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동북3성 답사기④] 압록강은 계곡 사이를 흐르는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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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동북3성 답사기 #4]


압록강은 계곡 사이를 흐르는 강

이승호(고대사분과)

 


[그림1] 6박 7일의 답사 일정과 답사 코스  원(○) 안의 번호는 답사 날짜 
ⓒ도판 베이스 : 구글 지도(
https://www.google.co.kr/maps)

답사 4일 차 : 집안시(③) → 백산시(④)

③→④ 경로 : 환도산성(丸都山城) → 산성하 고분군(山城下古墳群) → 우산하(禹山下) 3319호묘 → 우산(禹山) 자락 → 우산하 고분군(禹山下古墳群) → 장군총(將軍塚) → 모두루총(牟頭婁塚) → 장천(長川) 고분군(3ㆍ4호묘) → 삼도구진(三道溝鎭) → 백산시(白山市)


[사진1]  환도산성 표지석  ⓒ이승호

넷째 날 아침도 어김없이 숙취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침식사를 간단히 마치고 숙취에 찌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며 4일차 첫 코스인 환도산성(丸都山城)으로 향했다. 집안시 북쪽에 자리한 환도산성은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이라고도 불리며 평지성인 국내성(집안현성)과 함께 산성-평지성 체제를 이루고 있다.



[사진2] 
환도산성 1호문지(남문) 주변 남벽의 좌우 형세  ⓒ이승호

환도산성 답사는 산성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1호문지(남문)에서부터 시작된다. 성의 남벽은 상당히 잘 정비되어 있었는데, 이 또한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힘이라 생각된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최근 유적의 정비 과정에서 성의 진입로가 넓게 조성되면서 본래 성의 남문지가 훼손되어버렸다는 점이다. 복원보다는 정비에 힘을 쏟은 까닭인 듯하다. 성의 남벽은 사진에서 보듯 남문을 기준하여 좌우로 치가 구축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장방형의 옹성 구조를 갖추고 있다. 성의 입지 조건과 성 안으로 통하는 주 진입로의 형세로 보아 ‘천해의 요새’라는 말이 틀리지 않다.



[사진3]  환도산성 남벽의 배수시설(상)과 남벽에 올라 바라본 통구하(하)  ⓒ이승호

  남벽을 지나 성 안으로 진입하면 음마지(飮馬池)라 불리는 작은 저수시설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시 서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으면 곧 성 안팎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관망시설(석축 망루)을 답사할 수 있다. 현재는 망루의 석축 축대 일부만이 남아있지만, 본래는 이 견고한 석축 축대 위에 관망시설(전망대)이 조영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시에는 이곳이 성을 방어하는 일선 지휘소로 기능하였을 것이다. 이 관망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궁궐터가 나온다. (분명 궁궐터에서도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있는데, 도무지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사진4]  음마지(飮馬池)와 관망시설(석축 망루)  ⓒ이승호


환도산성 답사를 마친 후 산성 바로 아래 펼쳐진 산성하 고분군(山城下古墳群)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성 아래 펼쳐진 1,500여 기의 무덤떼는 자못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당시 산성의 성벽 위를 순시하던 수졸들은 성벽 아래에 펼쳐진 수많은 무덤들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들 또한 목숨 받쳐 이 성을 지킴으로써 이곳에 묻히기를 바랐을까.



[사진5]  산성에서 바라본 산성하 고분군(상)과 고분군 진입로(하)  ⓒ이승호


도성의 최후 방어선인 이 산성 아래 돌아간 조상들을 모셔둔 고구려인들은 무엇을 의도하였던 것일까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고구려를 지키다 돌아간 조상신들을 이곳에 모셔두어 영원토록 도성의 안전을 기원하고자 했던 것인가. 죽어서도 성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자리한 고구려인들이 그곳에 누워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무덤떼를 거닐다보니 문득 동천왕을 위해 사지(死地)로 뛰어들었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영웅들의 이야기’에 설렐 나이는 지났는데 말이다.


[사진6]  산성하 고분군 형제(兄弟) 무덤  ⓒ이승호

산성하 고분군 답사를 마친 우리는 고분군의 맞은편, 즉 통구하 건너편에 위치한 우산(禹山)에 오르기로 했다. 답사를 출발하기 전 현지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우산에 오르면 집안 시내 전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러나 어느 길로 어떻게 산에 올라야 하는지 구체적인 정보까지는 입수하지 못한 채 답사를 출발하였기에, 현지에서 구입한 지도만을 가지고 무작정 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우리의 교통수단이 택시라는 점이 장점으로 작용하였다. 현재 우산에는 우산산림공원(禹山森林公園)이 조성되어 있어 산 정상까지 좁게나마 도로가 나있었고, 3대의 택시는 나란히 그 길을 따라 수월히 산에 오를 수 있었다.



