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의 사회사] 아름다운 자살은 없다 – 조선시대의 자살과 위핍치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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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살은 없다
– 조선시대의 자살과 위핍치사 (2)

 

심재우(중세사2분과)

 

1. 자살방조죄와 ‘위핍치사(威逼致死)’

  『자살의 연구 저자인 알프레드 알바레즈의 말을 빌자면 자살은 치명적으로 불발(不發)된 ‘구조의 외침’이라고 한다. 자살 행위 자체는 자살자 자신이 감행한 것이지만, 어찌 보면 자살은 철저히 자살자가 처한 사회적 문제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에서 동반자살 사건이 잇따르면서 경찰이 자살을 방조하는 인터넷 사이트 운영자나 정보 게시자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인터넷을 통한 자살방법 제공, 독극물 판매 등 적극적으로 자살을 부추기거나 방조하는 행위에 대해 엄정 수사하겠다는 것인데, 실제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자살카페를 개설해 운영하며 자살을 도운 혐의로 카페개설자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그림 1>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내부 모습 :  현재 국과수는 자살과 타살 여부, 사망 원인 등을 과학적으로 밝혀내 범죄수사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 이들에 대한 처벌의 근거는 무엇일까? 현행 형법 제252조 2항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자살을 교사하거나 자살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범죄는 자살교사·방조죄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남의 자살을 돕거나 유발한 자들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법 규정이지만, 실제로는 형량이 그리 높지 않을 뿐 아니라 법원 판례를 통해 볼 때 자살방조죄로 처벌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예컨대, 갑과 을 남성 두 명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한 여성이 이로 인한 수치심과 장래에 대한 절망감으로 집에 돌아와서 음독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법원은 그녀의 자살행위가 강간으로 인해 생긴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없으므로 강간과 피해자의 자살행위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갑과 을의 자살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처럼 실제 자살방조죄로 처벌하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다.


<그림 2> 반포대교와 잠수교 전경 : 서울 반포대교는 한 때 ‘자살대교’라고 불릴 만큼 투신 자살자가 빈발했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자살 사건이 발생할 경우 수사를 통해 자살을 강요한 자는 물론 자살의 원인을 제공한 자까지도 ‘위핍치사’의 죄목으로 엄중 처벌하였다. 조선에서 적용된 법전인 대명률(大明律)의 제19권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 조항에 그와 관련한 법규가 실려 있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위협과 핍박을 가해 다른 사람이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 위협을 가한 자를 붙잡아 장(杖) 일백 대를 치고 죽은 자의 장례비용 명목으로 은 10냥(兩)을 추징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특별히 강간·간통, 강도짓을 하다가 이를 빌미로 피해자가 자살한 경우 가해자에게는 참형(斬刑), 즉 사형에 처하도록 하는 조항도 있다. 강간을 당한 여성이 수치심에 자살한 경우, 혹 강도짓을 하는 와중에 재물 주인이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에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강간, 강도 행위자를 사형으로 처단하는 셈이다.

앞서 소개한 두 명의 치한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여성이 자살한 사건의 판결은 적어도 두 명의 치한을 여성의 죽음과 직접적으로 관련시키지는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본 사건이 조선시대에 일어났다면 이들 두 치한은 여성을 죽음으로 내몬 결정적 원인을 제공하였다 하여 ‘위핍치사’의 죄목으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 ‘위핍치사’ 죄목은 범죄의 원인을 결과만큼 중요시하고, 저지른 죄만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조선시대 응보적(應報的) 형벌 관념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인데, 실제로 조선시대 많은 여성 자살 사건에서 원인제공자에게 이 죄목을 적용하였다.


<그림 3> 수감된 죄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다 : 중국 복건(福建) 후관현(侯官縣) 감옥에 수감된 죄수가 밤에 칼로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 자살한 장면. 형장에서 참수당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이런 자살의 경우는 당연히 ‘위핍치사’에 해당하지 않는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광서 15년(1889) 10월 하순)

 

2. 강요된 자살, 위험에 처한 조선 여성들

위에서 나는 조선시대의 자살이 자살자 본인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자살원인 제공자에 대한 처벌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조선시대 자살 사건에서 관련자들을 위핍치사의 죄목으로 처벌한 사례를 우리는 국왕 정조의 사형죄수에 대한  판례집인 심리록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림 4> 풍류 호색한(好色漢)의 말로 : 중국 소주에서 발견된 사내의 시신(그림의 좌측 하단)을 검시하는 장면. 사망자는 진강(鎭江) 사람으로 어느 기생에게 푹 빠져 돈을 탕진하고 자살하였다고 한다. 짐작컨대 이런 자살에는 제대로 된 애도를 받았을 리 없다. (점석재화보 광서 10년(1884) 4월 중순)

