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뒷담화] 분단에 갇힌 영혼, 시인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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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뒷담화 #7

 


분단에 갇힌 영혼, 시인 백석

 


김선호(현대사분과)

 


정주성(定州城)



[사진 1]  아오야마 학원 영어사범학과 시절의 백석 도쿄 시부야에서 22살 무렵 찍은 사진이다. 지금도 보기 드문 미남이다. ⓒ사진 출처 쿠키뉴스

   키 185cm의 이 미소년은 안타깝게도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시인이다. 안타까운 이유는 그의 인생에 담겨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시인, 백석이다.그렇게 유명한 시인이지만, 그의 집안과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게 없다. 그는 191271일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에서 태어났다. 김일성과 동갑이다. 백석은 아버지가 37살에 얻은 첫아들이었다. 그 뒤로 21녀가 태어났다.본명은 백기행(白夔行)이다. 백석의 고향, 정주는 문인의 고장이다. 이광수가 정주군 갈산면 익성동 출신이다. 김소월은 1902년 평북 구성군에서 태어났지만, 백일 후부터 정주군 곽산면 남서동에서 자랐다. 백석의 아버지는 백시박(白時璞)으로 사진사였다. 그는 사진 기술을 익혀 조선일보에서 사진 반장을 지냈다고 전해진다. 백석의 어머니는 이봉우(李鳳宇). 그녀는 서울 출신으로 백시박과 결혼해 정주로 왔다. 백시박과는 13살 차이다. 백석의 모친은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았다. 고당 조만식은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교장 시절 백석의 집에서 하숙을 했다. 아버지 백시박은 동향인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와도 가까웠다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버는 데는 재주가 없었던 듯하다.

   백석은 1918년 평북 정주에 있던 오산 소학교에 입학한다. 1924년에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해 1929년에 졸업한다. 당시 오산학교 교사로는 이광수가 있었고,김억도 교사였다. 근대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이중섭도 오산학교 출신이고, 인민군 초대사령관 최용건도 오산학교 출신이다. 그러나 백석은 집이 가난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다.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현상모집에 단편소설「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면서 조선 문단에 등단한다. 백석의 소설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의 눈에 띄어 장학금을 받고 도쿄로 유학을 가게 된다. 아오야마(靑山) 학원 영어사범학과에 입학한 백석은 유학 시절 영어, 불어,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백석은 1934년 졸업해 귀국했다.

나타샤


유학 시절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백석의 첫 직장은 학교가 아닌 조선일보 출판부였다. 조선일보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잡지『여성』을 만들며 안톤 체홉의 작품을 번역해 신문에 싣기도 했다. 단편소설로 등단하고 번역가와 편집자로 활동하던 백석은 1935년 시「정주성」을 발표하며 시인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1936년 첫 시집『사슴』을 출간한다. 왜 그랬는지 백석은 이 시집을 100부만 찍었는데, 그의 시를 좋아한 윤동주는 시집을 못 구해 직접 필사해서 애송하고 다녔다. 조선일보를 다니던 백석은 1935년 친구의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한 여학생을 만난다. 그녀는 이화여고를 다니던 박경련으로 백석은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1912년생인 백석은 스물넷, 박경련은 열여덟이었다. 1936년 백석은 박경련을 만나러 두 번이나 통영에 내려간다. 그러나 번번이 만나지 못하고 올라온다. 이 시절「통영」이라는 시를 썼다.다음 해인 1937, 백석이 사모했던 첫사랑 박경련은 친구 신현중과 결혼한다.


[사진 2]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 시절의 백석 머리스타일과 양복 옷매무새에서 모던뽀이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사진 출처 울산매일


백석은 더는 서울에 살기 싫었다. 그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함흥 영생고보 교사채용에 응시해 함흥으로 간다. 그리고 두 번째 사랑이 그를 찾아온다. 백석은 어느 날 학교 회식에 참석했다가 옆에 앉은 여인을 보고 다시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자야김영한이다. 김영한은 권번, 즉 기생출신이었다. 그러나 백석은 1937년 가을,잠시 고향에 갔다가 부모님의 강권으로 맞선을 보고, 초례까지 치르게 된다. 허나 장가든지 사흘 만에 집을 나와 함흥으로 달려간다. 백석의 초례소식에 실망한 김영한은 그가 학교에 출근하는 걸 보고, 그길로 이불보따리를 싸서 서울로 내려온다. 1937년 말의 일이다.

