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뒷담화] 북한의 친일파, 인민군이 된 소년비행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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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뒷담화 #6


북한의 친일파, 인민군이 된 소년비행병(2)


김선호(현대사분과)


연대장과 친일파

한국전쟁 때 미군은 전장에서 획득한 수 십 만장의 북한 문서를 본국으로 가져갔다. 학자들은 이를 ‘노획문서’라고 부른다. 이 노획문서에는 북한 공군이 작성한 비밀문서가 들어있다. 필자는 이 문서더미를 뒤져 북한 공군에서 대대장급 이상의 경력을 찾아냈다. 비행사단에는 3개 연대가 있었다. 추격기연대장은 서주필, 습격기연대장은 최현옥, 교도연대장은 허민국이다. 먼저, 추격기연대장 서주필의 경력을 추적해보자.


[사진 1] 미군노획문서에 들어있는 인민군의 비밀문서  이 문서의 작성자인 ‘제861군부대’는 인민군 비행사단 습격기연대의 위장부대명이다. 군사용어로 ‘단대호(單隊號)’라 부른다. 요즘도 강원도 군부대에 가면 부대이름 대신 ‘5742군부대’와 같이 숫자가 쓰여 있는데 그것과 같은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단대호는 아직까지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이 문서는 1950년 1월 14일부터 3월까지 비행사단 습격기연대에 적을 둔 연대장 이하 간부들의 통계가 들어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서주필은 1927년 함남 함흥시에서 노동자인 서정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종학력은 중학교 3학년 졸업이다. 당시로서는 고등교육을 받은 축에 속한다. 그는 중학교 졸업 후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일본 육군 소년비행병학교에 자원한다. 1943년 후쿠오카현 남부, 다치아라이(大刀洗)에 설립된 소년비행병학교에 15기 을로 입학한다. 이곳에서 1년간의 훈련을 마치고 1944년 졸업한다. 졸업 후 배치된 지역은 알 수 없다. 해방 후 서주필은 고향인 함흥으로 돌아온다. 당시 함흥에는 항공분야 경력자들이 자발적으로 ‘항공협회’를 조직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에 가입해 활동한 것 같다. 1946년 서주필은 평양학원에 입학한다.

   평양학원은 원래 김일성그룹에서 활동하다 전사한 자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창설한 엘리트학교다. 현재 ‘만경대혁명학원’의 전신으로, 이 학교 출신들이 북한정권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 김정일은 물론이고, 전 노동당 검열위원장 김국태(부수상 김책 아들), 인민군 총참모장 최룡해(인민무력부장 최현 아들), 노동당 선전선동부장 김기남,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태복 등 북한 정권 서열 50명 중 10명 이상이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다. 그런데 일본 소년비행병 출신인 서주필이 입학한 것이다. 그만큼 북한지도부는 일본군 조종사출신들을 우대했다. 서주필은 평양학원에서 공군 장교로 육성된다. 그리고 1949년 12월 항공사단이 창설되자 추격기연대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23살이었고, 미혼이었다.


[사진 2] 평양학원 기관지『새삼천리』, 1947년 2ㆍ3월 합병호  평양학원 기관지 중에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발견된 것이다. 권수로는 ‘제7호’다. 1947년 3월 26일에 평양학원편집부에서 발행하였다. 책임주필은 소련출신 고려인 기석영이다. 앞장 맨 위에 인쇄된 ‘новая корея’의 뜻은 ‘새조선’으로, ‘새삼천리’의 러시아어 표기다. 두 번째 장 평양학원의 정문 오른쪽에 태극기가 걸려있다. 북한은 정부수립 전까지 공식행사에서 태극기를 사용하였다. 문 꼭대기에 걸려있는 낫과 망치는 소련공산당의 상징이다. 북한식 사회주의가 정착되기 이전 소련과 민족주의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습격기연대장은 최현옥이다. 그는 1928년생으로, 함북 회령군 출신이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 보통학교만 겨우 졸업하였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후 독학으로 계속 공부해 결국 중학교를 마친다. 최현옥은 읍내에 붙은 ‘소년비행병 모집포스터’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1944년 여름,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을로 졸업했다. 서주필과 동기다. 해방직후 북조선공산당의 관리를 받다가 1946년 10월 평양학원에 입학한다. 최현옥은 비교적 일찍 노동당에 가입한 것 같다. 그와 평양학원 동기인 윤응렬은 그가 자신의 발언과 행적을 일일이 상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했다.