  심리록에 실린 전체 1,112건의 사건 중에 모두 38건의 자살 사건이 실려 있음은 앞선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심리록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범한 자들의 사건 기록을 모은 것인데, 자살 사건의 경우 앞서 대명률의 규정에서 나오듯이 자살원인 제공자를 사형에까지 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도 국왕 정조의 심리를 거쳐 본 책에 기록되어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럼 38건 사건의 내용을 좀더 보충해서 설명하면, 남성 자살자가 7명인데 비해 무려 31명이 여성자살로 여성의 비율이 압도적이었다. 자살자 성별만 보아도 남성들에 비해 목숨을 버려야할 정도로 위태롭고 절박했던 여성들이 더 많았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자살의 원인도 남성과 달리 여성의 경우는 상당수가 간통, 강간, 추문 등 치정에 얽힌 자살이 주를 이루고 있다. 즉, 여성 자살 전체 31건 중 무려 22건이 강간을 당한 수치심으로, 혹은 간통에 대한 이웃의 조롱,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경우이다.

사실상 조선후기 여성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정절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를 요구받았는데,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심리록에 등장하는 일부 여성들은 강요된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다음에 인용한 국왕 정조의 언급은 당시 사회 분위기, 취약한 여성의 지위를 암시하고 있다.


대저 시골이란 양반과 상민을 구분할 것 없이 정숙한 여자가 포악한 자들에게 욕을 당하거나 나물을 캐다가 한번 끌려가기라도 하게 되면 갑자기 바람을 피운다고 손가락질을 받아 온갖 오명을 쓰게 된다. 그러면 강간을 당하고 안 당하고를 막론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모함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씻기 어려운 것이라서 방 안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기로 맹세하게 되니, 그 일은 어둠에 묻혀 밝혀지지 않고 그 심정은 잔인하고도 비장하다. 집으로 돌아와 식구들에게 호소해 봤자 더러는 눈물을 훔치며 방문을 나서고, 더러는 남 보듯 하면서 다른 데로 가 버리니, 적적한 빈 방에서 수치와 분노가 가슴속에 교차되어 구차하게 살아보려 하여도 참으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심리록 충주 박승문 옥사)


  위의 언급은 1785년 충청도 충주에서 박승문(朴升文)이란 자에게 몸을 빼앗긴 황여인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해 목매 자살한 사건 처리과정에서 내뱉은 정조의 한탄이다.


<그림 5> 삼강행실도 : 조선시대에 충·효·열의 대표적인 윤리교과서 역할을 한 책. 책에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열녀의 사례도 실려 있다.

  정절관념이 얼마나 조선 여성들의 의식을 옥죄고 있었는지 사례 두 가지를 통해 좀더 알아보기로 한다. 먼저, 1787년 경기도 여주의 천민(賤民) 김씨의 딸 판련(判連) 자살이다. 이 사건은 이웃의 강취문(姜就文)이란 자가 판련을 짝사랑하고 그녀와의 결혼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판련과 자신이 이미 몸을 섞은 사이라는 헛소문을 주위에 퍼뜨렸고, 이같은 모함을 들은 판련이 간수를 마시고 자살한 내용이다.간통의 추문만으로 택한 극단적 선택, 자살! 이 사건은 이제 정절이 양반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덕목이 아니라, 시골의 천한 여성인 판련에게까지도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규범으로 깊이 각인된 저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다음의 1794년 전라도 전주의 정여인 자살 사례는 더 극단적이다. 이 사건은 청상과부 정여인이 다른 남성과 정(情)을 통하여 가문을 더럽혔다는 이유로 친족들로부터 자살을 강요받아 죽은 사건이다. 구체적인 사건 정황은 분명히 알 수 없지만 말이 자살이지 사실상 살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과부가 개가(改嫁)하려는 것이 무슨 큰 죄가 될까만은, 당내 친족들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즉, 정여인의 당숙 정대붕(鄭大鵬)은 정여인이 비상을 마시도록 위협했으며, 숙모 이여인은 독약과 술을 준비하고 사전에 계획을 모의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정여인이 독을 마시고숨이 끊어지기도 전에 그녀를 땅에 매장해버렸다고 하니, 이쯤되면 가문을 지키기 위해 과부의 정절 윤리는 더 이상 훼손할 수 없는 지고지선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요컨대,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은 목숨을 내던져서까지 지켜야할 중대한 가치였다. 아니 정확히는 사회와 국가로부터 그렇게 강요받았음을 앞서 제시한 사건들은 증명해주고 있다.


