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뒷담화] 북한의 친일파, 인민군이 된 소년비행병(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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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친일파, 인민군이 된 소년비행병(Ⅰ)

김선호(현대사분과)

   한국만큼 ‘역사’적인 나라도 없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지 7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까지 ‘친일’ 문제는 정치 현안이다. 올해도 일제 강점기가 오히려 근대화의 터전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교과서 문제로 정치권과 역사학계가 온통 전쟁 중이다. 유명가수는『워싱턴포스트』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전면 광고를, 그것도 자비로 싣는다. 학술ㆍ문화계의 원로를 기념하는 동상을 하나 건립할 때마다 친일논란은 빠지지 않는다. 그리고 동작동 국립묘지에는 독립운동가와 친일파가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수능시험에서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은 점점 줄어드는데 참 희한한 현상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한국에서 친일 청산을 주장하면 ‘종북’이라는 딱지가 붙는다는 사실이다. 친일과 종북. 이 주장에는 사실 하나의 전제가 깔려있다. 북한이 비교적 친일파 청산에 철저했다는 점이다. 그러니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면 북한에 동조한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최근 필자는 인터넷에서 친일문제에 대한 흥미로운 주장을 발견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 보면, 남북한의 초대정권에서 친일파였던 사람들을 추적한 한 장의 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표는 ‘등산회 인터넷 카페’에도 있고, ‘맛집 블로그’에도 있고, 쇼핑몰게시판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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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대한민국 및 북한 초대정권 구성 비교  문화일보, 2013년 8월 13일


<친일내각>

   바로 이 표다. 이 표는 ‘한 국책연구기관’과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위원장이 분석해 내놓은 연구결과라고 보도되었다(문화일보, 2013년 8월 13일). 이들은 표를 근거로 북한 초대내각과 군부 핵심간부가 이른바 ‘진성(眞性) 친일파’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이 옳다면, 해방직후 북한이 친일파 청산에 더 철저했다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는 다 잘못된 것이다. 과연 사실일까?

먼저, 북한 초대 정권 명단은 완전히 틀렸다. 이들 중 실제 초대정권에 입각한 사람은 부수상 홍명희뿐이다. 홍명희가 임전대책협의회와 관련 있는 것은 사실이다. 1941년 8월 25일 부민관에서 열린 결성식에는 총 120명의 조선인사가 참석했는데, 여기에 홍명희의 이름이 있다. 그러나 홍명희의 이름은 이날 이후 임전대책협의회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임전대책협의회에서 간부를 맡거나 주도적으로 활동한 이는 김동환, 최린, 윤치호, 최린, 신흥우, 최남선, 이광수, 장덕수, 주요한, 박흥식, 방응모, 장면, 모윤숙 등이다. 두 달 후인 1941년 10월 22일, 친일단체였던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이 합병해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한다. 이 친일단체의 창설멤버와 친일강연회의 주요 연사는 최린(단장), 윤치호(고문), 장덕수, 신흥우, 박흥식, 방응모, 김성수, 장면, 김활란, 모윤숙, 박순천 등이었다. 그러나 홍명희는 없다. 이들 중 누가 친일파인가?

   이들이 만든 초대정권명단은 왜곡과 오류투성이다. 초대정권과 관련 없는 사람을 마음대로 짜깁기 했을 뿐만 아니라, 짜깁기한 인물조차 틀렸다.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사법부장은 장헌근이 아니라 최용달이며, 민족보위성 부상은 김정제가 아니라 김일이다. 이들이 김일성 그룹의 김일과 소련출신 김일을 구분할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다. 표에서 김달삼은 정권인사라면서 심지어 직책도 없다. ‘조선노동당 제주 4ㆍ3 사건 주동자(일본군 소위)’라고만 적혀있다. 제주 4ㆍ3 사건 때는 조선노동당이 창당되지도 않았다. 김달삼이 일본군 소위라서 친일파라는 얘기인데, 그는 도쿄 중앙대학을 다니다 학병에 징집되어 후에 소위로 임관했다. 그렇다면 학병출신은 다 친일파인가? 학병 가운데 장교가 된 사람이 친일파라면 사병과 하사관이 된 사람은 친일파인가 아닌가? 하물며 표에서 문화선전성 부부장이라는 정국은은 전쟁 전까지 남한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북조선노동당의 성시백선에 포섭되었으나, 입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953년 8월 자유당의 현역 국회의원인 양우정 의원이 체포되면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정국은 간첩사건’의 바로 그 정국은이다. 이 표는 오류일까 조작일까?