   최현옥은 1948년 11월 1일 항공연대가 창설되자 습격기대대 대대장으로 임명된다. 이후 연대장으로 진급한다. 서주필은 노동당에 입당하지 못했는데, 최현옥은 노동당원이었다. 당시 22살로, 그 역시 미혼이었다. 교도연대장은 앞에서 살펴본 허민국이다. 그는 나고야항공학교를 졸업했다. 서주필과 최현옥은 소년비행병학교 출신이고, 허민국은 나고야항공학교 출신이다. 소년비행병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모두 일본군 조종사로 투입되었다. 이 세 명 중 친일파는 누구인가?


[사진 3] 습격기연대의 비행계획표  1950년 3월 1일까지 2대대에서 진행한 항법훈련 결과다. 연대장 최현옥이 비준하고, 2대대장 강대용이 결제를 올렸다. 비행계획표에서 보이다시피 전쟁전까지 비행사단의 훈련은 대부분 지상훈련으로 진행되었다. 2월 비행훈련은 총 20시간 30분에 불과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대대장과 친일파

   다음으로, 대대장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추격기연대와 습격기연대에는 각각 3개 대대가 있었다. 필자는 대대장들의 일제시기 경력을 추적해 보았다. 대대장 6명 중 4명이 소년비행병학교 출신이었다. 이 중 한명만 살펴보자. 추격기연대 1대대장은 현용서(玄龍瑞)다. 그는 1927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가난한 소작농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용서는 1940년 소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졸업 후 가정형편이 곤란해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현용서는 혼자 평양으로 가서 공장직공, 학교급사, 인부 등으로 일하면서 중학강의록을 가지고 독학했다. 공부에 대한 의지가 대단했다. 그는 결국 중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43년에 평양 시내를 걷다가 ‘소년비행병 모집 포스터’를 본다. 멋진 제복을 입고 창공을 나는 조종사들의 모습은 식민지 소년의 심장을 자극했다. 그는 현해탄을 건너가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을로 입학한다.

   현용서는 소년비행병학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은 후 1944년 8월에 졸업했다. 졸업 후 그는 일본군 남방 제2공군에 편입되어 필리핀 마닐라로 배치되었다. 1945년 필리핀에서 일본군이 대패하자, 그는 대만으로 후퇴한다. 그는 1945년 2월 대만 제8비행사단에 편입된다. 1945년 8월 그는 대만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차출된다. 그러나 행운이 그를 따랐다. 차출된 지 며칠 후 일제가 패망한 것이다. 해방직후 그는 북한으로 귀국했다. 그는 1946년 8월 26일 평양학원에 입학했고, 항공연대에서 비행교관으로 근무한다. 1949년 12월 비행사단이 창설되자 추격기연대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현용서는 당시 23살이었고, 그 또한 노동당원이었다.


[사진 4] 노획문서에서 발견된 ‘현용서’의 개인학습장  1948년 2월에 작성한 것으로, ‘조종교육 참고서’다. 현용서의 직책이 ‘비행교관’으로 기록되어 있다. 항공연대시절의 학습장이다. 한문으로 쓰여 있는데, 필체가 제법 괜찮다. 해방 당시 북한의 문맹률은 90%에 가까웠기 때문에 현용서처럼 한문을 쓸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자, 그럼 북한은 왜 이처럼 많은 일본군 출신을 공군 장교로 기용했을까? 육군 보병의 주무기는 소총이다. 군대를 갔다 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소총은 금방 배워서 쏠 수 있다. 제식훈련이나 전투대형도 고도의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동북항일연군이나 조선의용군 출신 중에는 육군 장교가 많았으므로, 굳이 일본군 출신을 쓸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인민군 장교들 중에 사단급 이상이 투입된 대규모 연합작전을 지휘해본 사람이 없었다.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고전을 면치 못했던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공군은 달랐다. 공군의 주무기는 전투기다. 전투기를 이륙하고, 비행하며, 착륙하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수학과 기상학, 계기학, 전정기학 등 배워야할 분야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또한, 전투기를 유지ㆍ보수하는 기술부대원들도 상당한 전문지식이 필요했다. 하물며 북한 전투기는 소련제다. 전투기에 관한 모든 용어와 교재가 소련어이기 때문에 소련어도 배워야 한다. 이론교육, 지상훈련, 연습비행, 전투비행을 거치다보면 1년을 배워도 전투기를 제대로 몰기 힘들다.

