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뒷담화] 최용건1: 광주 꼬뮨의 조선인 혁명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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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뒷담화#10

최용건1: 광주 꼬뮨의 조선인 혁명가들

김선호(현대사분과)

<꼬뮨의 그날>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겨우 3년 뒤였다. 1956년, 가난한 시인은 단성사에서 상영하는 캐서린 헵번 주연의 <여정>을 보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처지가 뻔한 친구들과 추렴해 명동 뒷골목 허름한 빈대떡집에서 낮술을 마셔댔다. 가진 것이라고는 자유로운 꿈과 청춘의 낭만뿐이었다. 술에 취해 주모가 건네준 종이쪽지에 이 글을 쓸 때만해도 박인환은 자신의 글이 후세에 회자될 줄은 몰랐다. 몇일뒤 시인은 갔지만, 그의 시는 아직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로부터 한 세대 전인 1927년 12월 12일 새벽, 중국 국민당 군대가 광동성 광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루 전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광주에서 혁명을 일으키고, 꼬뮨을 선포했다. 당시 중국 북부는 군벌세력이, 남부는 국민당이 양분하고 있었고, 공산당은 농촌에서 겨우 몇 개의 해방구를 가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네 달 전 주은래, 주덕, 하룡, 엽정이 일으킨 남창봉기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혁명을 멈추지 않았다.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졸업한 명장 엽정이 지휘하는 국민혁명군은 국민당군에 비해 약세였다. 광주에 있던 혁명군은 고립된 도시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은 사람도 있었다.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의 조선인 150여 명과 조선인 혁명가 50여 명은 혁명의 도시 광주에 남아 몰려드는 국민당군과 반나절을 넘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탈출에 성공해 살아남은 이들도 있었다. 종군작가 님 웨일즈의 작품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도 그중 한명이었다. 그는 광주 꼬뮨의 최후를 이렇게 묘사했다. “조선 사람들은 그 박명한 꼼뮨의 최후의 나날에도 극난한 처지에서도 어엿한 태도로 훌륭히 행동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17일 이후부터는 수중에 돈 한푼 없는 신세로 되어버렸다. 그들에게는 돈을 꾸어줄만한 동무도 없었고 도망하여 피신할만한 곳도 없었다.”

   12월 11일에 창설된 광주 소비에트는 단 3일 만에 무너졌다. 개화파의 서울봉기였던 갑신정변의 3일천하와 같은 말로였다. 백성들은 그 사람들의 이름을 잊었지만, 그들의 눈동자․입술은 살아남은 자들의 가슴에 남았다. 생존자 중에는 아리랑의 김산, 훗날 김일성의 상관이 되는 의열단원 오성륜, 님 웨일즈가 ‘금강산의 붉은 승려’라고 표현한 승려출신 사회주의자 김성숙, 그리고 최추해(崔秋海)가 있었다. 최추해는 황포군관학교 특무대대 제2중대장으로 학생들을 이끌고 혁명에 참가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1964년 최추해는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 그는 직접 광주를 찾아가 혁명 동지 엽검영 원수와 함께 광주에서 스러져간 조선 동지들에게 묵념을 올렸다. 황포군관학교 교관 최추해. 그의 본명은 최용건이다.


[사진1]  1921년 7월 31일, 중국공산당 창당대회의 마지막 회의가 열렸던 절강성 가흥의 유람지 남호(南湖)  사진에 보이는 놀잇배에서 회의가 열린 뒤 산회했다. 창당대회에 참가한 공산주의자들은 13명에 불과했다. 참가자 중에는 28살의 사범학교 교사 모택동도 있었다. 중국공산당은 1920년대 중반부터 남창봉기와 광주봉기 등을 통해 도시혁명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시혁명은 처절히 실패한다.  ⓒ중앙일보, 2011.7.10

<오산학교>

   우리는 흔히 인민군 초대사령관을 김일성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초대사령관은 최용건이다. 황포군관학교의 교관 최추해는 어떻게 인민군 초대사령관이 되었을까? 지금부터 그의 인생행로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최용건은 1900년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났다. 김일성이 1912년생이니 12살이 많다. 그의 집안과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진 게 없다. 평북 태천 사람으로 유명한 이는 백삼규가 있다. 그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백삼규는 유인석과 함께 조선에서 저명한 을미의병장이었다. 이후 남만주로 망명해 그곳에서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무력투쟁을 벌였다. 백삼규는 1920년에 체포되어 총살당한다. 최용건의 고향 태천은 유학으로도 유명했다.『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독립운동가 박은식은 1884년 태천에 있던 박문일의 문하에 들어가 주자학을 배웠다. 한편 평북 태천과 정주는 미국 장로교의 교세가 강했던 지역이다. 당시 전국 장로교회의 26.6%가 평안북도에 있었다. 최용건은 유학과 기독교의 세례, 항일운동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을 것이다.

