보관했다. 특히 1로군 사령관 양정우의 오른팔인 정빈의 투항은 1로군 전체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정빈은 1사 부대원 115명을 데리고 투항했다. 이로서 제1로군 1사는 와해되었다. 정빈은 전향한 뒤 토벌대를 이끌고 1로군의 투쟁 원천인 비트를 파괴했고 빨치산의 투쟁 방식을 역이용해 동지들을 체포했다. 1로군 2방면군 참모장 임수산과 경위려장 박덕산의 투항은 김일성에게 치명적이었다. 임수산은 자신의 이름을 딴 ‘임수산 공작대’를 조직했고, 박덕산은 간도성 특수경찰대 돌격대장을 맡아 상관이었던 김일성을 잡으러 다녔다.


[사진11]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  1905년생으로 하남성 학산 출신이다. 중국공청에서 농민운동을 시작했고, 1928년부터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  ⓒ중국공산당뉴스․한겨레신문


[사진12]  1937년 8월20일,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총사령관 양정우(楊靖宇)의 명의로 발표된 포고문  만주국에 대항해 항일투쟁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 국호로 “대중화민국”을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그는 1939년 말 대토벌을 넘기지 못하고 1940년 2월에 전사한다.  ⓒ중국공산당뉴스․한겨레신문

   1940년 새해가 밝아 왔을 때, 동북항일연군에서 살아남은 지휘관들은 극소수였다. 그해 1월 동북항일연군 2로군과 3로군 지도자들은 회의를 개최해 부대를 소련으로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시 1로군은 부사령관 위증민(魏拯民), 2로군은 주보중, 3로군은 리조린(李兆麟)이 이끌고 있었다. 위증민은 1934년 중앙에서 동만주로 처음 파견되었고, 양생과 함께 반민생단 투쟁을 종식시킨 인물이다. 리조린은 1932년에 뒤늦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인물로, 뛰어난 지휘력을 인정받아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책임자와 동북항일연군 총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토벌을 피해 살아남은 조선인 고위간부는 몇 명 없었다. 1로군에서는 군수처장 오성륜, 2로군에서는 참모장 최용건, 3로군에서는 참모장 허형식과 북만임시성위 서기 김책이 살아남았다. 최용건과 함께 2로군에서 활동하던 7군 군장 리학복은 1938년에 전투 중 부상해 병사했다. 최용건을 비롯해 살아남은 이들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소련으로 넘어갈 때 최용건은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 그의 아내 왕옥환은 중국인이다. 최용건이 도피시절 중국인 지주 집에 숨었다가 왕옥환을 만났다는 설이 있는데, 사실이 아니다. 왕옥환은 흑룡강성 목단강지역의 사범학교 학생이었다. 재학시절 공산주의청년단에서 지하활동을 했고,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다. 그녀는 말을 잘 타서 항일연군시절 기마수로 활동했다. 이 시기 최용건을 만나 결혼했다.


[사진13]  동북항일연군 1로군 부사령관 겸 2군 정치위원 위증민(魏拯民)  주로 동만주에서 당서기와 정치위원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당간부였다. 양정우가 전형적인 농민혁명가이자 무관이라면 위증민은 문무를 겸비한 사회주의자였다. 1935년 동만 대표로 코민테른 제7차대회에 다녀온 후 반민생단 투쟁을 종식시키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위증민은 1940년 대토벌은 넘겼으나 1941년 3월에 심장병과 위병이 악화되어 비트에서 사망한다.  ⓒ한겨레신문