   이 표에서 대표적인 친일파로 들고 있는 군대간부는 공교롭게도(?) 거의 다 공군이다. 저자들은 이활이 초대 공군사령관, 허민국이 9사단장, 강치우가 기술부사단장이라고 하는데, 다 틀렸다. 북한 항공부대의 초대 최고지휘관은 중국 항일연군 비행과장출신 왕련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북한 공군에는 강치우란 간부도, 기술부사단장이란 직책도 없다. 허민국은 9사단장이 아니라 항공부대 교도연대장이다. 이활과 허민국은 둘 다 민간학교인 나고야항공학교를 졸업한 인물이다. 이활의 졸업 후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일본 해군 촉탁비행사로 근무했다는 설과 신문사 항공기조종사로 근무했다는 설이다. 항공학교 졸업 후 허민국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은 이활과 허민국의 친일근거로 나고야항공학교 출신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여기서 잠깐. 일본 항공학교를 나온 사람은 다 친일파인가? 이활처럼 일본군에 근무했던 사람은 다 친일파인가?

   같은 논리를 국군에 대입해 보자. 초대 공군참모총장 김정렬은 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54기며, 참모부장은 박범집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52기다. 당연히 일본군 출신이다. 비행단장 이근석은 일본 소년비행병학교 2기며, 항공기지사령관 장덕창은 일본항공(민간항공사) 조종사출신이다. 여자항공대장 이정희는 초대 여류비행사 중 한명으로 일본비행학교 출신이다. 초대 공군지휘부 중 일본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작전국장 김신과 공군사관학교장 최용덕 정도다. 김신은 중국 공군사관학교 출신이고, 최용덕은 광복군 출신이다. 위와 같은 논리라면 일본군 출신은 차치하더라도 일본 민간항공학교를 졸업한 국군 장교들까지도 다 친일파란 말인가? 가히 대한민국 공군 창설자들을 모독하는 논리라 아니할 수 없다. 이들은 이처럼 왜곡과 오류투성이인 ‘주장’을 근거로 “일부 종북 세력들이 건국 과정에서 북한은 친일파를 청산했고, 대한민국은 제대로 하지 않아 민족정기가 훼손되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역사왜곡이 심각”하다고 주장한다. 난 이들이 왜곡하고 있는 북한 초대정권의 친일정도에 대해 ‘자료에 입각해’ 학문적으로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다.

<신의주항공대와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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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신의주 항공대 창설요원들과 김일성  ⓒ데일리NK, 2005년 12월 19일

   위 사진은 1945년 10월 25일 북한지역에서 최초로 결성된 민간항공단체인 신의주 항공대 창설요원들이다. 필자는 이 사진이 1945년 11월 27일에 신의주에서 촬영되었다고 본다. 11월 23일 신의주 학생 3,000여 명이 대규모 반소반공운동을 일으켰다.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은 해방 후 발생한 최초의 반소시위였기 때문에 소련군과 북조선공산당은 깜짝 놀랐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11월 27일 김일성이 직접 신의주로 간다. 이날 김일성은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책임자 처벌을 약속하고 사태를 마무리한다. 이 사진은 김일성이 사태 수습차 신의주에 갔다가 항공대에 들러 창설요원들과 기념촬영을 한 것 같다.

