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역(牛疫), 청 제국과 함께 다시 태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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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중세2분과)

7. 우역(牛疫), 청 제국과 함께 다시 태어나다

 

15~19세기 한국인에게 소는 살아서 논밭을 갈아 백성을 먹여 살리고, 죽어서는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세종 4년(1422) 산릉을 주관하던 박자청은 “한 마리 소의 힘이 10여 명을 당할 수 있다.” 1) 라고 하였고, 왜란 중이던 선조 29년(1596) 검토관이었던 조정립(趙正立, 1560~1612)은 “한 마을에 소 한 마리만 있으면 한 마을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2) 라고 하였다. 그러기에 우역으로 인한 농우의 감소는 농민에게 고통을 안겼고, 때로 흉년에 이은 기근으로 이어졌다. 16세기 이후 주기적으로 만연한 우역(牛疫, rinderpest)은 소를 대량 폐사시켰고, 이는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다음 [그림 1]에서 ‘실록’과 ‘일기’에 나타난 우역(牛疫)에 대한 기록의 빈도를 보면, 16세기 초 처음 우역이 발생하였고, 17~18세기에 우역으로 인한 피해는 매우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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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조선시대 소의 전염병 [牛疫] 기록 추이(* 검색어 : 牛疫)

 

그렇다면 17~18세기에 폭발적으로 발생한 우역의 원인은 무엇이며, 피해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유럽과 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대륙의 소를 전멸 위기까지 몰고 갔던 우역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에서 발생한 것일까?

 

20세기의 과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역은 인간에게 홍역을 일으키고 개에게 바이러스성 디스템퍼를 일으키는 바이러스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파라믹소바이러스(모르빌리바이러스속)에 의해 일어난다. 3) 이러한 점에서 사육하는 소의 개체수가 급격히 늘어났고, 홍역이 만연하던 17세기 조선에서 우역이 만연한 것은 우연이 아닐 수 있다. 4) 그러나 우역이 17세기 조선에서 처음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우역은 4,000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 것으로, 소가 가축화하면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5) 우역은 소를 집단적으로 사육하는 지역에서 빈번히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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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우역으로 인한 소의 집단 폐사(위키백과)

 

소의 페스트[흑사병]로 불리는 우역 바이러스 역시 다른 모든 병원체와 마찬가지로 발생 초기의 맹독성은 숙주와의 조응을 통해 점차 약화되었다. 그 결과 16세기 무렵 우역은 20~30% 가량의 치사율을 보여 매우 치명적인 전염병이었지만, 소를 사육하는 인간 집단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었다.

 

그런데 17세기 초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을 공략하던 청의 진영[심양]에서 맹독성의 우역이 발생하였고, 이는 조선과 청의 교통로를 따라 사람과 가축의 이동 속도에 버금갈 정도로 빠르게 조선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조선에서 사육되던 소의 50% 가량, 감염된 소의 80~90% 가량이 죽었다.

 

곧바로 일본으로 전파된 우역은 서일본 지역에서 사육되던 소의 대부분을 몰살시키고, 해상교역로를 통해 동남아 지역으로 확산되면서 17세기 이후 세계사의 물꼬를 바꾸었다. 즉, 가장 늦게 우역이 전파된 유럽은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유럽에 앞서 우역으로 사회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인도와 중동, 아프리카 지역은 유럽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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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17세기 전반 새로운 우역의 발생과 확산 6)

 

16세기 중엽인 중종 36년(1541)에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은 국왕에게,

평안도 소들이 거의 대부분 병으로 죽었고 황해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 또 본도의 사람에게 들으니 ‘소의 병은 집집이 다 그러한 것이 아니고,
열 마리의 소를 키웠는데 모두 병들어 죽은 집도 있고
또는 한 마리도 병으로 죽지 않은 집도 있다.’고 합니다 7)

 

라고 보고하였다. 이듬해 2월 함경도의 덕원(德源)·함흥(咸興)·홍원(洪源) 등 3개 고을에서도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는데, 그 규모는 “소가 매우 많이 죽었다.” 8) 라고 하는 정도였다. 명종 12년(1557) 같은 도의 경흥(慶興)·경원(慶源)·온성(穩城)·종성(鍾城) 등 4개 고을에서 발생한 우역에서도 폐사의 규모는 ‘많이’라고 하는 정도였다. 9)

 

16세기 중엽 우역의 발생으로 많은 소가 죽어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하자 조선은 치료방을 발췌, 초록하여 간행하였다.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이 그것이었다. 상진(尙震, 1493~1564)의 연보에서는 이를 ‘우역방(牛疫方)’이라 하였다. 10) 따라서 같은 해 11월 승정원에서는 국왕에게 “소의 전염병[牛疫]은 치료할 방법이라도 있다.” 11) 라고 보고할 수 있었다.

 

광해군 10년(1618) 허균(許筠, 1569~1618)은 『한정록(閑情錄)』에서,

우역(牛疫)이 유행할 때 흔히 훈기로 서로 전염되어 그런 것이니,
다른 소가 있는 곳에 가는 것을 피하고 나쁜 기운을 제거하면서 약을 쓰면 혹 살릴 수도 있다.12)

 

라고 했다.