[사진7]  우산하 3319호묘(상)과 돌에 새겨진 인물상(人面石刻像)(하)  ⓒ이승호

산을 오르는 길에 우산하 3319호묘에 잠시 들르기로 하였다. 계단전실적석총이라는 특이한 양식으로 주목받아 온 이 무덤은 무덤방이 벽돌로 만들어졌고 그 안에서 중국계 유물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최근에는 중국계 망명인의 무덤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많다. 주로 최비(崔毖)나 전연(前燕)계 망명 관료들이 피장자로 거론되고 있는데, 발굴 이전에는 고국원왕이나 소수림왕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무덤의 뒤편에는 유명한 “돌에 새겨진 인물상(人面石刻像)”이 있다. 인물상은 마치 어린아이가 돌을 도화지 삼아 천진난만한 그림체로 하지만 나름의 심혈을 기울여 그려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얼굴이다.



[사진8]  우산에서 바라본 환도산성(상)과 산성 남쪽 시가지(하)  ⓒ이승호


우산하 3319호묘에 대한 답사를 간략히 마친 후 우리는 외길을 따라 계속 산에 올랐다. 점점 집안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설레는 마음을 다독이며 산길을 달리길 10여 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집안시내를 정면을 조망할 만한 위치까지 오르자 군 시설이 우리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곳은 군 시설이니 민간인의 접근을 금한다.”는 글귀를 보자마자 나는 덜컥 겁부터 났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산을 오르면서 집안시내 곳곳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는데, 왠지 그런 우리의 모습이 중국 군부나 공안에게 딱 오해를 사기 좋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고 문구를 보자마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차를 돌려 산을 내려왔다.

결국 우산 정상에 올라 집안 시내를 정면으로 조망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우산 서편에 자리한 환도산성과 그 앞을 흐르는 통구하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할 수 있었던 것은 나름 큰 수확이었다. 특히 환도산성의 입지 조건을 보다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는데, 집안 시가지 북쪽으로 통구하를 끼고 산속 깊숙이 숨어든 환도산성의 지형적 조건은 천혜의 요새라 평해도 좋을 만큼 탁월하다.


[사진9]  우산하 2110호묘  ⓒ이승호

 

  우산을 내려온 우리는 본격적으로 우산하 고분군에 대한 답사를 시작하였다. 먼저 찾은 곳은 우산하 2110호묘이다. 이 또한 왕릉급 무덤으로 무덤의 주인으로는 대무신왕, 고국천왕, 중천왕 등이 거론되고 있는데, 최근 들어 중천왕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무덤의 입지 조건 면에서 필자 또한 중천왕릉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사진10]  오회분 5호묘 표지석(상)과 묘실 입구(하)   ⓒ이승호

본격적으로 우산하 고분군 경내에 진입하여 오회분 4ㆍ5호묘에 대한 답사를 시작했다. 예전에는 오회분 4호묘도 개방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오회분 5호묘만이 개방된 상태이다. 무덤 입구에 들어서자 서늘하고 축축한 공기가 몸을 감싸 돌았다. 이후 묘도를 지나 무덤방에 들어서니 이번에는 사방에 그려진 벽화가 내 몸을 덮쳐왔다. 벽화가 전달하는 신비함과 모종의 압박감은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아마도 무덤 안에서 30여 분 이상의 시간을 보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동안 사진으로만 접하며 그저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여겨왔던 무덤 벽화의 장엄함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사진11]  오회분 5호묘 벽화  ⓒ이승호

  당시 오회분 5호묘 안에서 아무런 제제 없이 사진촬영이 가능했던 점은 아직도 의문이다. 물론 카메라 플래시는 엄격히 금하고 있었지만 사진촬영 자체는 허가를 해주었던 것이다. 덕분에 묘실 사방을 가득 채운 벽화를 여러 장 사진으로 담아 올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벽화를 실견했을 뿐만 아니라 몇 장의 의미 있는 사진까지 담아올 수 있었던 우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오회분 5호묘 답사를 마친 후 우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문이 굳게 닫힌 오회분 4호묘 앞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마친 뒤 우리는 오회분 3호묘, 우산하 2112호묘, 사신총 등 우산하 고분군 내의 여러 무덤 주변을 한가롭게 거닐며 장군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12]  오회분 4호묘(좌상), 오회분 3호묘(우상), 우산하 2112호묘(좌하), 사신총(우하)  ⓒ이승호

