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움직인 사건과 인물] 선조의 즉위, 독배인가 축복인가?

0
559

선조의 즉위, 독배인가 축복인가?

신병주(중세사 2분과)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극단적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급급했던 군주, 전쟁 영웅 성웅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고 이순신을 죽음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기도 했던 비겁한 군주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가하면, ‘목릉성세(穆陵盛世: 선조가 이끈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라는 표현에서 대표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완전히 상반된 평가도 있다.

  이황, 이이, 이준경, 유성룡, 정철, 이항복, 신흠, 이수광, 김육과 같이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군웅할거 하듯이 배출된 시대가 선조 때라는 점을 고려하면 선조 시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에도 일부 수긍이 간다.

  사림정치의 전성기를 연출할 만큼 탁월한 인재 등용책이 엿보이는가 하면, 전쟁에서 보여준 믿음직하지 못한 군주. 거기에다가 1575년 동서분당으로 전개된 당쟁의 시작, 1589년의 기축옥사와 같은 대형 정치참극의 방관자. 선조에 대한 평가에서는 여전히 할 말이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선조는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를 가름하는 분기점인 7년 전쟁 임진왜란을 겪은 왕이다. 임진왜란의 극복 과정에 대한 평가 역시 선조의 평가와 긴밀히 맞물려 있다.

  1. 적장자 생산 콤플렉스

  선조는 극적인 상황 속에서 즉위한 왕이다. 선조 이전까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같은 숱한 정변이 있었지만, 어찌 되었든 왕실의 적통에서 왕위가 계승되었다. 그런데 이 관례를 깨고 적통이 아닌 방계(傍系) 계통에서 왕위에 오른 최초의 왕이 선조이다. 극적인 정치적 상황에서 왕위에 오른 선조의 즉위는 조선사회의 불행의 씨앗이었는가? 번영의 첫 단추였는가?

  16세기를 거치면서 조선 왕들이 아들을 생산하는 능력은 선대에 비해 현저히 떨어졌다. 정비나 계비 소생인 경우에도, 태조가 8남, 태종이 4남, 세종이 8남을 둔 것에서 보이듯 15세기 왕들은 상당수의 왕자를 생산하였다. 이것이 한편으로는 몇 차례의 정변으로 나타나기도 했지만, 왕위 계승은 왕실의 적통에 있는 왕자로 계속 이어지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연산군을 거쳐 중종 이후 불안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왕실에서 적장자가 생산되는 상황이 현저히 줄어드는 것이다. 중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 명종은 왕비(장경왕후, 문정왕후)의 외아들인 케이스였다.

  왕실에 자손이 번창 하지 못한 것 또한 후계 구도에 상당한 변수를 주었다. 외아들인 적자가 요절했는데, 그 자식이 없으면 적통의 왕위계승자가 사라져 버리는 것이고 이 경우 왕통을 누구로 잇게 하느냐는 문제가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명종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13세로 요절한 후 이것은 바로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왕실의 적통에서 후계자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한 것이다.

  차선책으로 후궁 소생의 왕자들이 후보감으로 떠올랐다. 어차피 후궁 출신에서는 서열 보다는 왕실과의 호흡이나 왕자로서의 자질이 중시되는 법. 하성군으로 있던 선조 역시 명종의 후계자 중 떠오르는 후보감이었다.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은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으로, 정인지의 손자인 정세호의 딸과 혼인하여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의 3남을 두었다.

  창빈 안씨가 최고의 실세인 문정왕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은 정식 왕통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녀의 후손이 차기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가 문정왕후와 대립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들인 복성군과 함께 죽임을 당한 것을 고려하면, 중종의 후궁 중에서도 문정왕후와의 관계가 원만하고 비교적 자기 색깔이 없는 인물이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고, 결국 하성군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2. 하성군, 선조로 즉위하다

  서열상 명종의 뒤를 이을 왕위는 중종의 손자 그룹에서 배출될 수밖에 없었고, 그 후보군 중에서 창빈 안씨의 아들인 덕흥군의 아들들이 후보군으로 떠올랐다. 이제 고만고만한 왕자라면 능력 평가를 하는 법. 아마도 하성군(이균)은 왕자 시절 또래 후보군 중에서는 돋보이는 인품과 학식을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실록의 기사에서 하성군은 딱 한 번 등장하는데, 명종이 왕자들의 교육 강화를 위해 왕자사부(師傅)를 뽑아 가르치자는 대목이다.