 

실제 인조 5년(1627) 발생한 우역에서 전생서의 제향용 소들도 감염되었다. 당시 전생서에는 황우 3마리와 흑우 5마리가 있었는데, 흑우 3마리가 감염되어 폐사한 것은 1마리로 폐사율은 13%에 지나지 않았다. 13)

 

그러나 병자호란을 전후(1636~1638)하여 청으로부터 새롭게 도래한 우역(牛疫)은 이전에 발생한 우역에 비해 치사율이 현저히 높아졌다. 다음 [그림 4]는 전생서에서 제향용으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소에서 발생한 우역으로 인한 폐사율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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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우역으로 인한 전생서의 제향용 소의 폐사율 변화 14)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새로운 변종 우역이 도래한 이후 소의 폐사율에 대한 표현은 이전과 확연히 구분된다. 김석주(金錫胄, 1634~1684)의 문집에서는,

 

관서와 송도에서 …… 지난 해 우역으로 10마리의 소 중 8~9마리가 죽었다. 15)

 와 같이 보다 구체적인 수치가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사율은 일본이나 동아프리카 등에서 나타난 폐사율 95%보다는 낮지만, 조선에서 발생한 이전의 우역과는 확연히 구분되었다. 새로운 우역 바이러스로 인한 폐사율의 급등은 병자호란을 전후하여 청의 심양에서 조선으로 전파된 것이 이전에 발생하던 우역 바이러스와 다른 유전적 특성을 가졌고, 독성이 강화된 결과였다.

갑작스런 폐사율의 급등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우역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결과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이후 발생한 우역에서 폐사율을 현저히 낮출 수 있었다. 16)

 

17세기 중엽에 발생한 우역에 대해서도 조선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그 까닭은 적절한 처방전을 찾아내고, 감염된 소로부터 감염되지 않은 소를 분리하여 관리하는 대책을 마련하여 신속히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각 고을에 파견된 의생들은 해당 고을에서 시행 가능한 여러 처방으로 우역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그 처방의 효과가 어떠했는지를 바로 중앙의 내의원에 보고하였다. 이를 통해 새로운 우역에 효험있는 처방을 확인한 내의원은 이를 모아 ‘득효방(得效方)’이라 이름을 붙이고, 이를 추가한 우역방을 간행하여 반사(頒賜)하였다.

 

그 결과 ‘득효방(得效方)’에 의해 살아난 소들은 우역 바이러스에 대해 항체를 가질 수 있었다. 이는 우역의 만연이 발생한 이후 소의 자연 수명에 의해 항체를 가진 소가 자연적으로 소멸할 수 있는 주기, 즉 평균 30년을 주기로 전국 곳곳에서 토착화한 우역이 발생하는 양상으로 바뀌게 만들었다.

 

감염된 거의 모든 소를 죽이는 우역의 만연은 농민들에게 큰 고통을 야기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모든 소의 도살을 금지하였고, 인조 16년(1638)에는 몽골에 사신을 보내 소 180여 마리를 들여와 평안도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주었다. 17) 그 결과 소의 개체수는 이전의 수준 이상으로 회복 되었다. 18)


 

1) 『世宗實錄』 卷16, 世宗 4年 7月 丁卯. “一牛力可當十餘人”
2) 『宣祖實錄』 卷73, 宣祖 29年 3月 丁亥. “一村有一牛 則一村之民 農功就緖”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인터넷판), 우역.
4) 17세기에 만주족에 의해 점령된 중원과 강남 일대에서 우역이 발생했다는 기록이나 보고를 찾을 수 없다.
5) C. A. Spinage, Cattle Plague : A History (New York:Kluwer Academic/Plenum Publishers, 2003); 山內一也, 『史上最大の傳染病牛疫 根絶までの4000年』, 岩波書店(東京), 2009; 야마노우치 카즈야(노정연·천명선 역), 『우역의 종식, 근대 전염병 연구의 역사』, 한국학술정보, 2016.
6) 김동진·유한상, 「병자호란 전후(1636~1638) 소의 역병(牛疫) 발생과 확산의 국제성」, 『의사학』 22-1, 2013, 64쪽에서 인용.
7) 『中宗實錄』 卷94, 中宗 36年 2月 戊午.
8) 『中宗實錄』 卷97, 中宗 37年 2月 庚午.
9) 『明宗實錄』 卷22, 明宗 12年 3月 戊寅.
10) 『泛虛亭集』 卷6, 年譜. “庚子 中宗三十五年 公四十八歲 …… 夏 課市民捕蠅 頒牛疫方 見平壤誌”
11) 『中宗實錄』 卷96, 中宗 36年 11月 甲申.
12) 『閑情錄』 卷16, 治農, 養牛.
13) 『承政院日記』 19冊, 仁祖 5年 10月 壬寅.
14) 김동진·유한상·이항, 「17세기 후반 우역의 주기적 유행이 기근·전염병·호환에 미친 영향」, 『의사학』 23-1, 2014, 8~9쪽.
15) 『息庵遺稿』 卷7 擣椒錄[下], 六疊跫字.
16) 우역에 대한 한국소의 내성은 총독부에서 우역 방제 사업을 담당하는 이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이에 일본 육종 담당자들은 한국의 소를 반입하여 개량한 후 ‘화우’라 이름 붙인 후 일본을 대표하는 소의 품종으로 내세웠다.
17) 『瀋陽狀啓』; 『仁祖實錄』 卷36, 仁祖 16年 6月 庚子.
김동진, 「병자호란 전후 우역 발생과 농우 재분배 정책」, 『역사와담론』 65, 2013, 288~300쪽.
인조실록에는 평안도에 분급한 것이 181마리라고 했고, 『瀋陽狀啓』에는 심양에서 보낸 것이 185마리라고 기록하였다. 4마리의 차이는 심양에서 조선으로 이송하던 중 죽었기 때문에 발생한 차이로 보인다.
18) 『白軒集』 卷17, 文稿, 仁祖烈文憲武明肅純孝大王行狀; 『寒沙集』 卷4 䟽箚, 應旨陳弊䟽 庚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