   그러나 김일성그룹이나 중국 연안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공군에서 근무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해방된 상황에서 공군에 근무했던 사람은 일본군 출신이 가장 많았다. 또한, 그들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전쟁에 투입되어 실전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공군은 창설해야겠고, 아는 사람은 없고, 키우려니 막막하고. 그러니 경험 있는 일본군 출신들을 데려다 쓴 것이다. 이 때문에 김일성이 해방직후부터 일본군 출신 조종사들을 당 차원에서 직접 관리했던 것이다. 그리고 엘리트학교인 평양학원에 입학시켜 비행교관과 조종사로 육성한 것이다. 남한도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국군에서도 소년비행병들과 일본군 출신들이 공군의 주력이 된 것이다.

   사실 제국일본은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과 고등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해방직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기술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기관사가 부족해 철도는 멈춰 섰고, 공장도 가동을 멈춘 곳이 많았다. 북한지도부는 일본인 밑에서 일했던 기술자들을 총동원했다. 단, 이들은 먼저 친일행위에 대한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소년비행병도 자아비판서를 제출했고, 수시로 사상검토를 받았다. 철저한 사상검증을 통과한 이들은 노동당에 입당하기도 했다. 적응한 이들은 인민군에 남았고,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퇴교 조치되었다.


[사진 5] 추격기연대 1대대장 현용서의『자서전』중 일부  그는 일제강점기 소년비행병학교 경력을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자기네의 침략전쟁에 사용할라하는 미문려구(美文麗句)로서 꾄 소년비행병 모집의 한 장의 포스타에 넘어가 일본 육군학교에 입하였다. (중략) 이 학교에서 약 1년간 교육을 받으메따라 유치한 나의 두내(두뇌)에는 제국주의사상이 깊이깊이 드러갔다. 그러나 반면 일본민족에 대한 증오심은 하로하로(하루하루) 기퍼갔다. 외그러나하면 이 학교에 있어서의 약 30분지 1도 몯되는 조선사람에 대한 정신적 압빡은 퀐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비행기조종술만 습득하갔다라고 결심하야 조종술 습득에 노력하였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소년비행병

   제국 일본은 1933년 ‘소년비행병학교’를 설립한다. 조종사를 대량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치였다. 많은 조선의 소년들이 읍내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창공을 나는 꿈을 품고 현해탄을 건넜다. 당시 소년비행병의 응시경쟁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합격자가 나오면 마을에서는 소를 잡아 잔치를 벌일 정도였다. 특히 태평양 전쟁 후 조종사가 부족하자 일본 육군은 소년비행병학교를 추가로 개설하고 교육기간을 단축한 속성코스를 신설한다. 특히 1943년 9월에 입학한 15기 을은 1,000명이상을 선발했다. 식민지 소년들은 1년 과정의 속성코스를 졸업하고 일본 본토와 동남아전선에 배치되었다. 이 소비15기 을이 실전에 투입된 마지막 소년비행병이다.

   해방 직전 소년 비행병들은 ‘카미카제(神風) 특공대’로 차출된다. 특공작전에서는 정규교육을 받은 육사나 특별 조종 견습사관보다 소년 비행병들의 희생이 컸다. 일례로, 오키나와 특공작전에 참여한 특공대원 1,036명 중 소년 비행병이 335명으로 가장 많았다. 특조는 269명, 육사출신은 82명이었다. 실전경험이 부족했던 소년 비행병들은 미군의 함포를 맞으면 탈출하지 못하고, 명령대로 전투기를 몰고 함선으로 돌진해 자폭했다. 소년 비행병 중 일부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 특공작전을 위해 일본 본토로 이동 중 종전을 맞이한 이들이다. 추격기연대 1대대장 현용서가 이런 운으로 살아남은 경우다.

   본토에 도착하지 못한 소년 비행병들은 현지에서 연합군의 포로가 된다. 소비15기 윤응렬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배치되었다. 그는 카미가제 특공대원으로 차출되어 이동하던 중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해방을 맞이한다. 그는 이곳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된다. 전범이 된 소년비행병들은 캄보디아 프놈펜, 베트남 하노이, 필리핀 사이판 등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조선인임을 주장했지만, 연합군은 그들을 일본인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그렇게 소년 비행병들은 전범이 되었다. 제국일본은 식민지 소년들의 꿈을 착취하고 헌신짝처럼 버렸다. 소년 비행병들은 1945년 말과 1946년 초에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남한으로 귀국한다.


