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뒷담화] 잠깐 대통령 오랜 지도자, 윤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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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뒷담화 #8


잠깐 대통령 오랜 지도자, 윤보선

김선호(현대사분과)


영국신사


헌정사상 ‘잠깐 대통령’으로는 최규하 대통령이 유명하지만, 진짜배기는 해위 윤보선이다. 그를 진짜배기라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해위는 19세기인 1897년에 태어난 사람이다. 북한의 김일성보다 15살이 많다. 고향은 충남 아산으로, 이분 집안이 대단하다. 부친이 아산의 만석꾼이고 모친도 만석꾼 집 딸이다. 아산 고향집이 100칸짜리 한옥이다. 서울에 살던 안국동 자택도 99칸 대저택이니 말 다했다. 독립협회를 만든 윤치호가 당숙이고, 초대 내무부장관 윤치영이 숙부다. 윤치영은 해위보다 한 살이 적다.


[사진 1]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  조부 윤영렬이 관직에 진출하고, 당숙 윤치호가 대한제국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며 가세를 일으켰다. 생가는 조부 윤영렬이 지은 것이다. 지금은 아흔 아홉 칸이 다 남아있지 않고, 저택 중간은 밭이다. 해평 윤씨 집성촌에 자리잡고 있다.  ⓒ아산시청

   해위는 부잣집 도련님인데다 머리가 비상했다. 어릴 때 집안에 과외선생을 두고 한문을 배웠다. 열네 살 때 서울로 유학 왔다. 1912년 충무로에 있던 일본인 소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세운 경응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한다. 그러나 모태신자였던 그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내건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윤보선은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 후 서울에서 여운형을 만나 그의 영향을 받는다. 해위는 여운형의 주선으로 1917년 상해로 망명한다. 망명 전 고향에서 결혼했다. 해위는 상해에서 신규식이 만든 신한민주당에서 활동했고,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선임된다. 임정에서 자금모집을 맡았다. 겨우 스물네 살 때 일이다. 다음해인 1921년 신규식의 권유에 따라 부인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의 인연으로 후에 해위의 둘째딸은 신규식의 장남과 결혼한다.

   그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했는데, 전공이 참 독특하다. 거기서 ‘고고학’을 전공했다. 아산 부모님이 보내준 돈으로 여유롭게 지냈다. 이 에든버러 출신중에는 또 한명의 걸출한 정치인이 있으니, 그가 초대 수도경찰청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창랑 장택상이다. 장택상은 해위보다 2년 앞서 1919년 에든버러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갑과 안창호의 영향으로 독일을 거쳐 영국으로 유학 왔다. 창랑은 칠곡 인동 장씨로 부친 장승원이 조선에서 손꼽히는 갑부였다. 그러나 장승원은 1917년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집하러온 광복회 회원들에게 암살당한다. 광복회는 전국의 조선인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모집하러 다녔는데, 호응하지 않을 경우 암살했다. 이 광복회의 총사령은 박상진이란 인물로 왕산 허위의 제자다. 판사시험에 합격했으나 임용을 거부했고, 1918년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창랑의 반공성향은 이 사건의 영향이 크다. 해위는 대학을 졸업하고 구미여행을 다니다 1930년에 귀국했는데 부친께 호되게 혼난다. 애써 돈을 보냈더니 외국에서 시체만 파다 왔다고. 하긴 어른들 보기에 고고학이 그렇지.


[사진 2]  해위의 에든버러 대학 졸업사진  ⓒ신동아

   1930년에 귀국해서 1945년 해방 때까지 해위는 안국동에서 안 나온다. 가끔 함남 안변군에 있던 문중별장에 가서 골프를 치며 소일했다. 1937년 부인과 사별했고 신사참배와 창씨개명도 거부했다. 무려 15년인데, 이 분도 참 심지가 굳다. 이 시절 당숙 윤치호는 친일단체 임전보국단 고문으로 있으면서 내선일체를 찬양하고 징병을 권유하며 다녔다. 숙부 윤치영도 임전대책협의회에 가담해 전쟁자금을 조달하고, 징병을 찬양하는 담화를 발표한다.



