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인물과 사건] 1607년 일본과의 국교 재개와 통신사의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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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7년 일본과의 국교 재개와
통신사의 파견

신병주(중세사 2분과)

1. 일본으로 건너 간 사명대사

스승인 서산대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널리 기억되고 있는 사명대사 유정, 그러나 그는 그저 불경을 익히고 전시에 군사를 일으킨 승병장 만이 아니었다. 전란 후 엉켜있던 조선과 일본의 외교관계의 실마리를 풀어나간 뛰어난 외교전략가였다. 전쟁이 끝난 후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맡겨졌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이어지는 7년간의 기나긴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끊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대신하여 들어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 정권은 조선과의 국교 재개를 간청해 왔다. 조선은 막부의 사정도 알아보고 왜란 때 끌려 간 포로들을 송환시키기 위해 사명대사 유정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7천 여명을 돌려 받았다. 그 후 1607년(선조 40) 국교를 재개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전쟁의 상처가 컸지만 일본과 계속적인 적대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조선 정부에도 큰 부담이 되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조선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계산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599년 7월, 조선 조정에는 대마도주의 편지가 날라 왔다. 편지에는 일본군이 철수를 하였는데도 조선의 사신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고, 포로 몇 명을 보내줄 테니 앞으로 우호관계를 맺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해 2월 대마도에서는 다시 사신을 파견했으나, 조선 조정에서는 또 한번 이를 무시했다. 그러자 대마도 쪽에서는 태도를 바꾸어 협박 섞인 편지를 보냈다. “해마다 사신을 보내 편지를 올리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번 사신을 보내니 이번엔 꼭 답장을 주시오. 이제 평화냐 전쟁이냐는 조선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에서는 직접 사람을 보내 일본의 사정을 알아보기로 결정했다. 이때 뽑힌 사람이 바로 승병을 이끌던 사명대사였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와 네 차례나 강화회담을 벌였던 경험이 있었던 인물로서 뛰어난 외교적 감각을 가진 승려였다.

사명대사는 1604년 7월 1일 대마도주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가지고 서울을 떠났다. 편지에는 만일 일본이 조선을 다시 침입한다면 명나라와 힘을 모아 일본을 다스릴 것이며, 일본이 성의를 보이면 관대하게 처분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대마도에 간 사명대사는 이듬해 1605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다.

  조선과 일본간의 화해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다는 도쿠가와의 뜻을 전해 받은 사명대사는 마침내 조선을 떠나온 지 10개월만에 조선인 백성 3천명을 이끌고 돌아왔다. 이후로도 일본은 계속 통신사 파병을 요청했고, 1606년에는 대마도에 끌려갔던 1,390명의 조선인 백성들이 돌아왔다. 사명대사는 승려로서만이 아니라 외교관으로서도 그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던 것이다.


(그림 1) 사명대사 유정 초상 (경남 밀양군 표충사 소장)

2. 일본 최대의 축제, 조선 통신사 행렬

일본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조선 조정은 일본에 왕릉(성종의 릉) 도굴범을 체포해 보내고,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을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달아 통신사의 파견을 결정하였다.

당시 조선 또한 사회경제적으로 전쟁의 후유증을 수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므로 일본이 조선의 조건에만 응낙한다면 일본과 국교를 재개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조선 내부에서는 다시 왜적이 쳐들어온다 해도 이들을 막아낼 군사와 무기가 충분하지 않았다. 드디어 조선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 만인 1607년에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조정은 통신사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외교사절단을 보냈다. 즉 전쟁의 책임자인 일본측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전쟁 중에 끌려간 우리의 포로를 데리고 오기 위한 사절단이라는 의미였다. 그후 1636년부터 통신사라는 호칭을 쓰게 된다.