   최용건은 1918년 오산학교에 입학한다. 그의 나이 열아홉 살이었으니 늙다리였다. 그가 오산학교에 다닌 것을 보면, 그의 부모는 최소한 빈농은 아니었고, 자식교육에 남다른 열성이 있었을 것이다. 오산학교가 있던 정주는 태천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오산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 받아 사비를 털어 세운 신식학교다. 1910년에는 이광수를 초빙해 교사로 임명했다. 최용건이 입학했을 때 오산학교의 교장은 물산장려운동으로 이름을 떨친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다. 일본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나온 조만식은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1915년 교장이 되었다. 최용건이 재학하던 시절에는 『페허』의 동인이자 상징파 시인 김억이 오산학교 교사로 있었다. 오산학교 선배로는 영변의 김소월이 있고, 광복군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도 3년 선배다. 영락교회를 세운 한경직 목사는 최용건과 동갑이지만 2년 먼저 오산학교에 입학해 있었다.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의 시인 백석은 최용건의 한참 후배다. 그 외에도 화가 이중섭, 인제대학교 백병원 설립자 백인제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사진2]  최용건이 다녔던 시절의 오산학교 전경  1925년 동아일보에 보도된 사진으로 학교와 숙소와 병원 건물이다.  ⓒ동아일보, 1925.1.26

   같은 반 친구 중 한명이 평북 용천 출신의 저명한 무교회주의자 함석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최용건은 만세운동을 벌이는 동시에, 반일출판물을 발간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로 인해 그는 학교에서 쫓겨났고, 몇 개월간 투옥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오산학교 학생들이 대거 운동에 가담한다. 일본은 오산학교를 폐교했다. 학교는 1년 6개월이 지난 1920년 9월에 다시 열렸다. 최용건은 복학했다. 그런데, 그는 복학한 이후에 동맹휴학을 주도한다. 결국 일본의 압력으로 퇴학당하고 만다. 1921년 3월의 일이다. 같은 반 친구였던 함석헌은 최용건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최용건의 학창시절에 대해 “한반에 있다가 스트라이크를 하고 학교를 나갔고 그 후 다시 학교에 돌아왔다가 또 스트라이크를 하고 나가서는 이날껏 중국에 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최용건은 오산학교에 다닐 때 교장 조만식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함석헌이 그를 “조만식 선생님이 안아서 길러낸 사람”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최용건은 헌칠한 키에 전형적인 북방형 미남이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오산학교 중퇴 후 최용건은 서울로 내려갔다. 그는 서울에서 상해 임시정부의 공작원과 선이 닿는다. 그는 1921년 임시정부로 가기 위해 상해로 망명한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파벌싸움을 목도하고 실망한다. 그는 상해에서 신규식과 선이 닿았다. 1911년부터 손문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해 중국혁명을 위해 활동한 신규식은 국민당 지도부에 인맥이 많았다. 그는 인맥을 총동원해 중국에 있는 조선인 청년들을 국민당과 군벌이 운영하는 군사학교에 입학시켰다. 신규식이 보정군관학교, 남경해군학교, 육군강무학교 등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킨 조선인은 무려 100명이 넘었다. 그중 한명이 최용건이다. 신규식은 운남성 군벌 당계요가 만든 운남육군강무학교에 최용건을 추천한다. 그런데, 최용건의 망명과 운남육군강무학교 입학에 영향을 미친 또 한명의 인물이 있다. 바로 오산학교 선배인 김홍일이다. 평북 용천 출신인 김홍일은 1918년 3월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9월에 중국으로 망명한다. 그는 이곳에서 신규식의 추천으로 12월 중국 귀주성에 있던 귀주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한다. 운남육군강무학교와 쌍둥이 학교다. 그는 1920년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한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최용건은 오산학교를 다닐 때 김홍일의 활약을 들었을 것이다. 최용건이 상해에 있을 때 김홍일도 상해에서 활동 중이었다.