[사진 6] 도쿄 시타마치 풍속자료관에 소장된 ‘육군 소년비행병 모집포스터’  육군항공본부에서 발행했으며, 모집분야는 ‘조종, 정비, 통신’분야다. 소화2년(1927년)생부터 소화6년(1931년)생까지가 입학대상이다. 소화20년(1945년)에 모집했으므로, 15살부터 19살까지 해당된다. 패전 직전에 발행된 것이다.  ⓒ네이버블로그 – rerevero


적과 친구

   귀국한 소년 비행병들은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은 인민군 장교가 되었고, 남한으로 돌아간 이들은 국군 장교가 되었다. 이 운명의 갈림길을 경험한 대표적 인물이 윤응렬이다. 그는 연합군 포로로 있다가 1946년 5월 부산으로 귀국한다. 같이 귀국한 소비15기 을 동기 중 동래가 고향인 전봉희와 의령이 고향인 김두만은 부산에 남는다. 평양이 고향인 윤응렬은 열차와 도보를 이용해 입북한다. 그후 윤응렬은 북한에서 평양학원에 입학해 조종사가 된다. 전봉희와 김두만은 국군에 입대해 공군 장교가 되었다. 소년 비행병들은 해방 후 각각 북한 공군과 남한 공군의 주력이 된다.

   앞에서 보았듯이 북한 공군 창설의 중추는 소년 비행병이었다. 3명의 연대장 중 습격기연대장과 추격기연대장, 총 6명의 대대장 중 4명이 소년비행병출신이다. 국군도 마찬가지다. 공군 창설에 참여한 소년 비행병 2기 이근석 비행단장을 비롯해, 공군의 조종, 정비, 통신 등 모든 분야에서 소년 비행병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에서 지원받은 F-51무스탕기를 몰고 전투에 참여한 조종사들도 대부분 소년 비행병 출신이었다. 그중 소년 비행병 15기는 공군의 기간이 되었다. 공군의 F-51 출격 총 8,495회 중 1,665회를 소비15기가 달성했고, 최초로 100회 출격을 달성한 김두만, 203회 최다출격을 달성한 유치권도 소비15기다. 소비15기는 3명의 공군참모총장, 3명의 작전사령관, 4명의 공군사관학교 교장, 국방부장관을 배출했다.


[사진 7] 소년비행병학교 2기 출신으로 공군 창설을 주도한 이근석 준장 사진  이근석은 1917년 평남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1934년 소년비행병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해방직후 귀국해 1946년 4월 항공부대 창설에 참여한다. 1948년 5월 조선 경비사관학교 간부후보생 1기로 졸업하였고, 육군항공기지사령부에서 비행단장으로 근무하였다. 1949년 10월 공군이 창설되자 공군사관학교 초대 교장에 임명되었고, 1950년 5월에는 공군비행단장에 임명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7월 2일 전투기 인수편대장으로 임명되어 일본 이다쯔케 기지로 가서 전투기를 인수하였다. 7월 4일, 편대를 지휘하고 안양-시흥상공에서 남하하는 인민군을 공격하다 대공포에 격추되자, 탱크로 돌진해 전사하였다.  ⓒ국가보훈처 블로그-훈터, 2011년 7월 6일

   북으로 갔던 소년 비행병 중 일부는 월남한다. 윤응렬은 평양학원에 다니다 사상문제로 상부와 부딪친다. 그는 1948년 6월 해주항공협회 출장을 명목으로 학원을 나와 해주에서 월남한다. 소비15기였던 이세영도 평양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지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1947년 겨울, 소련 전투기가 도입되었을 때 평양비행장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상검토과정에서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그도 1948년 8월경 윤응렬 부친의 도움으로 같은 경로로 월남한다. 윤응렬은 월남 후 국군에 편입되어 한국전쟁에 참전했고, 나중에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세영은 국군에 편입되어 대위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한다. 그는 1951년 4월 21일 F-51전투기를 몰고 출격했다가 인민군 대공포에 격추되어 전사했다. 이세영이 전사한 곳은 공교롭게도 그의 고향인 황해도 신계 상공이었다.

   소년 비행병 출신은 아니지만, 평양학원 조종사 중에서 월남한 사람도 있다. 고봉록은 함흥 갑부의 아들로, 대학을 다닐 때 자비로 비행기 조종술을 배운 인물이다. 이활과 비슷하다. 그는 평양학원에 입학했다가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월남한다. 그러나 고봉록은 개전 초기 서울을 탈출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가 인민군이 서울을 퇴각하던 날 처형된다.