친 이승만


윤보선은 해방과 동시에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숙부 윤치영과 함께 한민당 창당에 참여한다. 그의 안국동 자택은 한민당의 단골 회합장소였다. 그리고 미군정에서 농상국 고문과 경기도지사 고문을 맡는다. 이유는 하나, 영어를 잘하는 유학파였기 때문이다. 해방 후 남쪽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북쪽은 소련어를 잘하는 사람이 출세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유학파고, 김일성은 소련군 대위출신이다. 지금도 다들 유학 보내는 데에는 역사가 있다. 숙부 윤치영은 이 박사 비서를 거쳐 초대 내무부장관에 임명된다. 당숙 윤치호는 해방 후 친일반민족위원회에 체포된다. 3개월 만에 풀려났지만, 1945년 11월 중풍으로 쓰러져 12월 9일 사망한다.

   해위는 사상적으로는 우익이다. 그는 1947년 반탁투쟁위원회 지도위원을 맡았고, 초대 이승만 기념 사업회 회장을 맡은 이래 이박사의 노선을 줄곧 지지했다. 그는 관운도 있었다. 1948년 초대 서울시장에 임명되었고, 1949년에는 상공부장관을 맡았다. 이때가 해위의 황금기였다. 같은 시기 윤치호의 장남 윤영선이 3대 농림부장관에 임명된다. 농지개혁을 주도한 그 사람이다. 1949년 해위는 재혼을 하는데, 부인이 공덕귀 여사다. 공 여사는 당시 여성운동가이자 신학자로 독신이었는데, 신학대 박사유학을 포기하고 해위와 결혼한다. 통영 사람이다.


[사진 3]  해위와 공덕귀 여사와 자녀들  1960년 8월 안국동 자택에서 경무대로 들어가기 직전 기자회견 장면이다. 공덕귀 여사는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을 맡은 이래 인권운동, 양심수 후원활동, 성매매반대활동 등을 펼치며 신학자이자 여성운동가로 살았다. 80년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있었다면, 70년대에는 공덕귀 여사가 있었다.  ⓒ e-영상역사관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 시기는 1952년이다. 38선에서 국군이 피터지게 싸울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났다. 당시 대통령은 간선제였는데, 거창양민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이 대통령 인기가 바닥이었다. 하여 대통령직선제로 개헌하기 위해 대한청년단과 백골단을 동원해 관제데모를 하는 한편, 야당 의원들을 버스채로 헌병대에 연행했다. 이 대통령은 뽑힐 자신이 있었다. 하긴, 임정 때도 난다 긴다 하는 독립 운동가들이 ‘박사’ 타이틀에 무릎을 꿇었으니. 이 대통령은 정치명문 조지 워싱턴대를 졸업했고, 하버드대에서 석사, 프린스턴대에서 박사를 땄다. 이만한 학벌은 지금도 드물다. 우리나라 정치는 참 아이러니한 게 많은데, 대통령직선제의 뿌리는 장기독재에 있고, 야당의 뿌리는 이 박사를 추대한 한국 민주당에 있다.

잠깐 대통령


해위는 이 대통령의 정치조작에 실망했다. 유학시절 겪은 유럽식민주주의와 부산정치판은 전혀 달랐다. 그는 자유당을 탈당해 야당에 뛰어든다. 당시 숙부 윤치영이 국회 부의장으로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이승만 사람이었다. 해위 뿐만 아니라 역대 내각인물 중에는 후에 반 이승만으로 돌아선 인물이 많다. 초대 국무총리 이범석은 자유당 창당과 부산정치파동을 주도했으나, 이 박사의 견제로 1956년 자유당을 탈당한다.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도 부산시절 돌아서 1952년 대선 때는 민주당 대선후보로 이 대통령과 격돌한다. 해위는 1954년 종로에서 3대 민의원에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1960년까지 3선을 했다. 민주당에서도 승승장구해 중앙위원과 최고위원을 역임하며 신익희, 조병옥과 함께 민주당 구파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한다.