[사진3]  청년시절의 함석헌(좌)과 김구 선생과 함께 활동하던 상해시절의 김홍일(우)  ⓒ오마이뉴스 – 김삼웅 블로그 및 국가보훈처 블로그 – 훈터

<김산과 약산>

   최용건은 1922년 운남강무학교에 입학한다. 입학 당시 그는 최추해(崔秋海)라는 가명을 썼다. 현재까지 그가 1921년 어느 시기에 망명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가을바다”라는 그의 가명에서 그가 1921년 가을에 바다를 건너 상해로 갔다고 생각한다. 독립 운동가들은 흔히 가명을 썼다. 새로운 삶을 선택했을 때나,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서 여러 이름을 사용했다. 장지락이라는 본명을 두고도 김산은 열 개도 넘는다는 가명을 썼다. 그중 가장 유명한 김산(金山)은 조선에 가장 많은 성인 김씨에다, 산처럼 동요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산(山)’자를 붙인 이름이다. 1925년 고려공산청년회 대표로 모스크바로 파견된 조봉암은 박철환(朴鐵丸)이라는 가명을 썼다. 철환이라는 이름은 ‘쇠로 만든 총알’이란 뜻으로 조선 혁명의 탄환이 되겠다는 결심이 내포되어 있었다. 최추해로 위장한 최용건은 운남강무학교 제17기로 입학한다. 바로 위 16기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양림(楊林)이 있었고, 동기로는 소수민족인 백족출신 주보중(周保中)이 있었다. 평양고보를 졸업한 양림은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청산리전투에 참전했던 인물이다. 주보중은 뒤에 만주와 소련에서 최용건의 상관이 되고, 김일성의 후원자가 된다. 중국인 선배로는 15기에 광동성 출신의 명장 엽검영이 있었다. 운남강무학교는 세계적인 군사아카데미였다. 운남강무학교가 배출한 세계적인 명장으로는 중국인민해방군 초대사령관 주덕과 인도차이나전쟁․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영웅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이 있다. 또한, 중국국민당의 명장 장치중과 두율명, 중국공산당의 명장 섭영진, 림표도 운남강무학교 출신이다.


[사진4]  운남강무학교시절 최용건의 모습  최근 중국 측이 운남강무학교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자료에 실린 사진이다. “구대장, 27세, 한국”이라고 적혀 있다.  ⓒ동아닷컴 저널로그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최용건은 1925년 4월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광동성 광주에 있는 황포군관학교로 간다. 당시 운남강무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청년들은 대부분이 중국혁명의 중심지였던 광주에 가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거나 국민혁명군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1년 선배인 양림도 1923년 말 주은래의 추천을 받고 이미 광주로 가 있었다. 1924년 장개석과 모택동은 제1차 국공합작을 실현한 바 있다. 국민당은 육군사관학교로 황포군관학교를 창설했다. 최용건은 황포군관학교에서 제5기 구대장을 맡았다. 당시 황포군관학교의 교장은 장개석, 정치부 교관은 프랑스 유학파 주은래와 손문의 오른팔인 왕정위였다. 왕정위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아버지인 순친왕에 대한 암살테러로 중국에서 영웅이 된 인물이다. 국민당에서 좌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장개석의 라이벌로, 손문 사후 국민정부 초대 주석을 맡았다. 그러나 장개석에게 밀려 국민당 외교부장을 맡으면서 히틀러와 긴밀한 관계를 갖기 시작하며 점차 극우파로 변해갔다. 1940년 남경에 일본괴뢰정권인 ‘신국민정부’를 세우고 주석이 된다. 영화 <색계>에서 양조위가 맡은 역할이 바로 이 왕정위정부의 정보부장이며, 탕웨이가 맡은 역할이 중국공산당 비밀첩보원이다.

   황포군관학교는 소련 적군의 군사조직을 본떠 만들어졌다. 이 황포군관학교 제4기에는 최림이란 가명을 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비롯해 박효삼, 박건웅 등 조선인 24명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의열단원이었다. 1919년 11월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서 창설된 의열단은 폭력투쟁을 기치로 내건 아나키스트집단이었다. 경남 밀양출신의 김원봉이 단장이었고, 창립단원은 김원봉의 고향후배 윤세주와 대구출신 이종암, 이성우, 서상락 등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었다. 약산 김원봉은 1923년 북경에서 단재 신채호를 만나 의열단의 정신을 글로 써달라고 부탁한다. 신채호는 북경에서 이회영, 유자명과 교류하며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의열단원들은 거사 때마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이다’로 시작하는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증거로 남겼다. 1920년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거사를 필두로, 1926년까지 의열단은 300회가 넘는 의거를 일으켰다.


