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역사] 이채연, 회색분자인가? 한성 근대화의 주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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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보는 역사 시즌2 #1]

이채연, 회색분자인가? 한성 근대화의 주역인가?

장경호(근대사 분과)

한성판윤 이채연이 오후 4시에 방문했다. 그는 정치적인 성향을 제멋대로 바꾸는 자다. 그는 항상 서투른 일을 다룰 때에는(예를 들어서 대중 집회 등) 직무를 그만두었다가 다시 조용해질 때쯤에 자기 직무로 돌아간다.《윤치호일기》 1899년 1월 2일.


“매우 정력적이고 개명된 시장이었으며 그의 호의로 한성 서부 지역의 특징이 되고 있던 냄새나는 오물 더미가 제거되었다.”(이사벨라 비숍,『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


이채연이 윤치호로부터 회색분자로 몰린 반면에 외국인 이사벨라 비숍으로 부터는 “개명된 시장”으로 평가 받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그가 살았던 격동의 시대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채연은 1861년 경상북도 칠곡 출생으로 가문이 한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가문적 배경이 없던 그에게 있어서 제중원에서 일하게 된 것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제중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했던 경험은 그가 박정양과 함께 주한 미국공사관원으로 파견되어 미국으로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뒤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조정의 많은 요직을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채연은 양반으로서의 법도를 알고, 근대적인 감각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종은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특히 이채연은 1896년부터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한성근대화에 많은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그는 도시 개조 사업을 벌이기도 했고, 전차 부설 사업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가 하면 한성내 거주민들을 위한 위생사업, 교육사업 등의 복지사업들도 활발하게 벌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등의 여러 나라들과의 교섭이 많았던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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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대조선독립협회회보 (문화재 제512호, 서울대학교 소장)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그런데 그가 왜 윤치호로부터 이러한 평가를 받았을까? 이는 이채연이 1896년부터 1900년까지 5번이나 한성판윤을 맡으면서도 초기 독립협회 출범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가 한성판윤을 맡았던 시기에는 주로 독립협회가 활발히 활동했던 1896년 7월부터 1898년 12월까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한성판윤이 되는 것이 독립협회 활동과 배치되는 일일까?

   이채연은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 등의 집회가 열릴 때는 반복적으로 해임되거나 다시 복임되고 있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차 만민공동회가 일어나던 시기인 1898년에는 독립협회에서 반러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고종은 친러파 김홍륙을 당해 3월에 한성판윤으로 임명하여 그들을 통제하려 했다. 김홍륙은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었지만 재임시 탐욕스러운 월권행위로 한성판윤에서 쫓겨났다가 고종 독살 음모까지 꾸미고 실패하여 결국 사형을 당했다.

   이후 이채연이 다시 한성판윤으로 임명되었다. 그 역시 2차 만민공동회가 일어나던 시기인 1898년 4월부터 10월까지 한성판윤을 맡았지만, 3차 만민공동회가 일어나던 1898년 11월부터 12월까지는 그를 비롯한 여러 명의 인물들이 한성판윤에서 반복적으로 해임되었다. 관리의 법도를 알았던 그에게 있어서 반복되는 고종의 한성판윤 부임 명령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던 듯하다. 또한 초기 그가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독립협회인데도 불구하고 한성판윤으로서 독립협회에게 왕명을 지킬 것을 강조해야하는 고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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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서울 獨立門 (사적 제32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그는 1898년에 만민공동회와 고종 사이에서 중계자적인 입장을 담당하고 있었고, 필요할 때는 민중들을 억누르기도 하는 근왕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1898년 11월과 12월 사이에 많은 인물들이 한성판윤에서 해임되고도 결국에는 그가 한성판윤을 다시 맡은 사실을 볼 때 고종의 많은 신뢰를 받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사다난했던 이채연의 말로는 비참했다. 샌즈의 회고록에 의하면 이채연은 40살이 되던 해인 1900년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독살”을 당했다고 전한다. 게다가 이 격동기에 중책을 맡았던 인물은 다음과 같이 죽어서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사진3]  선교사 알렌(Allen)의 진단서 (등록문화재 제445호, 동은의학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濟衆院)의 책임을 맡았던 알렌이 발행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근대 서양식 진단서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이채연이 사망했다. 알렌(Allen) 박사와 이채연이 자신들과 왕실 사이의 유용한 노예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미국인 일당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이채연의 이른 죽음에 대해서 유감스러워하지 않는다. 이채연은 오랫동안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부패로 악명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알렌 박사는 이채연이 나쁘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중략) 만약 이채연이 천국에 있다면, 성 베드로는 금으로 포장된 도로를 방심하지 않고 경계해야만 할 것이다)《윤치호일기》1900년 12월 14일.

   이채연은 한성근대화의 주역이었을까? 아니면 윤치호의 말처럼 정치적 줏대 없이 배신하여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었을까? 이는 당시 격동기의 시대를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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