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시 낙랑군인가? – 식민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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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준ㆍ위가야ㆍ이정빈(고대사분과)

 

※ 이 글은 위가야, 2016 「‘한사군 한반도설’은 식민사학의 산물인가」 『역사비평』 114 ; 안정준, 2016 「오늘날의 낙랑군 연구」 『역사비평』 114 ; 이정빈, 2016 「한사군, 과연 난하 유역에 있었을까?」 『역사비평』 115를 요약ㆍ정리한 것이다. 이상의 원고는 경희대학교 한국고대사ㆍ고고학연구소(IKAA) 웹진(http://www.ikaa.or.kr)에도 게재되었다.

 

 

최근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한국의 역사학계가 식민주의 역사학을 추종하고 있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매국의 역사학’이란 비난도 있었다. 주된 비난의 대상은 고대사 분야이다. 이를 주도하는 이들 중 하나는 한국 역사학계의 다수를 ‘식민사학자’로 규정하였다. 심지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역사학계가 일본 극우 범죄조직의 자금을 받고 식민사관을 확산시키고 있다고 발언하였다.

비난의 주요 실례는 임나일본부설과 한사군의 위치비정이다. 둘 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타율성론과 관련된다. 그런데 적어도 이제 남선경영(南鮮經營)을 내용으로 한 임나일본부설을 그대로 따르는 연구자는 한국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학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한사군, 특히 낙랑군의 위치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 점은 일제시기 식민주의 역사학의 이해와 동일하다. 최근의 비난은 여기에 집중되고 있다.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대한 통설이 일제시기 식민주의 역사학자의 고안(考案), 즉 새로운 연구결과였는데, 지금 한국의 역사학계가 이를 맹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 안에서 찾은 시원은 삼국시기까지 올라간다. 일찍이 고구려인도 고조선의 도읍에 설치되었다는 낙랑군 조선현이 자신들의 수도 평양이었다고 하였다. 중국 고중세 여러 사서의 주석서 또한 마찬가지로 인식하였다. 이를 토대로 조선 전기 『세종실록』지리지와 『고려사』 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서 한사군이 한반도 안에 있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6세기 박상의 『동국사략』,  17세기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까지 이어졌다. 특히 한백겸은 본격적인 역사지리 연구를 통해 한사군의 위치를 비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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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 『해동역사續』1 「지리고」1 고금강역도(古今疆域圖) 중 사군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진번군을 제외한 나머지 3군을 모두 한반도 안에 위치시켰다.

물론 조선후기 모든 역사지리 연구가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으로 본 것은 아니었다. 요동설, 요서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던 것은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상을 명료하게 보여주는 문헌기록이 워낙 부족한 데다가 이를 결정할만한 고고자료의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낙랑군 연구의 진척을 가능하게 한 고고자료는 20세기 전반에 본격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는 일제시기 일본인 연구자가 주도하였다.

일제는 1910년대에 사회문화조사사업의 일환으로 총독부 주도의 조선고적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구려 유적으로 간주한 낙랑토성과 그 내부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수막새),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 등을 발견했다. 1914년에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가 발견되었고, 1916년 대동군 대동강면에 있던 한(漢)식 고분에서 각종 부장품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1920년대 중반에는 낙랑군의 중심지가 평양 일대였다는 것이 통설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낙랑군에 관한 고고자료의 발굴이 일제시기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해방 이후 북한으로 이어졌다. 일제시기 발굴한 낙랑지역 고분의 수가 70여 기에 불과한 반면,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굴한 낙랑고분의 수는 1990년대 중반까지 3,000여 기에 달한다. 현재 우리가 아는 낙랑군 관련 유적의 대다수는 해방 이후에 발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년 7월에 평양 정백동 364호분에서 나온 부장품인 「초원 4년 호구부」 목독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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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2]  「초원 4년 호구부」 목독

해방 이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한사군 연구의 수준을 높여 나갔다. 한사군의 사회구성과 성격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하였고, 그에 대한 고조선계 주민의 자율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초원 4년 호구부」 목독처럼 중요한 출토문자자료가 보고되면서 지금은 한층 수준 높은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근대의 식민지(colony) 개념을 고대사 연구에 투사하였다는 비판과 반성도 있었다. 이미 한사군의 존재를 통해 타율성론을 주장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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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3] 낙랑군 지배층의 구성

이상과 같이 한사군, 특히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 일대로 보는 통설은 고ㆍ중세의 문헌 연구와 아울러 근ㆍ현대 고고학적 발굴 성과 및 역사학 연구가 꾸준히 축적되면서 수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학계의 통설이 식민사관 사학을 추종한 것이라는 비난은 억측에 불과하다. 타율성론을 내세워 ‘식민사학자’의 허상(虛像)을 만들고, 그 허상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한국사를 고정불변의 인격으로 간주하고 역사 속의 영토를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고 있다. 태국의 역사학자 위니카출이 만들어낸 지리적 신체(geo-body)라는 용어가 그에 해당할 것이다. 이러한 정서는 현대 한국사의 무대인 한반도에 특히나 강하게 작용한다. 이 점에서 한사군은 우리의 신체 중 일부가 타인에 의해 범해진 것과 같은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 최근의 비난은 이러한 정서에 편승한 것이 아닐까.

북한의 역사학계의 고구려-수 전쟁 연구가 참고된다. 현재 북한학계에서는 이 전쟁이 한반도 밖에서 전개되었다고 본다. 유명한 살수대첩의 살수(薩水)도 한반도 북부의 청천강이 아닌 중국 요령성 소자하(蘇子河)에 위치하였다고 본다. “위대한 평양은 선사시대 이래 자랑찬 고구려의 멸망 이전까지 한 번도 이민족의 침략에 짓밟힌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순결성의 논리’에 의해 무리한 해석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북한 학계의 ‘순결성의 논리’는 ‘영토순결주의’라도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소재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하고자 한 사회 일각의 정서는 영토순결주의에 기초한다고 생각된다.

영토순결주의가 비단 몇몇 인사 내지 북한 역사학계의 감정적 문제만은 아니다. 근대 역사학, 이른바 국사의 민낯일 수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사를 민족사로, 민족을 인격처럼 서술해 온 한국 역사학계의 여러 연구에도 반성할 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그 반성은 곧 근대 역사학에 대한 성찰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비난과 그에 동조하는 사회 일각의 정서는 비합리적인 사료해석과 논증에 기초해 한국의 역사학계가 추구해 온 근대 역사학마저 뒤흔들고 있다.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 다시 말해 위대한 고대사를 말해야 비로소 식민주의 역사학에서 탈피한다는 강고한 믿음 때문이다. 식민주의 역사학을 넘어 근대 역사학에 대한 성찰에 이르기까지는 너무나 먼 길이 남은 것일까.

최근 사회 일각에서는 ‘위대한 고대사’를 애국으로 포장하기도 한다. 한국사의 고대국가, 특히 고조선이 넓은 국토를 지닌 군사적 강대국이었기를 욕망하며 이를 마치 현대의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비전처럼 제시한다. 그러나 고대사를 통해 군사적 강대국을 지향하는 사고야 말로, 지난날 제국주의 역사학의 본령이었다. 식민주의 역사학의 모태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최근 사회 일각의 애국적 고대사 서술은 식민주의의 ‘주술’이 아닐까 한다. 21세기의 우리 사회가 20세기 전반 식민주의 역사학의 주술에서조차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를 잉태한 괴물 즉 제국주의 역사학의 망령에 빙의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허상의 타율성론을 향한 공허한 비난에 굳이 응답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