<그림 6> 왕열부전(汪烈婦傳) : 중국에서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정절이 강조되고 있었다. 그림은 왕씨(汪氏) 집안에 시집온 열부 릉씨(凌氏)와 홍씨(洪氏) 이야기. 릉씨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으며, 릉씨의 아들은 홍씨(洪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태평천국의 난이 발생하자 릉씨가 태평군에게 귀순하지 않고 욕을 하고, 홍씨와 그녀의 어린 딸은 모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물에 뛰어들어 자살하는 장면이다. (점석재화보 광서 15년(1889) 11월 하순)

 

3. “아름다운 자살은 없다”

굳이 헌법 10조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오늘날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가치가 있는 존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오늘날 자살자들이 만연하는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더구나 과거 조선시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생명들에게서 인간의 무한한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림 7> 조선일보 1926년 8월 13일자에 실린 윤심덕의 마지막 사진 :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윤심덕(왼쪽)과 동생 윤성덕 자매. 일제시대에도 유명인들의 자살은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곤 했다. (경성, 사진에 박히다 산책자, 180쪽)

  이런 진지한 물음 이전에 위에서 살핀 여성 자살사건의 처리과정부터 좀더 알아보자. 먼저 자살의 원인을 제공한 자들을 어떻게 처벌했을까? 앞서 자신과 몸을 섞었다는 거짓 추문을 퍼뜨려 피해자 판련을 자살케 한 강취문에 내린 정조의 판결이 재미있다. 당시 강취문이 사실을 날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끝까지 자백하지 않자, 정조는 그를 죽은 여성 판련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에 끌고가 엄히 꾸짖은 후 본 고을의 노비안(奴婢案)에 넣어서 사역할 것을 명령한다.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잘못밖에 없지만 이에 대한 죄값은 평생 노비로 살아야하는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으니, 어찌보면 강취문 입장에서는 이같은 형량을 납득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위핍치사에 해당하는 자들에게 강취문의 예처럼 무거운 형벌이 가해진 것은 이뿐 만이 아니다. 오촌 조카딸인 정여인이 간통을 하여 가문을 더럽혔다고 당내(堂內) 친족들과 함께 그녀가 자살하도록 협박한 전주의 정대붕은 가혹한 고문을 견디지 못해 물고(物故)되었으며, 억지로 몸을 빼앗긴 황여인 죽음의 원인을 제공한 박승문도 사형 다음으로 무거운 형벌인 정배형(定配刑)에 처해졌다. 정조가 당시 살인 옥사의 피의자에 대해 관대하게 처벌한 것에 비하면 여성의 정절에 얽힌 자살 사건 관련자들은 훨씬 엄하게 처리하였던 셈이다.

다음으로 자살한 여성에 대해 국가는 어떻게 기억하고자 했는가. 조선후기 여성 자살자 상당수는 정절이라는 성리학적 윤리를 목숨을 걸고 실천했다는 점이 평가되면서 나라에서는 죽은 여성들에 대한 표창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앞서 소개한 황여인, 판련 모두 해당 고을에 정려각이 세워지고 그녀의 가족들에게는 복호(復戶), 즉 각종 세금 면제 혜택이 주어졌다. 비단 이들 뿐만 아니라 심리록에 등장하는 많은 자살 여성에게 사후에 이같은 조치가 취해졌다. 우리가 지금도 지방에 답사하다보면 가끔씩 눈에 띠는 열녀(烈女) 정려각 상당수가 바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림 8> 요씨 부인전 : 열녀 요씨 부인에 관한 그림으로 과장된 내용이다. 그녀는 각혈을 앓는 남편을 위해 꿈에서 신선이 한 말에 따라 자기 심장의 피로 약을 지어 먹였으나 차도가 없자, 남편보다 앞서 단식하여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점석재화보 광서 11년(1885) 5월 상순)

  한편, 이 무렵 중국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하였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교민(敎民) 항목에 실린 청나라 관청 예부((禮部)의 업무 지침 중에는 열녀 표창 기준이 나온다. 그 기준에 따르면 강간을 따르지 않으려고 자결한 부녀자, 남자의 희롱으로 인해 부끄럽고 분해서 목숨을 버린 여성, 남편이 죽은 뒤에 새로 시집가지 않은 과부 등은 모두 해당 지방관리인 독무(督撫)가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도록 하고 있다. 조선에서의 열녀 표창과 너무나도 흡사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처럼 자살원인을 제공한 자를 엄히 처벌하고, 자살자를 기리는 비각을 조성한다고 해서 죽은 자에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인데….

이제 오늘날로 돌아와 보자. 흥미롭게도 영국의 경우 자살행위가 사회적으로 끼치는 악영향을 고려해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이 1870년까지, 심지어 자살미수자 처벌 법이 1961년까지도 존속하였다고 한다. 과연 이런 법안이 당시 영국에서 자살 억제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자살이 만연한다는 것은 분명 우리 사회가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림 9>경성자살클럽』: 일제시대 여러 건의 충격적인 자살 사건을 다룬 전봉관 교수의 책. 2008년 발행

  최근 나는 일제시대 자살 사건을 생생하게 분석한 카이스트(KAIST) 전봉관 교수의 경성자살클럽(살림, 2008)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말미에 적힌 전 교수의 글 중에 가슴에 와 닿은 구절이 있는데, 지금 이 시간에도 삶이 팍팍하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다.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프고 애절한 사정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자살을 단행하는 순간 공감은 사라지고 책망만 남는다. 사정이 아무리 절박해도 자살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다. 죽을 용기가 있다면 살아서도 시련을 헤쳐 나갈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절대 자살해선 안 된다. (전봉관, 경성자살클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