   개전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낮 12시에 처음으로 용산역을 폭격한 인민군 야크기 조종사와 그날 여의도비행장 주번사관은 소년비행병학교 15기 동기생이었다. 인민군 추격기연대 대대장 현용서와 박경옥은 각각 야크기 4대를 지휘해 용산역과 김포비행장을 폭격하고 돌아갔다. 현용서와 박경옥은 소비15기 을 출신이다. 이날 여의도비행장 주번사관은 평양학원에서 조종사로 있다가 월남한 소비15기 을 출신 윤응렬이었다.


[사진 8] 윤응렬의 회고록『상처투성이의 영광』 표지사진은 공군 조종사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의 모습이다. 윤응렬은 1927년생으로 평양이 고향이다. 평양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을로 입학했다. 졸업 후 1944년 8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공군 교육비행대에 배치되었다. 윤응렬은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가 평양학원 비행과에 입대한다. 그러나 평양학원에서 사상검토를 받은 후 1948년 6월 월남한다. 국군 공군에 입대한 그는 한국전쟁 당시 승호리철교 폭파작전 등 총107회 출격을 달성했다. 윤응렬은 공군작전사령관을 역임한 후 퇴역해 현재는 미국 샌디에고에서 살고 있다. 그는 회고록을 통해 소년비행병학교와 평양학원의 교육과정, 남북한 공군 창설과 한국전쟁에 참여한 소년 비행병 출신에 대한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교보문고

   6월 27일 한국전쟁 최초로 한강 상공에서 공중전이 펼쳐진다. 이날 공중전에서 미 공군 F-82와 F-80은 6대의 북한 전투기를 격추했다. 이날 F-80에 격추된 북한 야크기 조종사 중 두 명은 낙하산으로 탈출했다. 이 두 명도 소년 비행병이었다. 한명은 추격기연대 대대장 박경옥이었다. 그는 1927년 생으로, 본적은 함북 온성군이다. 아버지는 사무원이었고, 최종학력은 중학교 졸업이다. 그는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을로 입학해 졸업한다. 그는 1946년 10월 25일 평양학원에 입학하였다. 평양학원 재학 당시 사상문제로 윤응렬과 함께 영창에 투옥되기도 했던 독특한 인물이다. 그는 전쟁 전에 결혼했으며 가족은 4명이었다. 개전 당시까지 가족들과 평양특별시 문수리에 위치한 비행사단 사택에 살고 있었다. 박경옥은 전투기가 격추되자 낙하산을 타고 탈출한다. 그러나 하강 중 권총으로 대항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현장에서 사살된다. 당시 24살이었다.

   격추된 또 다른 야크기에는 교도연대 1대대장 이흥부가 타고 있었다. 그는 윤응렬과 중학교 동창일 뿐만 아니라 집도 이웃에 있었고 부모님끼리도 가까웠다. 그는 1927년에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평양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을로 졸업했다. 해방직후에는 평양학원 항공대에 입대했다. 이흥부는 특히 수학에 뛰어났고, 운동에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인 윤흥렬이 평양학원에서 ‘반동분자’로 몰리자 그를 옹호해주기도 했다. 그는 비행사단이 창설되자 교도연대 1대대장에 임명된다. 교도연대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대원을 양성하는 부대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교도연대장까지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야크기가 격추되자 이흥부는 낙하산을 타고 탈출했다가 체포된다. 그러나 잡혔을 때 이미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는 병원으로 후송 중 과다출혈로 사망한다. 후송도중 그는 동네친구인 윤응렬을 애타게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윤응렬은 당시 출격 중이었다. 이흥부는 목이 탔는지 물을 찾다가 국군이 건네준 사이다 한 모금을 마시고 절명한다. 윤응렬은 1950년 10월 국군이 평양에 입성했을 때 혹시나 하고 이흥부의 집에 찾아간다. 이흥부의 부모님은 국군 장교복을 입고 나타난 아들의 친구를 보고 경악했다. 윤응렬은 차마 친구가 죽었다는 말은 못하고, ‘조종사는 명이 짧으니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돌아선다.