   앞줄 왼쪽이 신의주 항공대장 이활, 가운데가 김일성, 오른쪽이 왕련이다(최근 신문에서도 ‘왕영’이라고 쓰고 있는데 틀렸다). 사진을 보면 김일성은 양복차림이다. 해방 초기 김일성은 대중들이 있는 장소에 등장할 때는 종종 양복을 입고 다녔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역전에서 열린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군중대회’ 때가 대표적이다. 이때 김일성은 양복이 없어 강미하일 소좌의 양복을 빌려 입었고, 넥타이도 맬 줄 몰라 메끌레르 중좌가 대신 매주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창설요원의 출신을 구별할 수 있다. 이활과 뒷줄의 인물들은 모두 일본군 조종사복을 입고 있다. 반면에 왕련은 전혀 다른 복장이다. 중국 홍군의 공군 복장일 것이다. 뒷줄의 인물들은 창설요원이었던 임운봉, 김명하, 강대용, 이영일 등으로 추측된다. 창설요원들은 평양학원을 거쳐 북한 공군의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북한 최초의 항공대가 신의주에서 탄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해방 당시 신의주는 평북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다. 신의주 인근은 평야가 넓고 기름져 예전부터 부유한 자작농이 많았다. 그래서 일제 때부터 전국적으로 유학생이 많았고, 기독교 교세도 가장 왕성했다. 해방이 되자 중국 본토와 만주에 있던 조선인들이 조선의 북서쪽 관문인 신의주로 대거 유입되었다. 따라서 이활과 왕련도 신의주를 근거지로 항공인력을 모았던 것이다. 또한, 신의주는 평북에서 정치의 중심지였다. 평북의 기독교도들은 1945년 9월 18일 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신의주에서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결성한다.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당 조직을 위한 열성자 대회를 개최한 것이 10월 10일이었으니 얼마나 빨랐는지 알 수 있다. 기독교사회민주당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사회개량과 사회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지향했다. ‘사회 민주주의’라니. 지금이었으면, ‘종북’도 이런 ‘종북’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 사회민주당은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이후 해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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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일제강점기 신의주의 대표적인 개신교회였던 ‘신의주 제2교회’ 직원들의 기념사진   1941년에 촬영된 사진이다. 둘째 줄에서 남자만 봤을 때 오른쪽에서 두 번째 안경 쓴 이가 한경직 목사다. 해방직후 신의주의 개신교 신자들은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창당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으로 소련군과 충돌하면서 당은 곧 해체되었다. 이후 북한 지역에서는 개신교 신자가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반소ㆍ반공운동이 펼쳐진다. 두 세력의 충돌은 점차 격화되어 테러와 학살로 귀결된다. 개신교 세력은 ‘구월산 유격대’로 반공을 기억하고, 공산주의 세력은 ‘신천학살’로 개신교를 미제화(美帝化)했다. 황석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신교와 공산주의는 외부에서 온 ‘손님’이다. 두 손님은 현재도 한반도에서 절멸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한경직 홈페이지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은 1945년 11월 16일 평북 용암포에서 열린 ‘기독교 사회민주당’ 대회가 시발이다. 이날 대회 도중 용암포 대표가 공산당이 접수한 수산학교의 반환을 요구한다. 대회 이후 이를 지지하는 학생들과 공산당측 노동자들이 무력 충돌을 일으킨다. 이 소식이 신의주에 전해지자 11월 23일 신의주 학생 3,000여 명이 대규모 반소ㆍ반공운동을 일으켰다.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0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평북 임시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었던 함석헌도 체포된다. 사건이후 평북의 기독교도들은 점차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남한다. 윤하영 목사와 한경직 목사, 함석헌도 월남한다.