  날씨가 매우 좋았다. 정말 거짓말 한 마디 안 보태고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씨였다. 일행 중 누군가의 성대모사, “거 참, 장군총 보기 딱 좋은 날씨네”라는 유치한 우스갯소리마저 즐겁게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장군총. 화창한 하늘 아래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에 압도될 수밖에 없었던 순간. 규모도 규모지만, 특히 정연하게 쌓아 올린 계단의 균형미는 상당히 감동적이었다. 태초부터 본래 저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은 자연스러움, 그 거대한 인공 조형물이 푸른 하늘과 어우러져 그렇게나 조화롭게 보일 수가 없었다. 이건 반칙이잖아…



[사진13]  장군총 전경  ⓒ이승호

  현재 무덤은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조사 과정에서 일부 호석을 제거하게 되면서 상부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하부 층계에서부터 조금씩 무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걱정스러웠다. 무덤의 측면도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무덤의 뒤편은 이미 일부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1600여 년을 아무렇지 않게 버티어 온 이 무덤도 최근 세간의 관심 속에 몸살을 앓고 있다. 장군총의 주인은 잘 알려져 있듯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이 오랜 논쟁은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있는데, 장수왕설이 전통적 견해라면 광개토왕설은 초기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 의해 제기된 이후 근래에 들어 이를 지지하는 연구자가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진14]  장군총 측면(상)과 뒷면(하)  ⓒ이승호

그동안 필자 또한 고구려의 왕릉 축조가 ‘수릉제(壽陵制)’와 연관하여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하여 장군총을 광개토왕릉으로 비정함이 타당하지 않나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얘기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현장에서 느낀 일감만으로 장군총은 광개토왕의 무덤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싶어졌다. (이는 아무런 전문적인 식견이 들어가 있지 않은 무책임한 사견임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이 터무니없이 완벽한 사후처소의 주인정도는 되어야 국강상의 땅 위에 거대한 비석을 세우고 국내성 시대의 종막을 고한 왕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양으로의 천도가 광개토왕 시대부터 고려되어온 것이라는 근래의 논의를 경청하자면, 광개토왕은 영광스런 국내성의 시대(곧 거대 적석총의 시대)를 자신의 시대로 마무리 짓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장군총은 국내성 시대의 마지막 영광을 웅변하는 거대 적석총의 최 정점이며,「광개토왕릉비」는 곧 국내성 시대의 종막을 고하는 마침표라 하겠다.


[사진15]  장군총 배총  ⓒ이승호

장군총 뒤편에 위치한 배총을 둘러보는 것으로써 우리는 우산하 고분군에 대한 답사를 모두 마무리 지었다. 이제 내일 있을 백두산 등반을 위해 백산시로 이동해야 했다. 집안시와는 아쉬운 작별이다. 집안시에서 백산시로 이동하는 길은 잘 닦여 있는 고속도로를 달려 통화시를 거쳐 백산시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로이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 계획한 대로 압록강변의 지방도로를 달려 개마고원의 끝자락을 주파하는 길을 선택했다. 물론 우리의 교통수단이 택시인 점을 감안한 모험이었다. (나중에는 이 길을 선택한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찬양했는지 모른다) 즉 집안시에서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모두루총이 있는 하해방고분군과 장천고분군을 답사한 다음 그대로 압록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북상한 다음 삼도구진(三道溝鎭)에서 방향을 틀어 백산시로 곧장 북상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그림2] 4일 차 집안시에서 압록강변을 따라 백산시로 이동하는 코스  ⓒ도판 베이스 : 구글 지도(https://www.google.co.kr/maps)


  사실 답사를 떠나기 전부터 이 4일차 이동경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많았다. 답사 사전회의에서조차 이 경로는 너무 무모하고 위험부담이 크다고 하여 당장 결정하기 보다는 현지에 가서 다시 논의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물론 압록강 상류의 강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차를 달릴 수 있는 경험을 모두가 간절히 바랐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지도상에도 불명확한 지방도로를 달렸다가 개마고원 끝자락 어딘가에서 단체로 미아로 떠돌기는 싫었다. 결국 우리는 택시 기사님들과 오랜 논의 끝에 이 험난한 여정에 도전하기로 했다. 삼도구진(三道溝鎭)에서 북상하는 길만 잘 찾는다면 크게 문제될 것도 없다는 것이 기사님들의 의견이었다.


