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답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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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답사기 (2)
– 2008 한국역사연구회 여름수련회를 다녀와서 –

김항기(근대사분과)

지난 7월 5일 나는 춘천으로 한국역사연구회의 여름 수련회를 다녀왔다. 평소 춘천하면 닭갈비와 막국수, 소양강 처녀(?)만을 생각했기에 답사 장소로 춘천이 적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춘천은 의외로 볼거리가 많은 훌륭한 답사 코스였다. 일정은 7월 5일부터 6일까지 주말을 이용한 1박2일이었다. 날씨는 매우 더웠다. 참가인원은 가족동반을 포함하여 약 40여명이었다.

  수련회의 출발예정 시간은 9시였다. 난 집이 인천인 관계로 부지런히 일어나 출발예정시간을 약 20분 남긴 8시 40분쯤 합정역에 도착 하였다. 춘천가도를 따라 약 2시간 남짓 춘천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춘천에서 들른 첫 번째 답사지는 바로 신숭겸 묘역이었다.

1. 천하(天下)의 명당(明堂)  – 신숭겸 묘역

  신숭겸 묘역은 천하 4대 명당 중 하나로 완벽한 좌청룡 우백호와 배산임수를 한 금계포란(金鷄抱卵)의 형세이다. 1976년 6월 17일 강원도 기념물 제21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절공 신숭겸 묘역, 신숭겸장군 묘역이라고도 한다. 울창한 송림(松林)속에 있으며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제실등이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덤은 산자락에 있다. 하지만 신숭겸 묘는 그보다 좀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는 고려시대 묘의 특징으로 고려와 조선의 풍수상 해석의 차이라고 한다. 멋진 소나무들이 지키고 있는 신숭겸 묘를 향해 올라가니 무당선생님(?) 일행이 신내림을 받고 있었다. 왠지 신내림을 방해하는 것 같아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숭겸의 묘는 1기가 아니라 나란히 3기가 위치해 있었다. 신숭겸은 공산전투에서 태조왕건을 구하고 목이 잘려 죽었다고 한다. 이에 태조는 황금으로 그의 머리를 만들어 장사 지냈다고 한다. 따라서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묘(假墓) 2기를 조성한 것이다. 공산에서 전사하고 춘천으로 온 이유는 연고지가 춘천(광해주)이었기 때문이다.


<ⓒ남기현> 장군의 기(?)를 받는 무당선생님 일동, 나란히 3기가 있다. 저 중 한곳에 황금 머리가 매장 돼있을 것이다.

올라가서 보니 범인(凡人)인 나의 눈에도 무척 좋은 자리로 보였다. 물론 명당이라고 하니 명당처럼 보이는 것이었겠지만 앞이 확 트이고 멀리 춘천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것이 범상치 않은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서준석> 묘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 넓은 지역을 좌청룡과 우백호가 감싸고 있고 좌청룡을 넘어 장군봉과 봉의산(한림대가 위치함)이 연이어 있다. 우백호의 끝자락이 기봉하여 문필봉을 만들어 수구를 막고 있는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올라가 보니 중세분과 선생님들이 이 묘의 조성시기와 진위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계셨다. 2가지 설이 대립되고 있었는데 ‘조선후기 조성설’과 ‘고려전기 조성설’이었다. 조선후기설을 주장하시는 선생님들의 근거는 조선후기 고려시대 인물들의 무덤이 대거 조성되었고 그때 같이 조성됐을 가능성을 제기 하셨다. 신숭겸의 무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전기설을 주장하시는 선생님들은 고려시대 무덤이 조성된 이후 국가의 관리를 받은 것으로 보이고 조선시대에도 평산 신씨는 명문가문 이였으므로 고려이후(처음 조성 후) 계속 관리 되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만일 고려시대 조성이 확실하다면 왕이 아닌 일반인의 무덤 중 현재 확인된 최고(最古)의 무덤이 된다. 결론은 파봐서 황금마스크가 나오면 고려전기설이 맞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무당이 신내림하는 것으로 보아 장군의 기운이 있는 진짜 무덤이라는 소수의견도 있었다.

