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학술지 ‘역사와 현실’ 어느덧 100호(연합뉴스 16.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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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 국정화·재야사학 공세에 ‘내재적 발전론’ 한계 노출”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한국 역사학계의 진보적 담론을 이끌어온 학술지 ‘역사와 현실’이 통권 100호를 펴냈다.

한국역사연구회 학회지인 ‘역사와 현실’은 1989년 5월 첫 호를 발행했다. 처음에는 반년에 한 번씩 내다가 1994년 계간으로 전환해 100호까지 27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한국역사연구회는 광주민주화운동·6월항쟁을 경험한 젊은 역사학자들이 현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당시 학계 풍토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1988년 9월 창립한 학회다. 민중사학에 기반한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을 표방했다. 역사 교과서 논란이나 친일 진상규명 등 역사를 둘러싼 민감한 문제에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역사와 현실’ 역시 ‘시대가 역사학에 부여한 소임’을 실천한다는 목표를 적극 드러냈다. 이 때문에 기존 학계 일부로부터 ‘좌파 역사학’, ‘유물사학’이라는 이념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진단학보’와 ‘역사학보’, ‘한국사연구’ 등 이미 100호를 훌쩍 넘긴 역사 학술지가 더러 있다. 그러나 ‘역사와 현실’은 개별 논문을 투고받아 싣는 관행을 탈피해 연구자들이 기획단계부터 공동작업을 하거나 특정 주제의 기획 논문 여러 편을 한꺼번에 싣는 등 창간 초기부터 차별화됐다.

지금까지 기획 특집은 ‘식민지 조선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1994년), ‘해방 50년! 분단의 역사'(1995년), ‘조선 민족해방운동과 코민테른'(1999년), ‘박정희 시대의 우울한 유산'(2009년)처럼 현실의 이념·사회 갈등, 민중의 저항 등을 다룬 논쟁적이고 역동적인 주제가 많았다.

100호 특집 논문 4편의 주제는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역사학의 위기’다.

실제로 역사학계는 안팎으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외부에서는 정부가 ‘국가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워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진행 중이다. 여기에는 재야 역사학자들이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 일부 정치인이 가세하고 있다. 한국역사연구회 초대 회장인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는 100호 시론에서 “대한민국의 국사학자들은 90%가 좌파로 전환돼 있다”는 지난해 10월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을 단적인 사례로 들었다.

학계 내부에서는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1960년대 이후 거의 유일한 역사 인식의 틀이자 연구 방법론으로 삼아온 ‘내재적 발전론’의 한계가 지적됐다. 내재적 발전론은 조선 후기 한국 사회에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고 자생적 근대화가 가능했다고 본다.

그러나 역사의 ‘내재적’ 계기를 강조하다 보면 외적 충격과 영향, 문화교류를 소홀하게 취급할 수 있다. ‘발전론’ 역시 역사가 한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근대 서구식 역사관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한국사를 타율적·정체적으로 보는 식민사관을 뒤집어놓았을 뿐 기본 인식 틀은 같다는 한계를 지닌다. 문제는 내재적 발전론이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는 지적이 10여 년 전부터 제기됐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변화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

기획 논문들은 이런 두 가지 문제 의식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송호정 한국교원대 교수는 ‘최근 한국상고사 논쟁의 본질과 그 대응’에서 재야 역사학계와 일부 정치권의 ‘환상적’ 상고사 인식을 비판한다.

송 교수는 “유사 역사학자의 경우 민족주의라는 미명 하에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반민중적 역사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며 “우리 역사만이 웅대하다고 주장하고 주변 역사와 비교하거나 세계사 속에서 그 위치를 자리매김하지 못한다면 그 역사학은 존재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애국과 매국의 논리를 앞세워 기존 학계를 공격하는 유사 역사학자들의 주장은 맹목적 애국주의를 앞세우는 현 정부 집권세력의 논리와 일정 부분 연결돼 있다”며 “문헌 자료가 부족한 고대사를 권력의 의도에 부합하도록 강조할 경우 엄격한 사료 해석을 본령으로 하는 역사 연구의 퇴행을 불러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종석 동덕여대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을 중심으로 한 ‘열정의 시대’가 끝나자 역사학계에 위기가 찾아왔다고 본다. 그는 ‘내재적 발전론 이후에 대한 몇 가지 고민’에서 “애초 한국사학계를 향한 기대와 관심은 높은 학문적 경쟁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민족적 열등감을 떨쳐내고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이뤄졌다”며 “열망이 충족된 상황에서 관심이 식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사를 주체적·발전적으로 봐야 한다든지, 자주화와 민주화에 기여하기 위해 민중 주체의 과학적·실천적 역사학을 수립해야 한다는 태도·믿음은 현재적·목적적 성격이 농후하다”고 내재적 발전론의 한계를 지적했다.

이신철 성균관대 교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에서 보듯 근현대사 논쟁이 정치논리에서 함몰돼 정작 본질에는 다가가지 못했고 오히려 ‘퇴행적’이라고 지적했다. 역사가 정치도구로 전락해 학문적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논쟁의 본질을 확인하고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정치 공방을 극복하고 진영 논리에 갇혀버린 학술적 논의를 되살려 내는 일에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며 “우선 근현대 100년을 관통하는 거시적 안목과 사관을 재점검하는 일이 시급하다”고 했다.

dad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