[사진16]  모두루총  ⓒ이승호


  그렇게 압록강변을 따라 차를 달리다 잠시 하해방고분군에서 차를 세웠다. 그 유명한 모두루총을 보기 위해서이다. 물론 무덤은 개방되어 있지 않았고 따라서 크게 우리의 눈길을 끄는 점도 없었다. 그러나 집안 일대의 수많은 무덤들 가운데 유일하게 그 주인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무덤이라는 점에서 답사할 이유는 충분했다. 한편 하해방고분군에는 모두루총을 비롯해 환문총 등 다수의 무덤이 분포하고 있으나, 시간 상 이를 모두 가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진17] 장천 3ㆍ4호묘 진입로 표지석(상)과 장천고분군에서 바라본 압록강(하)  ⓒ이승호

  하해방고분군에서 다시 압록강변을 따라 차로 달리길 1시간 남짓, 우리는 장천고분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장천고분군에는 백여 기의 무덤이 분포해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급한 대로 우선 보이는 장천 3ㆍ4호묘부터 답사를 시작했다. 표지석을 따라 산길을 오르길 5분 남짓, 장천 3호묘와 4호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무덤의 입지 조건이었다. 무덤은 산 중턱 넓은 대지 위에 자리하여 압록강변의 충적평야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묘주의 위상과 생전 활동 영역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도 묘주는 이 지역을 관할하는 지방관으로서 수도 국내성으로 통하는 압록강변 물길을 관리하는 요지에 자리한 지방 세력이었을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장천 일대에 자리 잡은 묘주 일족의 영화는 평양천도 이후로 점차 사그러들었을 터이지만, 5세기 중엽 무렵에 조영된 장천1호묘의 규모는 이들 일족이 천도 이후로도 얼마간 이 지역에서 위세를 떨쳤음을 말해준다.



[사진18] 장천 3호묘(상)와 4호묘(하)  ⓒ이승호
  하지만 정작 우리는 장천1호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압록강변의 경치를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그만 장천1호묘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시간상 차를 다시 돌리기도 어려워 우리는 그렇게 허무하게 장천고분군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에게는 달리는 일만 남았다. 시속 120km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지방도로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험한 산세가 펼쳐진 가운데 힘겹게 틈을 비집고 흐르는 강을 바라보았다. 나에게는 언제나 넘을 수 없는 거대한 경계로 인식되었던 그 강은 차분히 계곡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압록강은 그저 그렇게 계곡 사이를 흐르는 조용한 강이었다.


[사진19] 압록강을 벗어나 개마고원의 끝자락을 달리다  ⓒ이승호

  압록강변을 벗어나 삼도구진(三道溝鎭) 부근에서 차는 방향을 틀었고, 그대로 북상하여 백산시로 향했다. 거기서부터 나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경치에 경악해야만 했다.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마치 평창의 대관령을 수십 수백 자락 연이어 붙여 놓은 지역이라고 하면 비슷하게나마 설명이 될 것 같다. 차는 끝없이 오르막길을 올랐고, 또 끝없이 고위평탄면(정확한 표현일지 모르겠다)을 달렸으며, 또 끝없이 내리막길을 달렸다. 사람과 마을은 전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산림만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달리는 울퉁불퉁한 지방도로가 오히려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대략 4시간 동안 개마고원의 끝자락을 달리면서 든 생각은 이 일대는 절대 정주농경민의 활동 영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백산말갈 등 수렵민이나 산림세력의 활동 영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 고구려의 중심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접근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거대한 자연. 동천왕이 북옥저로 피난한 까닭이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일단 이곳 산림에 들어가면 못 찾는다.

백산시에 도착한 우리는 때늦은 저녁식사를 모처럼 ‘술자리 없이’ 마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당일 일정이 상당히 강행군이었던 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5일차 일정에 백두산 등반이 예정되어 있어 컨디션 조율 차원에서 우리는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누워서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그래도 5시간이나 잘 수 있으며 숙취 없는 아침을 맞이할 수 있으니 만족했다. 그런데 그 순간 딱 맥주 1캔만 하고 자자는 누군가의 속삭임이…

(5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