한경직 목사는 1945년 12월에 월남해 미군정으로부터 남산 밑에 있던 일본 천리교 신전을 불하받는다. 월남한 개신교 목사들은 다들 그렇게 불하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월남한 용천교회 신도 27명과 함께 이곳에 ‘베다니 전도교회’를 세운다. 오늘날의 영락교회다. 영락교회 등 월남민들이 세운 교회들은 하나같이 극단적 반공ㆍ반북주의를 표방하는데, 이것은 북한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해방 이후 북한의 민족주의세력은 소련군ㆍ공산주의세력과 충돌 이후 점차 월남한다. 그리고 남한의 공산주의세력도 미군ㆍ민족주의세력과 충돌 이후 점차 월북한다. 그 결과 북한의 ‘소비에트화’와 남한의 ‘반공화’는 한층 강화되었다. 분단의 내부적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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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국군 제20사단에서 열린 ‘진중세례식’에 참석한 한경직 목사(오른쪽에서 두 번째)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통과시킨 이후인 1972년 4월 25일에 개최되었다. 이날 20사단 사병 중 총 3,473명이 합동으로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이에 앞서 한경직 목사는 1950년 9월 이승만 대통령에게 군목제도를 건의했다. 국군이 낙동강전선까지 밀렸을 때다. 이후 미군이 군목제도를 지원하면서 군내 개신교 신자는 급속도로 팽창한다. 월남 교인들의 반북성향과 국군의 반공성향은 전쟁을 계기로 결합하면서 멸공주의로 발전한다. 이후 멸공주의는 군대와 교회를 중심으로 국가 전체로 확산된다. 이와 같은 교회와 군대의 결합은 ‘국가조찬기도회’라는 새로운 종교의식을 탄생시킨다.  ⓒ엔하위키 미러

   다시 신의주항공대로 돌아가보자. 신의주 항공대는 이활과 왕련의 주도로 창설되었다. 항공대는 일본비행학교 출신 20여 명, 중국비행학교 출신 10여 명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이활이 일본측, 왕련이 중국측의 대표자였다. 항공대 창설멤버 중에는 일본 소년비행병학교 출신이 가장 많았다. 소년비행병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신의주 항공대는 1946년 3월 17일 평양학원에 흡수된다. 즉, 신의주항공대 3기생은 평양학원 항공과 1기생이 된다. 평양학원으로 흡수된 이후에도 소년비행병 출신들은 배제되거나 숙청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평양학원에서 대부분 장교로 임명된다. 북한 지도부는 신의주 항공대 시절부터 일본군 출신에 대해 관용적 태도를 보인다. 김일성은 왜 일본군 출신들을 장교로 썼을까?

   북조선 공산당은 초기부터 신의주 항공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신의주 항공대 대원 전원을 공산당의 외곽조직인 민주청년동맹에 가입시켰다. 또한, 일본군 출신 조종사 40명을 당 차원에서 별도로 관리했다. 장차 공군을 창설할 때 교관으로 활용할 요량이었다. 김일성이 해방직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바로 군대 창설이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최측근인 김책, 강건, 김일 등을 지방에 파견해 군경력자를 추천하도록 했다. 그는 당권은 다른 세력과 공유했으나, 군권은 철저히 장악하고자 했다. 김일성은 해방직후 밀려드는 정치일정 속에서도 일찍부터 항공단체 창설에 관여했다. 1945년 12월 15일 북한에서는 ‘조선항공협회’가 결성되었는데, 김일성은 직접 협회 회장으로 취임한다. 북한 공군은 출발시점부터 육군과 다르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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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해방 후 남한에 남겨진 일본군 95식 중급연습기  미군이 접수해 국군에 넘겨준 것이다. 아래 날개 밑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다. 신의주 항공대는 소련군으로부터 이 95식 연습기 한 대를 넘겨받아 비행훈련을 실시했다. 1946년 평양학원 항공과가 창설된 이후에도 훈련 상황은 열악했다. 항공과는 겨우 95식 연습기 3대로 비행훈련을 실시했다. 99식 고등연습기라는 설도 있다. 1947년 봄에서야 겨우 독일제 쌍엽 비행기인 ‘융구망’ 몇 대를 구입해 훈련기를 충원했다. 당시 평양학원에서는 훈련기 연료로 소나무뿌리에서 짜낸 기름을 썼는데, 불완전 연소로 인해 비행 중에 엔진이 꺼져 불시착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고로 탑승했던 조종사가 사망했는데, 그는 평양학원 항공과 학생 오봉서였다. 그는 일본 소년비행병학교 15기 출신이다.  ⓒ네이버 블로그 – 산토끼