  신숭겸 묘를 내려오는 길에 방동리 고구려 고분을 살펴보게 되었다. 방동리 고분은 신숭겸의 무덤 남쪽(남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내부는 돌을 포개서 만든 돌방무덤이고, 외부의 봉토는 거의 유실되었다. 천장은 3∼4단의 벽을 쌓아 올리면서 모서리를 죽이고 하나의 큰 판돌을 올려 마무리한 모줄임식 천장이다. 방동리 고분은 고구려 무덤의 후기 양식이 지방화 된 형태로, 춘천 지방이 신라가 북상하기 이전인 6세기 중엽에는 고구려 영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2. 고인돌 가족 – 천전리 지석묘군

신숭겸 묘역을 떠나 다음으로 답사한곳은 천전리 지석묘군이었다. 천전리 고인돌은 멋진곳에 위치하지 않고 길가에 있는 밭 한가운데(방울토마토와 호박밭) 위치해 있었다. 큰길에서 밭을 향해 난 작은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니 4기의 고인돌이 일렬로 있었다. 서쪽부터 1, 2, 3, 4호 4기가 연달아 있었고 서쪽의 1호분이 가장 잘 보존 되어있었다.


<ⓒ심재우> 천전리 지석묘군①


<ⓒ홍순민> 천전리 지석묘군②

고인돌 답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다. 점심은 춘천의 명물 닭갈비와 막국수였다. 춘천에서 근무하시는 선생님들께서 춘천의 숨은 맛집을 소개 해주셨다. 닭갈비는 서울에서와 같이 둥근 철판에 볶아먹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막국수는 보통의 닭갈비집에서 처럼 쟁반에 여러 야채를 곁들여 비벼먹는 형식이 아니라 냉면형태로 나온 것이 인상적이었다. 식당은 강가에 위치해 있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간단히 강가를 산책하고 다음 답사지인 청평사를 향했다.

3. 볼거리, 먹거리의 청평사

점심을 먹고 가게 된 곳은 그 이름도 유명한 청평사였다. 청평사는 배를 타야만 갈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를 타고 가는 길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일반적인 방법인 배를 타지 않고 전형적인 강원도 산길을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올라가 청평사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청평사는 중창기에 의하면 973년(광종 24)에 세워진 백암선원을 1068년(문종 22) 이의(李顗)가 중건해 보현암이라 했으며, 1089년 이자현에 의해 절이 크게 중창되었고, 현재의 절 이름은 1550년 보우가 극락전과 그밖의 모든 요사채를 새로 지은 뒤에 고쳐 부른 것이라고 한다. 본당인 능인전은 1851년(철종 2)에 소실되었으며, 6ㆍ25전쟁 때 여러 당우가 소실되었다. 현존 당우로는 극락보전(極樂寶殿)ㆍ회전문(廻轉門:보물 제164호)ㆍ소승방 등이 남아 있다. 비록 6ㆍ25때 소실되기는 했지만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사찰이다.

  청평사 입구는 대표적인 관광지 답게 여러 막걸리집과 음식점이 많아서 별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원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니 더위가 절로 수그러 들었다. 청평사로 올라가는 길은 계곡을 끼고 있었는데 그 계곡에는 끝자락에 공주의 동상이 하나 나타났다. “평양공주와 상사뱀의 전설”의 주인공이다. 공주동상을 지나자 9성폭포가 나타났다.