조선은 정3품 이상의 당상관급의 대신을 정사(正使)로 삼아 통신사를 구성했다. 통신사의 정사는 일본에 가서는 수상과 동격의 대우를 받았다. 정사와 부사, 서장관 3인이 통신사의 주축이었고, 이외에도 통역을 하는 상판사, 학사로 외교문서를 초안하는 제술관이 수행원으로 참여했다. 그밖에 의원과 서기, 사자관(寫字官), 화원 등이 주요 구성원들이었다. 화원들은 통신사 일행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면서 오늘날 사진기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통신사들은 대부분 일본과의 학술문화 교류에 대비해 각 분야의 1인자들만을 골라 뽑았는데, 그 수가 대략 4백에서 5백 여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통신사 일행은 부산에서 대마도를 거쳐 오사카까지 약 40일간을 배를 타고 갔다. 여기에서 일본측이 마련해준 일본 국왕이 탄다는 호화로운 배, 천어좌선으로 갈아타고 교토와 모리야마 등을 거쳐 당시의 수도인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갔다. 그렇게 해서 같은 길로 다시 돌아오는 데 대략 5개월에서 8개월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따라서 통신사로 파견될 것이 결정되면 가족들은 먼 여정을 걱정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에 이르러 통신사 일행은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일본측의 호위하는 군사가 8백여 명, 연도의 가마꾼과 인부들 2천 6백여 명에 말 8백여 마리 등, 일본에서의 통신사 행렬은 수천 명의 사람과 말이 있는 대장관을 이루면서 일본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네덜란드인 니콜라스 쿠케밧길은 “행렬이 지나가는 데에만 다섯 시간이 걸렸는데, 마치 왕자의 행렬 같았다.”고 하여 당시 통신사의 규모가  화려하고 장엄했음을 묘사하였다.

  이렇게 일본 전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든 비용은 한 주(州)의 1년 예산과 비슷한 은 1백만 냥 정도였다. 통신사는 국왕의 외교문서인 서계(書啓)를 휴대하고, 인삼, 호피, 모시, 삼베, 은장도, 청심원 등을 예물로 가지고 갔다.

통신사가 방문하면 일본은 최대의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통신사가 도착하면 일본 최고의 화가들이 그 행렬을 그림으로 그렸고, 그것은 일반 사람들에게까지 비싼 값에 팔렸다. 통신사의 모습을 담은 그림을 갖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으로 삼았다. 통신사가 머무는 곳에는 통신사의 수행원들이 쓴 글 한 수, 그림 한 점을 얻기 위한 지식인과 일반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심지어는 심부름하는 어린아이의 글까지도 소중하게 받아갔다. 국왕 앞에서 곡예를 연출하는 마상재(馬上才)도 인기를 끌었고, 통신사의 행렬이나 곡예를 자개로 새긴 도장까지 유행하였다. 조선의 통신사는 일본에 선진문화를 전수했던 문화사절단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통신사가 한번 다녀오면 일본 내에 조선 붐이 불고, 일본의 유행이 바뀔 정도로 일본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통신사 일행들은 겨울연가, 대장금 등 최근에 불고 있는 한류 열기의 원조라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림 2)
 조선통신사 행렬도 부분

 3. 조선통신사의 기록들

조선통신사는 1607년부터 순조 때인 1811년까지 모두 열두 번이나 일본을 방문했다. 대개 일본의 막부 정권이 바뀔 때 그 권위를 국제적으로 보장받기 위하여 일본은 조선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통신사로 다녀 온 조선의 사신들은 일본 견문록을 기록으로 남겼다.

  김세렴의『해사록(海槎錄)』, 조명채의 『봉사일본시견문록(奉使日本時聞見錄)』, 남용익의 『부상록(扶桑錄)』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로서, 이들 작품을 통하여 시기적으로 일본의 정치, 문화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은 무려 60여 차례에 걸쳐 차왜(差倭:일본 사신)를 보내면서 조선과의 평화적 외교관계를 원했다. 마지막 통신사까지 일본의 정성스러운 대접은 계속됐지만, 조선과 일본간의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통신사의 일본 사행은 끝이 났다.

  조선은 통신사라는 외교사절단을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이웃나라인 일본과 250년 간이나 긴 평화시대를 지속했지만, 문호개방과 근대화에 눈을 뜬 일본이 침략의 마각을 드러내면서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라는 숙명적인 역사를 다시금 겪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