[사진5]  1923년 김원봉의 부탁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의 머리말과 맺음말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투쟁방식을 천명한 선언서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언제나 죽음을 예비하고 있는 의열단원들의 일상은 동적이며 동시에 정적이었다. 상해에서 의열단원을 만난 김산은 이들의 일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그들의 생활은 명랑함과 심각함이 기묘하게 혼합된 것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생명의 지속되는 한 마음껏 생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하였으며, 어떤 경우에도 결백할 정도로 아주 깨끗이 차려입었다. 그들은 사진 찍기를 아주 좋아하였으며, 언제나 이번이 죽기 전에 마지막 찍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조선인 소녀들은 의열단원들을 동경하였으므로 수많은 연애사건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아가씨들은 러시아인과 한국인의 혼열아였는데 아주 아름다웠고 대단히 지적이었다. 이 아가씨들과의 연애는 짧으면서도 격렬한 것이었다.”


[사진6] 『아리랑』초판의 표지  미국으로 돌아간 님 웨일즈는 1941년 뉴욕 존데이출판사에서 김산과의 인터뷰 내용을 책으로 출판하였다. 제목은 ‘아리랑의 노래’, 부제는 ‘조선인 혁명가의 전기’다. 님 웨일즈는 사려 깊게도 이 책을 김산과 공저로 출판했다.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그러나 의열단은 1926년 나석주의 의거이후 투쟁노선에 한계를 느낀다. 수많은 동지가 죽어갔지만, 식민통치는 오히려 강화되고 있었다. 1928년 의열단은「창립 9주년에 즈음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대중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단원은 정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조직적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황포군관학교 제5기에는 역대 최다인원인 100여 명의 조선 청년들이 입학했는데, 임시정부에서 보낸 청년들이 많았다. 황포군관학교에는 조선인 교관들도 있었다. 제4기 교관으로는 양림이 기술조교, 모스크바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한 양달부가 포병교관으로 있었다. 제5기 교관으로는 주임교관 양림, 의열단원 오성륜, 구 대한제국 군인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채원개, 그리고 최용건이 있었다. 제6기 교관으로는 채원개와 함북 회령출신의 사회주의자 박효삼이 있었다. 제6기가 다닐 때 최용건은 중국군 소좌계급을 달고 특무대대 제2중대장을 맡았다. 제6기 교관이었던 채원개와 박효삼은 해방 때까지 살아남는데, 채원개는 국군 2사단장, 박효삼은 인민군 제2군관학교 교장으로 맞붙게 된다.

<오성륜>

   황포군관학교 교관 중 오성륜은 특히 최용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오성륜은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되기전 누구보다 화려한 항일투쟁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8년 함북 온성에서 태어났다. 최용건 보다 네 살이 많다. 여덟 살 때 부모를 따라 만주 화룡현으로 이주했고, 훈춘현에서 중학교를 졸업했다. 오성륜은 1919년 상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아리랑』의 김산은 그보다 7살이나 어렸지만, 그들은 동지였다. 김산에 따르면 그는 힘이 세고 미술과 문학을 좋아했으며, 권총사격의 명수였다. 님 웨일즈에게 전한 김산의 추억을 인용해 보자.


“상하이에서 오성륜을 만났을 때(1927년), 그는 30세였고 나는 겨우 16세였다. 오성륜은 잔인한 사람이 아니라 정열적인 사람이었다. 혈관 속에 뜨거운 피가 흐르지 않는 사람은 테러리스트가 될 수 없었다. 오성륜은 매우 강인한 성격을 가진 천부적인 지도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충실하게 따랐다.”


1922년 오성륜은 숭실학교 교사출신 김익상, 의열단 창립멤버 이종암과 함께 상해 황포탄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다. 먼저 오성륜이 배에서 내리는 다나카를 쏘았으나 앞에 있던 영국인 부인이 맞아 실패했다. 뒤이어 김익상이 차를 타는 다나카에게 권총을 쏘았으나 빗나갔다. 제3저격수 이종암이 차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자동차 뒤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나카는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종암만 포위망을 탈출했다. 대구은행원 출신 이종암은 은행돈 10,000원을 훔쳐서 망명한 인물로, 이 자금은 의열단 활동의 종잣돈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김산은 오성륜의 황포탄 의거를 기념해『기이한 무기』라는 소설을 썼다. 김익상은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오성륜은 일본영사관 경찰서 유치장에 있다가 극적으로 탈출해 광동으로 간다. 이 사건으로 인해 1921년 가을 상해에 도착한 최용건은 불심검문에 걸려 잠시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10년 뒤 만주에서 재회해 그때 일을 회고하게 된다.