<공군수뇌부와 친일파>

   인민군 육군은 1945년 1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보안국 시절에 대대적으로 친일파ㆍ불순분자를 숙청했다. 전체 보안원 중 무려 41.5%인 3,500명을 숙청했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상황에서 완전히 작심하고 친일파를 몰아낸 것이다. 그런데, 공군에서는 전혀 다른 입장을 취했다. 앞의 표를 만든 저자들이 굳이 공군 출신들을 갖다 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먼저, 공군 수뇌부의 경력을 추적해 보자.

   흔히 ‘북한 공군의 초대 사령관’은 이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틀린 말이다. 한국전쟁 전까지 인민군에서 공군은 창설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령관이 있을 턱이 없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북한 공군의 정식 명칭은 ‘비행사단’이다. 인민군 총사령부 예하에 있었다. 비행사단은 3개 연대로 편제되었다. 추격기 연대, 습격기 연대, 교도 연대가 그것이다. 부대명칭이 특이한데, ‘추격기 연대’는 전투기연대, ‘습격기 연대’는 폭격기연대, ‘교도 연대’는 훈련 연대를 뜻한다. 모두 소련 공군에서 가져온 명칭이다. 인민군은 모든 부대의 교범을 소련군사교범을 가져다가 번역해 썼다. 국군도 마찬가지로 미군군사교범을 갖다가 번역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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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후 김포비행장에서 노획된 북한 일류신-10 습격기  하얀 원안에 붉은별 문양은 북한공군 마크이며, 55번은 비행기 번호다. 일류신-10기는 소련이 2차 대전 말기에 생산한 전폭기로 2인승이다. 개전 당시 인민군은 113대의 습격기, 84대의 추격기, 29대의 연습기를 가지고 있었다. 인민군 조종사들에게 소련어는 필수였다. 그래서 미군이 가져간 북한문서에는 조종사들이 소련어로 쓴 학습노트가 수두룩하다. 조종사 양성을 위해 북한에 있던 소련출신 고려인들도 대거 투입되었다. 비행사단 대대급 이상에는 별도의 번역원이 배치되었다. 이들은 소련 공군교범과 전투기 메뉴얼을 번역했으며, 교관으로도 활약한다.  ⓒ네이버 블로그 – 산토끼

   비행사단 사단장은 왕련이다. 그는 1912년생으로 함경북도 출신이다. 김일성과 동갑이다. 인터넷에는 왕련이 중국비행학교를 나왔다고 적혀있다. 틀렸다. 그는 소련항공학교 출신이다. 게다가 그는 소련 동방노력자공산대학도 졸업했다. 이 학교는 1921년 소련이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을 혁명가로 양성하기 위해 만든 교육기관이다. 이 학교 출신으로는 중국 개혁개방의 원로 등소평, 베트남 혁명의 아버지 호치민이 유명하다. 초대 농림부장관 조봉암, 남로당 당수 박헌영,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공산대학을 졸업했다. 왕련은 졸업 이후 중국 항일연군 비행과장을 역임했다. 해방 직전에는 연안에서 조선의용군과 함께 활동했다. 그는 해방 직후 입북한다. 1945년 10월 이활과 함께 신의주 항공대를 창설했고, 1946년 3월에는 평양학원 항공과장에 임명된다. 1949년 12월 항공사단이 창설되자 사단장에 임명된다. 당시 왕련은 38살로 북한 항공부대에서 최고 연장자였다.