[사진 4]  제 4대 대통령 시절의 윤보선  오른쪽이 장면 총리다. 1960년 8월 19일, 총리 인준식 직후 장면 총리가 청와대를 예방했을 당시 모습이다. 대통령과 총리인 두 사람은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리더로서 이후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위키백과

   그의 관운이 최고조를 달한 것이 4․19혁명 때다.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그는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문제는 당시는 내각제라 대통령은 힘이 없고 민주당 신파의 리더 장면 총리가 집권자였다. 헌데 해위는 장면정부에 일일이 간섭하고 군통수권을 행사하려 했다. 비서진이 삼청동 총리공관과 청와대를 오가며 진땀을 흘렸다. 그것도 잠시. 몇 달도 안 되 5․16이 터졌다. 쿠데타 측에서 계엄령을 추인하고 지지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했다. 그런데 해위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하겠다는 요청도 거절했다. 동족상잔과 북한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쿠데타세력에 대한 판단유보였을까, 장면정부에 대한 불신의 연장이었을까?

   해위는 쿠데타 이후에도 무려 10개월 동안 대통령으로 있다가 1962년 3월에 하야했다. 이후 반독재투쟁의 지도자로 변신한다. 1963년 박정희 소장이 처음 출마한 대선에서 민정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한다. 그러나 15만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한다. 이 선거는 참 특이한데, 야당후보가 여당후보를 ‘빨갱이’라며 흑색선거를 펼쳤던 유일무이한 대선이었다. 신문에도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원 경력과 숙군 당시 체포사실이 상세히 보도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휴전된 지 불과 10년, 유권자 중 수백만 명이 빨갱이로 몰려 죽거나 월북한 사람의 가족이었다. 해위의 흑색선전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 허나 해위 측의 빨갱이 공세는 박 정권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63년 대선 직전 주한미대사관은 박 대통령과 정부 핵심인사들의 좌익경력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주한미대사관은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을 필두로 중앙정보부의 김용태, 전 공보부 장관 이원우, 공화당 총무 김동환, 미 대사관 연락책 김규환, 공화당 지도자 김명구 등 과거 좌익이었거나 좌익에 협력한 사람들이 정부에 포진해 있다고 보고했다. 63년 대선 이후 정부는 ‘반공’ 투쟁을 넘어 대대적인 ‘멸공’ 투쟁을 펼치기 시작하고, 좌익전향자들을 고용해 북한과 공산주의를 연구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후에 북한연구 1세대가 된다.


[사진 5]  1967년 대통령선거 포스터  박정희 후보의 포스터는 약력도 없이 깔끔하다. 포스터에는 “우리들과 그리고 귀여운 아들딸들이 좀 더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땀 흘려 일하겠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반면에 윤보선 후보의 포스터는 약력과 신민당의 7개 공약이 빼곡히 적혀있다. 포스터에는 “빈익빈이 근대화냐 썩은 정치 뿌리뽑자!!”라고 적혀있다. 문맹자가 많아 후보 기호를 작대기로 표시했다. 공화당은 파벌과 보스에 좌우되던 기존 정당체제를 극복하기 위해 당이 국회의원을 장악하는 근대적 정당체제를 도입했다. 포스터를 비교해 보아도 훨씬 세련되다.  ⓒ네이트


재야대통령


1963년부터 해위는 야당의 지도자로 우뚝 선다. 1965년 통합야당인 민중당 고문으로 추대되어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당시 DJ가 민중당 대변인이었고, YS가 최연소 민중당 원내총무였다. 끝내 한일협정이 체결되자 해위는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YS가 이를 보고 1983년 무기한 단식투쟁의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숙부 윤치영은 쿠데타 측에 협력한다. 그는 1962년 2대 공화당 의장에 취임했고, 1963년 대선에서는 박정희 후보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67년 대선에서도 공화당 의원으로 선거대책본부에서 활동했다. 해위는 사석에서 숙부 윤치영을 만나면 아는 척도 안했다고 한다. 참 얄궂은 인연이다.