   1938년 봄, 백석은 서울에 있던 청진동에 있는 김영한을 찾아온다. 둘은 다시 만나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백석은 조선일보에 다시 들어간다. 그의 시「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나오는 아내와 같이 살던 집은 바로 이 청진동 집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백석은 19396, 출장을 간다고 하고 집을 나가 고향에 갔다가 또 한 번 혼인을 한다. 집으로 돌아온 백석은 말이 없었으나, 김영한은 직감적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백석은 섬세했으나 유약한 남자였다. 1939년 말, 백석은 김영한에게 만주로 떠나자고 얘기한다. 그러나 그녀가 확실히 대답하지 않자 혼자 신경으로 떠나버린다. 신경으로 간 백석은 그곳에서도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는 국내 문학지에「北方에서」등의 시를 발표하였고, 1940년 조광사에서 토마스 하디의 소설『테스』를 번역해 출간하였고, 러시아 소설을 번역하기도 했다. 그도 사람인지라 먹고 살아야 했다. 백석은 만주에서 지인의 소개로 측량보조원과 측량서기를 했다. 일제 말기에는 안동(지금의 단동)의 세관에서 근무했다. 측량기를 들고 만주벌판에 서서 백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 3]  백석의 첫사랑 박경련(오른쪽)  신현중과 결혼한 후 통영에 내려가서 살던 신혼 시절의 사진이다. ⓒ사진 출처 한산신문


[사진 4]  백석의 연인 김영한  그녀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살았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녀의 법명이 길상화라서 법정스님이 절 이름을 길상사라고 지었다ⓒ사진 출처 경북대신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1945
815일 해방이 되자 백석은 중국 안동에서 다리를 건너 신의주로 들어온다. 그는 신의주에서 잠시 머물다가 이내 고향인 정주로 갔다.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19459월 백석은 돌연 평양으로 간다. 그의 평양행은 오산학교 시절 스승인 조만식 때문이었다. 조만식은 백석의 부친, 백시박과 가까운 사이였다. 백석은 조만식의 요청으로 러시아어 통역비서를 맡는다. 194510월 중순에 평양 일본 요정 가센에서 열린 김일성 환영만찬에도 조만식과 함께 참석해 통역했고, 소련군정과도 자주 접촉했다. 이 시기 백석의 행적을 증언해주는 이가 있다. 월남한 극작가 오영진이다. 오영진은 평양출신으로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과를 졸업한 인물로, 일본에서 영화 조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후 평양에 설립된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부에 참여한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아버지인 오윤선이었다. 827일 건준은 조선공산당 평남지구위원회와 통합해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확대 개편된다. 오영진은 조만식의 비서였는데, 해방 직후 백석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외사과장 백석은 본업인 시를 집어치우고 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하기에 바빴다. 최아립이라는 중노인(中老人)은 군사령부 직속 통역관으로 전출했으므로 노어를 해독하는 유일한 존재인 백석은 몸이 열이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오영진『소군정하의 북한 하나의증언』, 중앙문화사, 1984, 83)


여기서 주목할 점은 외사과장이란 직책이다. 소련군 본대가 평양에 들어온 날은 826일이다. 오영진은 백석이 소련군사령부 손님을 접대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백석은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외사과장을 맡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평남인민정치위원회의 간부명단을 확인해 보았으나, 위원 이하의 명단은 찾을 수 없었다. 위원장은 조만식, 부위원장은 오윤선과 현준혁이었고, 32명의 위원이 있었다. 인민정치위원회는 소련군사령부와 수시로 업무를 조율했다. 백석은 이곳에서 러시아어 통역과 외사과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 5]  19459월말 평양의 한 요정에서 만난 조만식과 김일성 소련군사령부가 주선한 자리다.조만식은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이었고, 김일성은 소련군 평양경무사령부 부사령관이었다.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한 날이 922일이므로 그 직후에 찍은 사진이다. 당시 조만식은 머리에 종기가 나서 늘 머리띠를 하고 다녔다. 가운데는 소련군사령부의 정치군관 메끌레르 중좌고, 양 옆의 여인들은 평양권번 기생들이다ⓒ사진 출처 사색의향기