   오성륜은 광동에서 의열단의 도움으로 여권을 위조해 베를린으로 갔다. 히틀러가 뮌헨 봉기에 실패해 베르세르크 감옥에 있던 시절이었다. 그가 독일로 간 이유는 알 수 없다. 황포탄 의거 전 그는 마르틴이라는 독일인과 압록강철교 폭파를 모의한 적이 있는데, 그와 관련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오성륜은 독일어는 못했지만, 의열단에 있을 때 영어보습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는 능통했다. 그는 베를린에서 독일아가씨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1년 동안 그녀의 가족과 함께 살았다. 그러나 오성륜은 혁명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25년 혁명의 조국 모스크바로 건너간다. 제3세계 혁명가들의 요람인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입학해 사회주의자로 변신한다. 1926년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에 러시아어 교관으로 배치된다.


[사진7]  황포탄 의거 직후 국내신문에 보도된 김익상과 오성륜  현재까지 알려진 오성륜의 유일한 사진이다. 오성륜의 얼굴이 상당히 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체포 직후 일본영사관 유치장에 있을 때 찍은 사진 같다. 그는 이후 1930년대까지 한 번도 일경에 체포된 적이 없다.  ⓒ국가보훈처블로그 – 훈터

<살아남은 자들>

   오성륜이 모스크바에서 돌아왔을 때, 중국은 공산주의의 태동기였다. 최용건은 1926년경 중국공산당에 입당한다. 모택동과 진독수가 상해에서 중국공산당을 창당한 것이 1921년이었으니 그는 노(老)당원이었다. 최용건은 1927년 12월, 황포군관학교 학생들을 이끌고 광주 꼬뮨에 참여한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광주 꼬뮨에서 국제주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꼬뮨에는 최용건 뿐만 아니라 김산과 오성륜도 참가했다. 한 중국인 공산주의자는 광주 꼬뮨에서 김산의 활약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장지락은 약상자를 지고 총소리가 제일 자지러지게 들리는 곳으로 맹호처럼 내달렸다. 그토록 용감하게 뛰어 가는 그의 뒤 모습을 지켜봤던 나는 ‘조선 사람인 그가 중국인민의 해방위업을 위해 저렇게 결사적으로 싸우는데 어찌 사람들의 존경을 받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했다.”

3일째 되는 날 광주를 포위한 진압군은 시내로 진격했다. 마지막 날, 최후방에 남았던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학생들과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진압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무려 200여 명의 조선인 혁명가가 중국의 공산혁명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중 다수는 황포군관학교 제5기생으로 상해 임시정부에서 조직적으로 파견한 청년들이 많았다. 그래서 5기 조선인 졸업생은 단 4명에 불과하다. 김산과 최추해는 광주를 벗어나 인근 도시 홍콩으로 탈출했다. 그들은 화현을 거쳐 1928년 1월 광동성 해륙풍소비에트에 도착했다. 김산은 해륙풍당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군벌이 해륙풍을 공격하자 홍콩으로 탈출했다가 다시 북경으로 향한다. 최용건은 중국공산당의 명령으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만주로 파견된다. 오성륜도 탈출에 성공한다. 그는 김산과 함께 광동성 해륙풍소비에트로 갔다. 1930년 오성륜은 최용건과 마찬가지로 중공 중앙의 지시를 받고 만주로 파견된다. 최용건은 동만주에서 활동하였고, 오성륜은 남만주에서 활동하였다. 1930년에 들어서면서 만주는 새로운 혁명의 심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사진8]  체포된 김산  김산은 국민당군이 다시 해륙풍소비에트를 공격해오자 탈출해 상해와 북경으로 간다. 그는 1930년 북경에서 활동하다 국민당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목에 건 종이를 보면, 이 사진은 ‘천진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진 이후 찍은 것이다. 주소지는 ‘평북도 용천군 북중면 하장동 28번지’, 이름은 ‘장지락’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산은 다음해에 풀려나는데, 이때의 석방은 결국 김산의 인생을 좌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