   비행사단 부사단장은 잘 알려져 있는 이활이다. 그는 1918년 평안북도 염주군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집안이 상당히 잘 살았다.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지포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에서 평남 출신 이용주라는 인물을 사귀게 된다. 두 사람은 장차 항공기술인재가 되자고 결의한다. 다음해인 1939년에 이활은 항공조종시험에 합격한다. 그리고 전문학교 졸업 후 민간항공학교인 나고야 항공학교에 입학한다. 항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해군에서 촉탁비행사로 근무했다. 북한에서는 졸업 후 한 신문사에서 비행사로 일했다고 주장한다. 이활은 해방이 되자 바로 고향인 염주로 돌아온다. 그는 염주 근방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인 신의주로 향했다. 이활은 10월 25일 신의주에서 항공대를 조직해 항공대장을 맡는다. 1946년 신의주 항공대가 평양학원으로 흡수되자 항공과 부과장을 맡았다. 항공사단이 창설되면서 부사단장에 임명된다. 당시 32살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하나 있다. 신의주 항공대에서 이활은 대장, 왕련은 창설멤버였다. 그러나 평양학원에서는 왕련이 항공과장, 이활이 부과장에 임명된다. 비행사단에서도 마찬가지다. 북한지도부가 일본군 출신인 이활보다 중국공산당 출신인 왕련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명색이 항공대 최고지휘관인데, 외부에 내세우기에도 왕련이 걸맞았다.

   비행사단에는 문화부사단장이라는 직책이 있다. 지금도 북한뉴스를 보면 인민군 ‘총정치국장’이란 직책이 나오는데, 인민군에는 예전부터 정치 사업을 전담하는 부서가 따로 있다. 비행사단에서 정치 사업을 전담하는 게 문화부사단장의 임무였다. 문화부사단장은 유성걸이라는 사람이 맡았다. 그의 본명은 참 긴데, 유가이 니꼴라이 안드레예비치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그는 소련에 살던 고려인(까레이스키)이다. 까레이스키 중에서는 ‘가이(哥而)’라는 이름이 흔한데, 우리로 치면 ‘씨’처럼 의미 없는 말이다. 대표적으로 조선노동당 비서였던 ‘허가이’가 있다.

유성걸은 1920년 소련 연해주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942년 우즈베키스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어문학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1945년 10월 그는 소련군에 징집되어 북한으로 파견된다. 입북 직후에는 소련군 민정사령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다 1946년 5월부터 평양학원 러시아어교원 겸 부교장으로 근무한다. 당시 통역관으로 북한에 들어온 많은 고려인들이 유성걸처럼 북한정권 수립에 투입되었다. 소련군 정치부 통역이었던 기석복은 조선노동당 선전선동부장이 되었고, 인민군 포병 고문의 통역이었던 천이완은 포병사령부 참모장이 되었다. 유성걸은 1948년 항공대대에서 문화부대대장을 맡은 이래 비행사단 문화부사단장에 임명된다. 당시 30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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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한국전쟁 당시 북한 비행사단 문화부사단장이었던 유성걸  1960년 우즈베키스탄공산당 중앙당학교에 다니던 41살 때의 모습이다. 그는 골격이 매우 크고 풍채가 큰, 전형적인 무인형 인물이다. 소련에서 어문학 교사였던 유성걸은 인민군 공군 문화부사단장이 된다. 이처럼 소련출신 중 상당수는 본래 직업과 관련 없이 인민군 장교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휴전협정 당시 인민군 수석대표였던 남일도 우즈베키스탄 교사출신이다. 그는 입북 이후 교육성 부국장, 부상을 맡았다. 그러다 전쟁 직후 갑자기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된다. 전쟁 당시 북한에는 군간부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소련출신 장교들은 소련군사고문과 인민군 지휘부 간의 연결고리였으며, 인민군에 소련군의 군사체계를 도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이야기, 경인문화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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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천이완이 1947년 인민집단군총사령부 체육부장으로 재직시절 찍은 사진  왼쪽이 천이완 소좌, 오른쪽이 친형인 천율 대위다. 천이완은 1919년 소련 연해주 출신으로, 1942년 카자흐스탄 사범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1945년 10월 입북한다. 11월부터 소련군 민정사령부에서 근무했고, 1946년 5월부터는 포병총고문 통역원으로 근무했다. 1947년 3월부터 인민군으로 옮겨 총사령부 체육부장(소좌), 1948년 5월에 탱크사령부 통역원(중좌), 1949년부터 1952년까지 탱크사령부 참모장(대좌)을 맡았다. 천이완은 1952년부터 포병사령부 병기총국장(소장)으로 근무한다. 형 천율은 1949년 5월부터 민족보위성 문화훈련국 선전선동부장을 맡았고, 1954년 10월부터는 제7군단 군사위원(소장)으로 재직했다. 연해주에서 태어난 고려인 형제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교사로 일하다 모국에 돌아와 인민군 장성이 된다.  ⓒ장학봉 외, 북조선을 만든 고려인이야기, 경인문화사, 2006