   동북항일연군 부대가 소련으로 넘어간 후 만주에 남은 동북항일연군 지휘관들은 하나씩 죽어갔다. 1로군 3방면군 사령관 진한장은 1940년 12월에 포위되어 전사했다. 진한장의 머리도 잘려져 전시되었다. 진한장이 죽은 후 생존한 최고위급 지휘관은 동북항일연군 3군 군장이었던 조상지였다. 그는 1940년 여름 북만성당위와의 논쟁과정에서 출당 조치를 당했다. 그러나 그는 소부대를 이끌고 1942년부터 유격투쟁을 계속했다. 그해 2월 조상지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다. 토벌대는 그가 전향을 거부하자 총살했다. 중국인 지휘관뿐만 아니라 조선인 지휘관 중에도 만주에 남은 사람이 있었다. 남만주에 있던 오성륜과 북만주에 있던 허형식․김책은 넘어가지 못했다. 허형식과 김책은 소련 월경을 반대했고, 오성륜은 당의 결정을 전달받지 못했다. 오성륜은 1로군 부사령관 위증민에 이어 1로군에서 최고위급 간부였다. 오성륜은 1940년을 무사히 넘겼지만, 1941년 1월 겨울 공세 때 체포된다. 체포된 오성륜은 전향하고 말았다. 그는 만주국 치안부 고문으로 있으면서 옛 동지들을 잡으러 다닌다. 22년 동안 조국해방에 인생을 바친 혁명가의 말로는 이러했다. 1945년 해방 당시 오성륜은 북경 근처 열하성(熱河省) 승덕(承德)에서 팔로군에게 체포된다. 그런데 오랜 혁명가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을까? 팔로군은 오성륜을 죽이지 않고 내몽고 임서현(林西縣)까지 데려간다. 1947년 그곳에서 병사했다. 향년 50세였다. 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북만주에서 오성륜보다 1년을 더 버텼다. 겨우 몇 명의 대원을 데리고 토벌대를 피해 다니던 그는 1942년 8월 포위되어 전사했다. 그의 나이 33살이었다. 김책은 허형식이 전사한 이후에도 1년 넘게 북만주에서 활동했다. 그는 1943년 말에 동북항일연군 부대 중 가장 마지막으로 소련으로 넘어갔다. 죽은 자는 열사가 되었고, 체포된 자는 친일파가 되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소련에서 새로운 미래를 준비했다.

<소련시절>

   1940년 소련으로 넘어온 동북항일연군은 블라디보스톡 근처인 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크)와 하바로프스크에 자리 잡는다. 그들은 보로실로프 근처의 주둔지를 남야영(B야영), 하바로프스크 근처의 주둔지(브야츠크)를 북야영(A야영)이라 불렀다. 1940년 말까지 토벌을 피해 살아온 사람은 겨우 272명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잠시 소련에서 부대를 정비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1941년 4월 소․일 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에 충격을 받은 일본은 1941년 외무장관을 모스크바로 보내 5년간 중립 보장을 요청한다. 독일의 움직임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던 스탈린은 극동지역이 안정되길 바랐다.

   소․일중립 조약이 체결되자 소련은 만주에서 유격대활동을 중지해달라고 요청한다. 동북항일연군은 만주복귀계획을 접어야 했다. 대신 그들은 좀 더 소련에 머물기로 결정하고, 당과 군대를 새로 개편한다. 1942년 8월 주보중은 소련 극동군 정보부장 차르겐 소장과 협의해 새로운 부대인 “동북항일연군교도려”를 조직한다. 교도여단의 또 다른 부대명칭은 “소련 적군 제88특별정찰여단”이었다. 동북항일연군은 공식적으로 소련군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내부문건에서는 계속해서 중국식 부대명칭을 썼다. 제88정찰여단은 동북항일연군과 소련군의 연합부대로 총 병력은 1,500여 명이었다. 여단장은 주보중이었고, 정치부여단장은 장수전(본명 리조린), 부여단장은 소련군 샤마르첸코 소좌, 참모장은 소련군 시린스키 소좌, 부참모장은 최용건이었다. 다른 조선인 간부로는 김일성이 제1대대장을 맡았고, 강건이 제2대대 정치부대대장과 후임 제4대대장을 맡았다. 제3대대장에 허형식이 임명되었으나 그는 취임하지 못하고 만주에서 전사했다. 소련군부대였으므로, 이들은 모두 소련군복을 입고 소련군 계급을 받았다. 최용건은 김일성, 김책, 안길과 함께 대위계급을 받았다. 제88정찰여단에는 소련에서 자란 고려인들도 파견되었다. 후에 인민군 작전국장이 된 유성철, 인민군 포병 부사령관 김봉률, 김일성의 비서 문일, 인민군 군의국장 이동화, 인민군 남해여단장 이청송 등 12명이 파견되었다.