평양인민정치위원회 부위원장 현준혁이라는 인물은 북한 정치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평남 개천 출신으로, 연희전문학교(지금 연세대) 문과와 수재들만이 들어간다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그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 교사로 부임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32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했는데, 바로 그때 현준혁이 교사로 있었다. 현준혁은 대구사범에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학생들과 함께 항일동맹휴교를 주도한다. 그는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6년간 복역했다. 그는 해방 직후 북한의 정치 중심지인 평양에서 조선공산당 평남지구 책임비서를 맡았다. 그는 해방 당시 북한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93일 소련군사령관을 만나고 조만식과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던 중, 평양시내에서 암살당한다. 살아있었더라면 박헌영과 함께 김일성의 라이벌로 떠올랐을 인물이다. 현준혁이 암살되자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상대편의 테러라며 난리가 났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김일성이 현준혁을 암살했다는 소문이 정설로 떠돈다. 김일성은 1945919일 원산항으로 입국했고, 평양에 도착한 것은 922일의 일이다. 그러니 현준혁은 김일성이 오기 전에 죽었다. 현준혁을 암살한 사람은 대동단 단원 백관옥이었다. 대동단은 염동진이 1943년 평양에서 조직한 비밀결사단체다. 현준혁 암살 사건 후 염동진은 월남해 백의사를 재조직한다. 그리고 신익희가 이끄는 임시정부 정치공작대와 협력해 북한에 침투해서 김일성ㆍ최용건ㆍ강량욱 암살 작전을 펼친다.


[사진 6]  대구사범학교 시절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교사 시절의 현준혁  ⓒ사진 출처 월간조선

고요한 돈


다시 백석으로 돌아가 보자. 백석은 러시아어 통역을 하던 중, 194512월 평양에서 결혼한다. 신부는 당시 스무 살이던 이윤희였다.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백석이 인민정치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인연이 닿은 것 같다. 백석의 신혼집은 평양 대동강가에 있는 돌각담집이었다. 그러나 시인에게 정치는 독약이다. 조만식은 113일 자신의 지지 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주당을 결성한다. 그러나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문제가 결정되자 강력한 반탁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소련군사령부의 회유를 거절해 19461월부터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되었다. 조만식이 연금되자 백석은 비서를 그만두고 절필한다.그는 시를 쓰는 대신 아동문학으로 전향한다. 그리고 외국문학을 번역하며 먹고 살았다고 한다.

   1946년 이후 백석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그는 194712월 당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은 19463월 평양에서 결성된 좌익 문예단체다.문예총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표방했던 카프 출신의 한설야가 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문예총에는『두만강』의 소설가 이기영, 시인 임화, 평론가 김남천, 소설가 이태준도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문예총 외국문학분과에 소속되어 번역활동을 했다.백석은 이미 일제 말기에도 영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을 번역한 적이 있다. 이 시절 백석이 번역한 작품이 미군이 북한에서 가져간 문서에 남아있다. 러시아 소설가 숄로호프가 쓴『고요한 돈』이라는 작품이다.『고요한 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의 대표작으로, 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이 작품 외에 백석의 번역 작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 작품은 1950220일에 북한 교육성에서 출판되었다. 이 시기 백석은 교육성에 소속되어 있던 것 같다. 같은 시기에 출판된 다른 작가들의 작품은 대개 국립인민출판사조쏘문화협회에서 출판되었다.


[사진 7]  미군 노획문서에서 발견된 백석의 번역 작품『고요한 돈』제2  다른 작품들과 달리 우리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교육성에서 출판하였다.  ⓒ사진 출처 미국 국립 공문서관

사회주의 바다


시인은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백석은 외국문학작품을 번역하고, 아동문학작품을 쓰며, 그 원고료를 받아먹고 살았다. 그런데 백석은 1957년 북한에서 벌어진 아동문학 논쟁에 뛰어든다. 이 당시 백석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외국문학 번역 창작실에 있으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백석은 순수 문학을 강조하며 계급적인 요소를 반대하다 비판을 받는다. 평양시 동대원 구역에 살던 그는 19591월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협동조합으로 하방 된다. 그는 이곳에서 축산반에 배치되어 돼지와 염소를 키웠다. 삼수에 내려간 백석은 갑자기 창작 활동을 활발히 펼친다. 이 시기 백석의 시는 대부분 김일성의 항일운동과 사회주의체제를 찬양하는 시였다. 대표적인 시로「사회주의 바다」,「강철장수」,「나루터」등이 있다.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는 시대에 시인은 구호를 쓴다. 1991년의 김지하처럼