   해위는 참 고집 있는 사람이다. 1967년 제6대 대선에도 출마한다. 결과는 더 벌어진 116만 표 차이로 낙선. 당시 정당은 민중당보다 더 큰 통합 야당인 신민당이었다. 이 시절부터 DJ와 YS의 대결이 본격화된다. 1967년 11월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이 있었는데, DJ와 YS가 붙었다. 결과는 YS 22표, DJ 9표로 YS의 압승이었다. 두 정치인은 이후에도 신민당에서 늘 격돌했다. 최대 접전은 1970년 신민당 대선후보 지명전이었다.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YS를 필두로, DJ와 소석 이철승이 격돌했다. 당수 유진산을 비롯한 야당지도부는 40대를 ‘젖비린내 나는 어린애들’이라며 무시했다. 허나 백성들은 이전 대선에서 조병옥과 신익희가 대선도 치러보지 못하고 병사한 뼈아픈 경험 때문에 40대기수론에 열광했다. 신민당 당내경선 결과는 DJ 승. 사실은 DJ와 소석의 거래가 있었다. YS는 군중도 없는 시골 읍면에서 DJ 지지를 호소하며 혈루를 삼켰다. 절치부심한 YS는 1974년 비로소 신민당 당수를 거머쥔다.


[사진 6]  1967년 6월 8일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김영삼 후보와 김대중 후보의 선거포스터  두 사람 모두 신민당의 총선 구호였던 ‘단일 야당 밀어주어 일당 독재 막아내자’를 내걸었다. 신민당 원내총무였던 YS는 부산 서구에서 출마했는데, 공화당 후보를 여유 있게 이기고 4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DJ는 전남 목포에서 출마했는데, 공화당이 전 체신부장관 김병삼의 지역구를 옮기면서까지 낙선전략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당선되었다.  ⓒ한국일보

   크게 보면 YS는 신익희-조병옥-윤보선-유진산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구파 사람이다. DJ는 장면-박순천-정일형으로 이어지는 민주당 신파 사람이다. 흔히 YS와 DJ는 분열한 시기만 기억하는데, 사실 함께 한 시절이 더 길다. 두 사람은 1959년 민주당에서 정책위원을 맡으며 정치 파트너로 인연을 맺었고, 1979년까지 20년 동안 민중당과 신민당에서 함께 야당생활을 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는 민추협과 통일 민주당에서 반독재 투쟁을 펼쳤다. 4․19때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5․16쿠데타 후 구파가 탈당하면서 갈라졌다. 그러다 67년 대선을 앞두고 구파와 신파가 합쳐 신민당을 창당한다. 이 신민당이야 말로 정통야당의 매카다. 신민당은 1979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존재했다. YS와 DJ 뿐만 아니라 이철승과 이기택도 신민당에서 거물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야당정치인의 자녀들이 국회에 많다.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인 김한길은 박정희정권시절 통일사회당 당수였던 김철의 아들이다. 2대째 대결중이다. 새정치민주연합 정호준 의원은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이었던 정일형의 손자다. 부친 정대철도 민주당 대표를 역임해 3대째 야당이다. 새누리당 최고위원인 정우택은 1979년 YS가 신민당 총재직에서 제명되었을 때 직무대행을 맡았던 정운갑 의원의 아들이다. 부친과 달리 여당에 몸담고 있다. 혹독해서였을까? 윤보선의 자녀 중 정치인은 한명도 없다.

결기


해위는 신민당 대선후보로 김대중이 선출되자 1971년 탈당한다. 박 대통령과 싸울 인물은 내심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윤보선은 국민당을 창당하고 총재에 취임한다. 국민당에는 주로 신민당에서 유진오 등의 주류와 DJ의 대선후보 선출에 반발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진보당 부위원장 출신인 박기출과 광복군출신인 장준하, 신민당 부총재였던 조한백도 입당했다. 그러나 야당후보단일화 요구가 거세지자 윤보선은 국민당 대선후보지명을 고사한다. 대타로 나선 박기출은 DJ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다. 71년 대선은 여당의 승리로 돌아갔다. ‘40대 기수론’은 ‘마지막 출마론’을 넘지 못했다. 여기에는 DJ를 야당지도자로 만든 일등 공신인 엄창록의 전향도 큰 몫을 했다. 흑색선전의 귀재로 박 정권을 괴롭혔던 엄창록은 선거 막판에 여당 캠프에 들어가 영남지역에다 “호남인이여 단결하라!”라는 유인물을 뿌리고 다녔다. 지역감정이라는 한국선거의 고질병은 그렇게 창조되었다.