   깨복쟁이 시절부터 친구였던 두 사람. 중학교와 소년비행병학교, 평양학원까지 청춘을 함께 한 두 친구는 그렇게 이별했다. 어디 그들뿐이랴? 창공을 나는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너간 식민지 소년들은 자살특공대와 전쟁포로가 되었다가, 해방 후 분단된 조국의 하늘에서 적으로 만난다. 북한에 있던 소년 비행병들은 전쟁 중 거의 다 전사했다. 대부분 25세 전후의 청년이었다. 운 좋은 몇 명만 살아남아 영웅칭호를 받았다.


[사진 9] 비행사단 조종사의 수기학습장. 조종사 신덕수(申德秀)가 직접 필기한 학습장으로, 제목은 ‘항공이론’  일류신-10기와 야크-9기가 기류에 따라 어떻게 이륙하는지를 그린 것이다. 다른 조종사의 학습장은 대부분 글과 수학기호만 그려져 있는데, 신덕수는 학습장에 많은 그림을 남겼다. 미술적 감성이 풍부했던 이 청년은 기나긴 전쟁에서 살아남았을까?  ⓒ미국 국립문서보관소


살아남은 자들

   살아남은 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공군 지휘부는 모두 살아남았다. 왕련은 전쟁 중 공군이 창설되자 사령관에 임명된다. 그런데 1952년 말 김포비행장을 야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작전에 실패한다. 그러나 작전결과를 허위보고했다가 사령관에서 물러난다. 왕련의 후임으로는 해군사령관이었던 소련출신 한일무가 임명되었다. 조선의용군 동지였던 김학철에 따르면, 왕련은 1958년 군사폭동을 도모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고 한다. 1956년 이른바 ‘8월종파사건’ 이후 북한에 불어닥친 ‘반종파투쟁’의 와중에 체포된 것이다. 김학철은 북한에서『노동신문』기자로 일하다가 한국전쟁 도중 중국으로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 시기 민족보위성 부상 김웅, 인민군 총정치국장 최종학 등 수십 명의 인민군 장성들이 체포되었다. 왕련은 재판 후 현재까지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부인과 장모는 산간벽지의 특별구역으로 추방되었다고 한다. 왕련의 부인은 김학철의 여동생이다. 김학철은 전쟁 중 중국으로 들어올 때 어머니를 모시고 오지 않은 것을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 그리고 생전에 중국에 묻히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2001년 9월 25일 노전사 김학철은 중국 길림성 연변에서 오랜 여정을 마친다. 유골은 평소 쓰던 볼펜, 조선의용대 전우와 찍은 사진과 함께 상자에 담겨 두만강 하류에 띄워졌다. 상자에는 ‘원산 앞바다행 – 김학철의 고향’이라고 적혀 있었다. 죽어서라도 어머니가 묻힌 땅에 가고 싶었던 수구초심이었다.

   문화부사단장 유성걸도 살아남았다. 그는 전쟁 중 항공학교 교장에 임명된다. 그러나 1952년 8월 육군 사단 군사부사단장으로 좌천된다. 정치적 이유보다는 군사적 능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전쟁이 끝나자 1953년 8월부터 평양외국어대학 부교장, 육군대학 강좌장으로 근무한다. 1956년 ‘8월종파사건’ 이후 소련출신에 대한 사상검토가 본격화되자 유성걸은 모스크바에 귀국을 신청한다. 1960년 4월 소련으로 귀국했다. 북한 간부로 있으면서도 소련국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당시 소련출신들은 이중국적을 보유할 수 있었다.

   유성걸은 귀국 후 소련군에서 제대하면서 연금과 대좌 칭호를 받게 된다. 1945년에 입대했으므로 15년 만에 제대한 셈이다. 그후 소련 무력성의 주선으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서 당학교에서 4년 동안 공부한다. 유성걸은 1964년부터 타쉬켄트시에서 경찰서 부서장으로 근무했다. 그는 1988년 공직을 은퇴한 후 타쉬켄트에서 부인과 함께 연금을 받고 살았다. 1990년부터는 북한 민주화를 위해 만들어진 ‘민주통일구국전선’에서 상임위원으로 활동했다. 1995년 5월 20일 당뇨병으로 사망했다. 유성걸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장남은 우즈베키스탄 내무성 건설관리국에서 일하고, 큰딸은 타쉬켄트시 보건부 치과병원 부원장으로 살고 있다.