[사진14]  1943년 10월 5일,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야전연습 후, 북야영에서 촬영한 대원들  1줄 왼쪽부터 소련장교, 장수전(리조린), 왕일지, 주보중, 김일성, 시린스키. 2줄 왼쪽부터 장광적, 풍중운, 왕효명, 왕명귀, 팽시로. 3줄 왼쪽부터 양청해, 서철, 강신태(강건), 김광협, 수장청. 4줄 왼쪽부터 맨 뒤에 안길(일명 안상길), 박덕산(김일), 최용진, 도우봉, 김경석  ⓒ길림성도서관 홈페이지

   동북항일연군은 당조직으로 “동북항일연군교도려위원회”를 조직한다. 최용건은 교도려위원회의 당서기를 맡았다. 위원 중 중국인은 주보중, 장수전, 풍중운, 왕효명, 계청 등이 선출되었고, 조선인으로는 김책, 김일성, 안길, 김광협, 심태산 등이 선출되었다. 주보중은 최용건, 계청 등 자신이 지휘했던 2로군 출신과 김일성, 안길 등 자신과 친밀한 관계가 있던 1로군 출신들로 당조직을 장악했다. 3로군 출신 김책은 아직 만주에서 넘어오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소련시절, 최용건은 제88정찰여단에서 주보중을 제외하고 최고위급 당 간부이자 군 간부였다. 그런데, 소련시절부터 김일성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는 소련으로 넘어온 뒤부터 군 계통에서 뿐만 아니라 당 계통에서도 이전보다 지도적 위치에 임명된다.

   최용건과 김책은 김일성보다 열 살 정도 많았고, 투쟁 경력과 당 경력에 있어서도 김일성보다 뛰어났다. 그러나 최용건은 일찍부터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많아 소련 측에서 보기에 중국색이 강했다. 김책은 파벌문제가 많았던 조선공산당 화요파에 가담해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너무 늦게 소련으로 넘어왔다. 결정적인 것은 직책과 활동 지역이었다. 최용건과 김책은 주로 참모와 당 간부를 맡았기 때문에 직계 부하가 적고 중국인 대원이 많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부대장으로 활동해 직계부하가 많았고 대원들 가운데 조선인이 많았다. 최용건과 김책은 주로 길동 지역과 북만주에서 활동한 탓에 한반도의 조선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국경인 남만주에서 활동했던 김일성은 조선인들에게 유명했다. 김성주는 만주에서 활동할 때 그 지역 민간 설화의 항일명장 ‘김일성’을 가명으로 선택한 바 있다.

   1943년 말, 김책이 소련으로 넘어왔다. 최용건과 김책은 조선인들에게 유명한 김일성을 밀어주기로 했다. 또한, 김일성은 제88정찰여단의 군사훈련과정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지휘능력을 인정받는다. 그리고 주보중의 지원도 받았다. 1941년 주보중은 소련군에게 “김일성은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중국공산당의 조선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분자”라고 보고했다. 1945년 5월 소련군은 베를린을 점령했고, 나치 독일은 항복했다. 당시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에게 연전연패 중이었다. 그해 7월, 제88정찰여단은 일본의 패망에 대비해 당조직을 새롭게 개편한다. 동북항일연군교도려위원회는 당조직을 동북당위원회와 조선공작단위원회로 나눈다. 해방이 되면, 동북당위원회는 만주로 돌아가고, 조선공작단은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동북당위원회 서기는 주보중이 맡았다. 조선인 중에는 강건, 김광협, 박락권, 최광 등이 동북당위원회에 포함되었다. 최용건은 조선공작단위원회의 당서기를 맡았다. 위원으로는 김일성, 김책, 안길(보안간부훈련대대부 초대 참모장), 서철(강동정치학원 부원장), 박덕산(김일, 인민군 문화부사령관), 최현(38경비여단장)이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들어가기 직전 유격대원인 김정숙과 결혼한 바 있다. 김정일은 유라라는 소련식 아명으로 유격대캠프에서 성장하였다. 최용건의 아내 왕옥환이 유라에게 중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사진15]  1945년 무렵의 제88정찰여단 대원들  그해 7월 조선공작단을 조직한다. 단장은 김일성, 당서기는 최용건이었다. 강건과 최광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공작단이 결성되기 이전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앞줄 왼쪽부터 심태산, 김경석, 서철, 박낙권, 최명석(최광), 장광적(张光迪), 미상. 둘째줄 왼쪽부터 소련장교(瓦什料维茨), 최춘국, 김책, 강신태, 양청해, 도우봉, 주암봉, 셋줄 왼쪽부터 장석창, 류철석, 범덕림, 고만유, 교수귀, 류안래, 빈진덕산(宾陈德山)  ⓒ민족21

1 개의 코멘트

  1.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화요파의 역사가 잘못 정리되어 있는 듯합니다.
    신사상연구회 – 화요회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요?
    북풍회는 화요회와 더불어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한 그룹이었고, 조선청년연합회 서울파(서울청년회)는 화요파와는 대립적인 위치에 있던 그룹으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