   해위는 대쪽 같았다. 1972년 유신이 선포되자 반독재투쟁에 박차를 가한다.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 2차 인민혁명당사건을 발표해 민주화세력을 잡아들였는데, 해위는 박형규 목사, 지학순 주교 등과 함께 사건의 배후세력으로 투옥된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한 것은 이전에 해위가 박형규 목사에게 준 전세자금 45만원이 민청학련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박형규 목사는 개신교 대학생들의 독서모임 장소로 쓸 전세방 보증금을 구하다 해위에게 부탁했다. 해위는 공덕귀 여사를 통해 전세자금을 내어주었는데, 자금의 출처가 밝혀지자 민청학련을 북한의 지원을 받는 용공세력으로 몰려던 박정권의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해위는 풀려난 후 다들 꺼려하던 인혁당 관련자의 구명운동에도 적극 참여한다. 1976년에 벌어진 유신독재 초유의 민주화투쟁인 ‘3․1민주구국선언’은 해위의 그늘에서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DJ는 어차피 국내언론에 보도도 안 될 테니 선언문에 ‘민주화를 요구한다’ 정도로 쓰자했으나, 해위는 ‘박정희 독재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안 들어가면 서명을 못한다고 버텼다. 당시 야당이나 재야세력은 ‘전 대통령’인 해위의 정치적 우산이 절실했던 마당이었다. 현실적인 DJ와 결 곧은 해위의 단면이다.


[사진 7]  1975년 4월, 유신정권에 맞서 재야세력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야당지도자들  오른쪽부터 양일동 통일당 당수, 윤보선 전 대통령, 김영삼 신민당 총재, 김대중 전 신민당 대선 후보다. 윤보선의 중재로 시작된 4자회담 결과 통일당과 신민당의 합당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중앙일보

   그 후에도 해위는 안국동 자택에 머물며 야당과 재야세력의 든든한 우산이자 정치적 지도자로 살았다. 1979년에는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을 맡았다가 잠정적으로 정계를 은퇴한다. 그는 안국동 자택에 있다가 10․26사태 소식을 듣는다. 해위의 한마디는 ‘인과응보’였다. 윤보선은 11월 신군부와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규탄하는 YMCA 위장 결혼사건에 참여했다가 징역 2년을 선고받는다. 그의 나이 83세 때의 일이다. 1980년에 들어서자 해위는 YS와 DJ를 만나 조국의 미래를 위해 두 사람이 단일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재가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정계를 은퇴한다. 1980년 신군부측은 윤보선의 자택을 찾아와 국정자문회의 의원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한다. 해위는 이를 수락한다. 그는 국정자문위원으로 있으면서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 관련자들의 사면복권을 위해 노력했다. 1987년 대선 때는 노태우 후보를 지지했다. 해위의 정치인생을 되돌아보면, 사실 해위의 방점은 ‘반 독재’보다 ‘반 박정희’에 맞춰있었다고 보는 게 맞다. 국민당 창당과 신군부시절 정치행보가 그렇다. 그만큼 박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컸다.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0년에 서거했는데, 향년 93세로 천수를 누렸다. 해위는 국민장이 아니라 조촐한 가족장을 치렀다. 그는 죽음에도 참 결기가 있어, 생전에 독재자와 함께 누울 수 없다며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했다. 그래서 해위의 묘는 충남 아산에 있다.


[사진 8]  충남 아산시 음봉면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의 부부묘  이곳은 해평 윤씨의 선산으로 해위의 고조부부터 부모님묘까지 함께 있다.  ⓒ다음카페-문화사랑오솔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