[사진 10] 소련으로 돌아간 유성걸의 사진  1978년 우즈베키스탄 타쉬켄트시 레닌구역 내무서 정치부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의 모습이다. 대부분의 소련출신들이 1958년을 전후해 모국을 떠나 소련으로 돌아갔다.  ⓒ장학봉 외,『북조선을 만든 고려인이야기』, 경인문화사, 2006

   마지막으로 이활. 그는 한국전쟁 중 공군이 창설되자 부사령관에 임명된다. 전쟁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는다. 이활은 한일무에 이어 공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출신성분이 문제가 되어 사령관에서 물러난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수준은 아니지만, 북한에서도 1956년부터 1960년대까지 대대적인 숙청의 시대가 있었다. 1953년에 발생한 ‘박헌영ㆍ리승엽 간첩사건’이 시발이었다. 이 사건으로 남로당 출신들이 집중적인 사상검토를 받았다. 1956년 8월에는 이른바 ‘8월전원회의사건’이 발생한다. 중국 연안출신들과 소련출신들이 김일성의 단일지도체제에 반기를 든 사건이다.

   이후 이른바 ‘중앙당 집중지도사업’이 북한 전역에서 시작된다. 이 사업으로 해외와 남한에서 들어온 간부, 그리고 친일의혹이 있는 간부들이 집중적으로 사상검토를 받았다. 당시 해외에 있던 간부까지 소환되었는데, 휴전협상 북한대표였던 이상조 같은 이들은 안 들어왔다. 그는 당시 주소련대사였는데, 소환을 거부하고 소련에 망명했다. 이상조는 부산 기장사람으로 조선의용군 출신이다. 사상검토결과, 문제가 있는 간부는 좌천되거나 해직되었다. 유성걸같은 고려인들은 소련으로 돌아갔다.

   이활의 경우, 그전까지 묵인되었던 지주집안과 일본군 출신이라는 경력이 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는 사상 검토 후 함흥시 전기기계공장으로 좌천된다. 이활은 이곳에서 공장 노동자로 10년 넘게 살았다. 그런데 그는 197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다시 복권된다. ‘집중지도사업’시절 ‘종파분자’들의 모함으로 잘못 처벌받았다는 이유다. 이활은 다시 인민군 중장에 임명되었다. 말년에는 ‘조국해방전쟁기념관’에서 공로해설원으로 일했다. 1949년 월북한 강태무와 표무원도 같은 기념관에서 강사로 있었다. 이활은 2007년 7월 3일 노환으로 사망한다. 향년 90세로 천수를 누렸다. 사망 당시 김정일이 그의 빈소에 직접 화환을 보내기도 했다. 그 후 북한에서는 그의 일대기를 다룬 ‘붉은 날개’라는 영화도 제작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 명 중 일본군 출신 이활만 북한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고 있다.

   어떤 이는 이 글을 보고 또 왜곡할지도 모른다. ‘북한 공군은 죄다 친일파였다’라고. 글에 나온 이름과 직책을 정리해 또 다른 친일파표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그러시라. 글에 쓴 건 열 명도 안 되니까. 참전한 북한 공군은 4,000명이 넘고, 자료는 천지삐까리다.


[사진 11] 한국전쟁 중 북한에서 발간한『전투영웅실기』2호에 실린 김기옥 비행사  김기옥은 추격기연대 2대대 3중대장으로 참전했다. 그는 1924년생으로 함경북도 온성군 출신이다. 부모님은 중농이었으며, 중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11월에 평양학원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추격기 조종사로 육성된다. 그는 1949년부터 전쟁 직전까지 YAK-9기, YAK-18기 등을 몰고 202시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비행훈련을 마쳤다. 개전직후 1950년 7월 12일 연대장 서주필이 이끄는 추격기편대의 일원으로 김포비행장 폭격에 나섰다. 이날 전투에서 김기옥은 리문순 비행사와 함께 미군기 4대를 격추했다. 그는 7월 14일 다시 이륙해 대전 상공에서 미군폭격기 2대를 격추하였다(북한의 주장이다). 이상의 전과를 인정받아 7월 15일 리문순과 함께 비행사단 최초로 ‘조선인민공화국 영웅칭호’를 수여받는다. 종전 후 김책공군대학장을 역임했으며 인민군 중장으로 퇴역하였다. 1994년 5월에는 김정일 총비서로부터 70돌 생일상을 수여받기도 했다.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 강사로 활동하다 2000년 11월 76세로 사망하였다. 김기옥은 지금도 북한에서 ‘우리나라의 첫 비행사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