  전교하였다. “종친이 거개가 무식하여 중죄를 범하기까지 하니,【대개 이수환(李壽環) 부자 및 이수하(李壽賀)를 가리킨 것이다】 내 깊이 통탄하는 바이다. 전번에 왕손(王孫)의 사부(師傅)를 선출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가 전례가 없는 것 같아서 해로움이 있을까 싶었기 때문에 곧 취소하였었는데,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왕손은 외손과 다르므로 학문과 예의의 방도를 별도로 가르치는 것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러니 사부가 될 만한 자를 십분 가려 뽑아서 풍산 도정 이종린(豊山都正李宗麟)·하원군 이정(河原君李○)ㆍ전(前) 하릉군 이인(河陵君李○)ㆍ하성군 이균(河城君李鈞)을 가르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명종실록』 명종 21년(1566년) 8월 26일)

  위의 기록에 나오는 하원군, 하릉군, 하성군은 모두 덕흥군의 아들들로서, 왕의 종친 중에서 사부의 특별 학습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예비후계자로서 특별 관리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인물 후보군에 덕흥군의 3형제가 포함되었다는 것은 후계자가 대체적으로 압축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연려실기술』에는 여러 자료를 인용하여 하성군의 총명함을 전해주는 일화들을 일부 수록하고 있다.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명종이 익선관(왕이 평시에 착용하는 관)을 쓰리고 하자 하성군이 나이가 제일 어렸는데도,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쓰는 것입니까?’라고 말하여 명종이 기특하다고 여긴 것, 왕손들에게 시를 짓게 하자 ‘충성과 효도는 본래 둘이 아니다.’라고 써서 명종의 사랑을 받은 것, 한윤명, 정지연 등 스승들이 하성군의 학문을 칭찬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기록들은 왕자 후보군 중에서 왜 하성군이 선택되었는가를 입증하는 사례들로 볼 수 있다.      


사진 1) 선조의 글씨 (규장각 소장)

  3. 행운의 선택인가? 불행의 씨앗인가?

1567년 7월 마침내 명종의 뒤를 이어 16세의 나이로 선조가 즉위하였다. 선조의 즉위는 조선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열리는 시대로 평가를 받고 있다. 1545년 을사사화와 이로 인해 파생된 20년간의 외척 정치의 문제점이 쏙쏙 드러나면서 참신한 정치세력에 대한 기대가 컸던 시기에 선조는 조선의 14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조선의 왕 중 최초로 왕실의 적통이 아닌 후궁 출신의 왕계라는 부담감 또한 선조로 하여금 새로운 정치세력과 함께 정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했다.

  선조가 즉위 직후 사림의 중심인물인 이황과 조식을 불러 정국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한 것은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새로운 정치, 사상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사림과 함께하는 사림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이끈 선조 시대. 조선을 대표하는 지성들이 각 지역에서 다양하게 배출되었다.

  성리학 이념의 보급과 실천을 모토로 내세웠던 이들의 활약으로 조선사회에서는 학문이 진흥되고, 서원의 건립, 소학의 보급, 향약의 실시와 같은 사림정치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실천되기도 하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후대에 ‘목릉성세’라는 평가에 걸맞게 학문과 문화가 꽃을 피우는 기반을 제공하였다.

  효종 때의 영의정 이경여는 선조 시대 인재의 적극적인 등용책을 두고, ‘이황, 조식, 성혼, 이항, 민순 등과 같이 뛰어난 학자를 발굴하여 조정의 풍채(風采)가 갖추어지고 태평의 시대를 열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조 시대를 기점으로 제기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사림 세력간에 정계, 사상계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지열한 정쟁이 시작되는가 하면, 성리학은 지나치게 이론, 철학 중심으로 흘러가면서 대내외적으로 야기되는 모순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성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 왕통에 대한 약점을 사림의 지지에 기대어 보고자 했던 선조의 보신주의 등이 얽히면서 선조는 즉위 직후 동서분당이라는 당쟁의 출발점을 제공하고, 급기야 기축옥사라는 엄청난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고편을 거쳐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 까지 당하는 국왕이 선조였다.

  왕실의 방계라는 핸디캡 속에서 조선의 제 14대 왕으로 즉위한 선조. 그의 즉위 기간은 조선사회가 전기와 후기로 구분되는 전환의 시기이기도 했다. 선조의 즉위는 조선사회에서 행운을 가져오게 하는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무너져가는 왕조의 잘못된 출발이었는가? 이것은 선조 이후 전개되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진 2) 선조의 무덤인 목릉의 전경. 목릉은 현재 동구릉 경역 내에 조성되어 있다. 건원릉 좌측 두 번째 언덕이며, 첫 부인인 의인왕후의 능은 건원릉 좌측 세 번째 언덕, 계비 인목욍후의 능은 좌측 다섯 번 째 언덕에 조성되었다. 두 명의 왕비와 한 경역 내에 왕릉이 조성되었지만 무덤의 번지수가 서로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