비행사단 수뇌부를 보면, 왕련은 중국 홍군 출신, 이활은 일본군 출신, 유성걸은 소련군 출신이다. 수뇌부의 경력이 인민군의 다른 병종과 다르다. 총사령관 최용건, 문화훈련국장 김일, 총참모장 강건, 정치보위부장 석산은 동북항일연군 출신이고, 포병사령관 무정, 간부부장 이림, 전투훈련국장 김웅은 조선의용군 출신, 포병부사령관 김봉률, 작전과장 유성철, 2사단장 이청송은 소련군 출신이다. 인민군 총사령부와 육군수뇌부는 모두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 소련군 출신이다.

흔히들 인민군 초대사령관을 김일성으로 알고 있으나, 초대사령관은 최용건이다. 그는 1900년생으로 김일성보다 12살이나 많다. 평북 용천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함석헌과 오산학교 동기이며, 조만식의 애제자이기도 하다. 그는 김일성그룹 중에서 유일하게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교관을 지낸 인물이다. 만주에서는 김일성보다 계급이 높았다. 군의 핵심보직은 김일성그룹이 장악했다. 의용군출신은 경력에 따라 개인적으로 등용되었고, 소련출신은 주로 작전ㆍ정찰ㆍ통신ㆍ공병 병과에 임명되었다. 해군을 보면, 사령관 한일무, 참모장 김원무, 작전부장 김칠성은 모두 소련군 출신이다. 해군부대 대대장은 모두 조선의용군출신이었다. 결국, 인민군 중에서 일본군 출신이 수뇌부에 들어간 곳은 공군뿐이다. 그렇다면 비행사단의 연대장과 대대장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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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인민군 초대 포병사령관이었던 무정  그는 인민군 내에 있던 조선의용군계열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본명은 김무정이다. 1905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났으며, 중국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했다. 중국공산당의 25,000리 대장정에 참여한 원로당원이며, 팔로군 포병부대 초대사령관을 역임했다. 이 시절 무정은 주덕과 팽덕회의 신임을 얻었는데, 그의 부인은 팽덕회가 주선한 인물이었다. 1941년부터 조선의용군 사령관을 맡아 수차례의 대일전을 치뤘다. 해방 후 입북해 노동당 제2비서와 보안간부훈련대대부 포병사령관을 맡았다. 그의 포격실력을 본 소련고문들은 무정이 있었다면 스탈린그라드전투가 좀 더 빨리 끝났을 것이라며 경탄한다. 그러나 경력과 명성에 비해 인민군에서 직책은 높아지지 않았다. 이것은 김일성 그룹이 창군 초기부터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군내 주요보직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군내 조선의용군 출신들과 소련출신들은 결속력이 약했다. 그러나 의용군 계열은 중공군이 참전한 이후 급부상한다. 1950년 12월 중공군과 인민군은 중조연합사령부를 창설한다. 연합사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은 팽덕회, 부사령관은 등화(중공군)와 김웅(의용군 계열), 부정치위원은 박일우(의용군 계열)가 맡았다. 이때 인민군의 작전지휘권도 연합사로 넘겨진다. 이후 인민군을 지휘한 것은 연합사령관 팽덕회였고, 연합사의 명령은 박일우를 통해 인민군에 하달되었다.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이 작전 지휘권에서 배제된 굴욕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