이때 원수님은 원쑤들에 대한 증오로

그 작으나 센 주먹 굳게 쥐여지시고

그 온 핏대 높게, 뜨겁게 뛰놀며

그 가슴속에 터지듯 불끈

맹세 하나 솟아 올랐단다

빼앗긴 내 나라 다시 찾기 전에는

내 이 강을 다시 건너지 않으리라’ (백석,「나루터」)

   이것도 잠시. 몇 편의 시를 발표하다 1962년 완전히 절필한다. 그해 북한 교육문화상 한설야가 좌천되었다. 한설야는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교육국장이었다. 아마도 이때 조만식 계열로 찍혀 재능을 썩히고 있던 백석을 기용했던 것 같다.한설야는 그 후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맡는다. 월북한 예술가 중 가장 대우 받은 인물이 한설야인데, 이는 그가 김일성 우상화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7년 북한 최초의 우상화 작품인『김일성 장군 개선기』를 출판했다. 우상화 선봉장으로는 조선의용군 출신 김창만도 유명했다. 결국 둘 다 좌천되었다.한설야 좌천 이후 백석은 삼수갑산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글밖에 모르던 백석은 농사일을 제대로 못해 마을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백석은 하루에 한 사람을 열 번을 만나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갈 만큼 겸손하고 어진 성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삼수군 사람 가운데 백석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삼수군 문화회관에서 청소년들에게 문학창작을 지도하며 살았다.시인 백석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삼수에서 사망한다. 199617,향년 85세였다. 그는 슬하에 21녀를 두었다. 한설야는 그 전에 지방으로 좌천되어 1976년 사망했다.


[사진 8]  양강도 삼수군 협동농장에서 살던 말년의 백석  이 사진은 그의 아들이 중국을 통해 반출한 사진이다. 백석 왼쪽이 부인 이윤희, 뒤가 둘째 아들과 막내딸이다. 왼쪽 사진은 백석의 북한 인민증(주민등록증)이다. 아들ㆍ딸을 낳아 키우며 85세까지 살았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북한에서 수십 만 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시절을 거치고 죽었다는 점이다. 그는 인민증에서 다행스럽게도 웃고 있다.  ⓒ사진 출처 시사인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해방 후 서울에 있던 김영한은 제법 돈을 모았다. 그리고 전쟁 중이던 1951년 삼청동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구입한다. 당시에 정치협상은 국회가 아니라 요정에서 이루어졌다. 197274남북공동성명 전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박성철 부수상이 미국 측과 몰래 만난 곳도 종로구 익선동의 오진암이란 요정이었다. 그렇게 역사의 뒤편을 목격해온 김영한은 1980년대까지 수백억의 돈을 모은다. 그리고 이 대원각을 법정스님에게 기증한다. 지금의 삼청동 길상사다. 그녀는 19991114일 사망했다. 백석의 부인 이윤희와 자식들은 아직도 삼수군에서 살고 있다.

   신현중과 결혼한 박경련은 어떻게 됐을까? 박경련은 결혼 후 서울 가회동에 살았다. 가회동 시절 신현중은 백석을 가회동집으로 초대한 적이 있었다. 들어서는 백석은 어색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박경련은 자리를 피해 옆에 있던 외삼촌집으로 갔다. 그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현중은 조선일보에 사표를 낸다. 퇴직금을 받은 후 고향인 통영으로 내려간다. 부부는 충무공 사당이 있는 명정동에서 살았다.신현중은 원래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엘리트다. 그는 경성제대 시절 반제동맹사건을 주도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통영에 내려온 후 진주 여고와 통영 중학교 등에서 교직에 종사하며 평생 통영에서 살았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지방에 살면서 정치판에 나가지 않은 보기 드문 경우다. 그는 19931013일 통영에서 사망한다. 박경련은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했다. 그녀는 통영에서 문학 활동을 했는데,남편 사후 그를 사모하는 시를『늘빛문학』을 통해 절절이 전하곤 했다. 김광석이 가수는 부르는 노래처럼 산다고 했던가? 지금도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백석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그림 1]  1959년부터 1996년까지 백석이 38년 동안 살았던 북한 양강도(원래 함경남도) 삼수군  백두산이 있는 개마고원 끝으로, 국경 너머가 중국 장백현이다. 공교롭게도 삼수군 주변은 김형직군,김정숙군, 김형권군, 보천군으로 모두 김일성 가계를 우상화한 지역들이다. 한설야도 숙청된 이후 양강도 낭림군의 협동조합에서 살았다.  ⓒ사진 출처 한국브리태니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