<ⓒ서준석> 9성폭포는 공주와 상사뱀 이야기의 공주가 목욕을 한 곳이다. 9성은 九聲을 뜻한다. 마음이 맑은 이는 9가지의 폭포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구성폭포 상류 쪽에는 작은 연못이 있다. 이곳은 바로 영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정원의 흔적이다. 영지를 만든 이는 고려 때 학자인 이자현이다. 그는 973년 이곳에 창건했던 백암선원이 폐허가 된 자리에 아버지 이의가 세운 보현원을 문수원이라 고쳐 머물면서 이 산자락을 대규모 정원으로 꾸몄다. 규모는 구성폭포에서 오봉산 정상 부근의 식암까지 3km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일본 교토 사이호사의 고산수식 정원보다 200여 년 앞선 것이라 한다.(출처 – 주간한국 2007. 6. 5)

영지는 주변의 풍경을 축소한 것이라고 한다. 또 연못의 수면에 오봉산 정상이 비치게 되는 장관을 연출된다고 한다. 하지만 수초가 무성하여 오봉산이 비치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배수구가 인상적이었다.

  영지를 지나 올라가자 청평사가 나타났다. 청평사의 특이한 점은 일주문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찰의 앞마당에는 일주문을 대신한 두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다.

청평사 회전문을 처음 상상 했을 때는 백화점에 있는 회전문을 생각했다. 하지만 청평사 회전문에는 정작 문짝이 없었다. 알고 보니 청평사 회전문에서 회전의 의미는 회생하라는 의미였다. 다른 절에서는 이 위치에 회전문이 아닌 사천왕문이 있다고 한다. 회전문을 지나니 대웅전이 나타났다. 대웅전 뒤의 극락전에서 인도의 여러 신과 불교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심오하여 본 답사문에서는 생략하도록 하겠다.


<ⓒ남기현>회전문

하산하는 길에 막걸리와 감자전의 파티가 벌어졌다. 처음 청평사 입구에서 막걸리집을 봤을 때는 주변 경관을 해치는 흉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땀을 흘린 후 마시는 막걸리 한 사발은 달고 시원했다.

숙소는 춘천수렵장이었다. 방은 4인 1실을 사용했다. 김치찌개와 두부전골로 구성된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개인정비를 한 후 세미나가 이어졌다. 주제는 「한국역사연구회 2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각자 자기소개를 하고 발표자의 발표 후 진보사학계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뒤풀이 후 첫날의 일정이 종료되었다.

4. 유이무삼(有二無三) – 홍유릉

다음날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서울로 돌아오면서 마지막 답사지인 홍유릉을 향했다. 

  홍유릉은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는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순종비의 묘역이다. 명성황후는 1897년 청량리 홍릉에 묻혔다가 1919년 고종이 죽은 후에 이곳으로 천장하였다고 한다. 

  홍유릉에서 처음 우리를 반긴 것은 조금 쌩뚱 맞은 석수들이었다. 특히 낙타상이 참 낯설었다. 홍유릉은 명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떴다고 한다. 종래의 정자각을 대신하여 정면 5칸, 측면 4칸의 일자각(침전)을 세웠고 그 앞으로 양쪽에 문무인석과 홍살문까지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의 석수가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보통의 조선 왕릉은 제후형식의 정자각이 위치 하지만 홍유릉은 황제형식의 일자각(침전)이 있었다.


<ⓒ심재우> 홍릉의 일자각

  홍릉에서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시는 중세1분과 오영선 선생님의 설명이 있었다. 설명 중 일자각에 이르는 길에 대한 왕도와 신도의 논란이 있었는데 대세는 오영선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신도가 아닌 왕도였으나 확실한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유릉도 홍릉과 같은 구조로 되어있었다. 유릉의 경우는 봉분 앞에 작은 언덕이 조성 되었는데 아마도 풍수적으로 무슨 뜻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두 능은 일제시기 조성됐음에도 황제 양식을 하고 있다. 일본은 고종과 순종을 천황의 아래의 왕으로 인식하고 있었는데 황제양식의 능을 조성하도록 허락한 이유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었다. 민중의 힘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같은 무덤인 신숭겸묘역과의 비교하였을 때 신숭겸 묘역은 정성을 들여 관리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홍유릉은 화려하나 적막한 느낌이 들었다.

  홍유릉 답사를 끝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이렇게 1박 2일간의 수련회는 별다른 사고 없이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