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제시장’과 추억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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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과 추억의 정치

 

김선호(현대사분과)

 

1,000만 관객은 어느덧 한국영화 흥행의 기준이 되었다. 영화 ‘국제시장’은 누적관객수 1,400만명으로 이미 역대 영화 2위의 반열에 올랐다. 국제시장이 다루는 주제가 한국현대사임을 감안하면, 이같은 현상은 가히 놀랍다. 지금까지 현대사를 다룬 영화 중 최고의 흥행작은 관객수 1,100만명을 기록한 ‘실미도’였다. 그 흥행의 비결은 무엇일까?

 

국제시장은 한국판 ‘포레스트 검프’라 평할 수 있다. 포레스트 검프가 베트남전쟁, 히피문화, 반전운동, IT산업의 탄생 등 미국현대사를 관통하듯, 국제시장도 한국전쟁, 파독광부, 베트남전쟁, 이산가족 상봉 등 한국현대사를 관통한다. 가까운 과거는 경험자들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단연 최고의 이야기거리이며, 그 파급력도 크다. 국제시장은 그런 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이 글은 영화평론이 아니므로, 씬, 시퀀스, 미장센 등을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나리오는 역사와 맞닿아 있으므로 그 선택의 맥락을 짚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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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철수 (네이버 영화)

제작진이 영화의 첫장면으로 선택한 것은 흥남철수였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는 북한주민이었던 윤덕수의 가족이 남한에서 살게 된 출발점이었다. 1950년 10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수십만명의 북한주민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유엔군을 따라 남으로 내려왔다. 그 이유가 국군에 대한 협조 때문이었던, 원자폭탄 때문이었던, 월남민들이 북한체제를 버리고 남한체제를 선택한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전까지 포함하면 월남민은 100만명이 넘었다. ‘혁명’과 전쟁은 분단과 반공의 거대한 뿌리다. 흥남철수는 전쟁과 이산(離散)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선택이었다. 부산에 정착한 덕수가 국제시장에서 미군의 구두를 닦고 초콜릿을 얻어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미국의 대외원조로 생존하던 1950년대 한국경제의 상징적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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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영화 ‘국제시장’의 파독광부 (네이버 영화)

두 번째 장면은 ‘파독광부와 파독간호사’다. 이 사건은 파독광부 윤덕수와 파독간호사 오영자가 만나게 되는 계기로써 영화의 중심축이 된다. 덕수가 파독광부로 선발되기 위해 심사장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장면은 군사정부가 한 개인을 어떻게 ‘국민’으로 전환시켰는지 잘 보여준다. 영화는 독일에 도착한 광부들과 간호사들의 고된 노동현장을 간혹 보여주지만, 스토리의 중심은 로맨스다. 상업영화의 대중적 요소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1965~1975년까지 해외노동자와 해외동포가 고국에 보낸 송금액이 약 1조 909억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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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영화 ‘국제시장’의 월남전 (네이버 영화)

세 번째 장면은 ‘월남전’이다. 덕수와 달구는 돈을 벌기 위해 월남전에 노무자로 지원한다. 영화에 나오진 않지만, 당시 한국기업에는 이른바 ‘월남특수’가 있었다. 베트남에서 미군의 군수물자 운송권을 따내면 달러를 벌 수 있었다. 이 시기 월남특수에 힘입어 재벌로 성장한 기업이 바로 ‘한진그룹’이다. 1957년 당시 트럭 19대를 가지고 국내에서 운수업을 하던 한진상사는 월남전에서 미군의 군수물자 운송권을 따냈고, 그 결과 1960년에는 기업수입이 228만 달러에 달했다. 한진은 정부의 지원하에 1969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했고, 현재의 ‘대한항공’으로 급성장했다. 같은 시기, 현대와 삼성은 건설공사와 원조물자(설탕․밀가루)를 독점해 재벌로 성장했다.

 

한진이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을 때, 국군은 계속 월남전에 병력을 증파하고 있었다. 1969년부터 1974년까지 월남전에 참전한 장병은 325,517명이었고, 이중 전사자는 4,601명이었다. 휴전이래 최대규모의 전사자였다. 운좋게 살아남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는 1등 신랑감이었다. 파월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해외근무수당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약 2,800억원이었고, 이 자금 중 일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사업에 투입되었다. 파월장병들이 보낸 외화로 내수산업과 수출은 연일 호황이었다. 1964년 103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GNP는 1974년에 이르러 5배에 달하는 541달러로 급증했다.

 

덕수가 월남에서 달러를 벌고 있을 때, 국내에서는 한일협정이 체결되었다. 일본정부는 무상으로 3,600억원을 주었고, 유상․차관으로 3,600억원을 주었다. 이 돈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금이 아니라 독립축하금(경제협력자금)이었다. 무상자금은 제2차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공업자금으로 쓰였고, 유상자금은 포항제철, 소양강댐,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데 쓰였다. 이중 포항제철 설립에 투입된 한일청구권자금은 약 1,300억원이었다. 박정희정부시기 해외노동자․해외동포․파월장병들과 한입협정을 통해 유입된 달러는 약 2조원에 달한다. 1967~1971년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소요자금은 9,800억원이었다. 박정희시대의 경제발전은 누구 덕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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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영화 ‘국제시장’의 이산가족 (네이버 영화)

네번째 장면. 말년에 덕수는 한국전쟁때 헤어졌던 여동생을 만난다. 그 계기는 1983년 KBS가 진행한 이산가족 상봉이었다. 이 방송에 상봉을 신청한 사람은 100.952명이었고, 그중 10,180명이 가족을 만났다. 이들은 운좋은 사람들이었고, 나머지는 지금도 생이별중이다. 온 나라가 이산가족 상봉의 기대로 들떠있던 그해 5월 18일, 전 신민당 당수 김영삼이 전면적 민주화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김대중은 당시 망명중이었다. 그날은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이었다. 신군부는 광주를 피로 진압한 후, 1981년 정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이른바 ‘유화정책’을 표방하며, 야간통행금지 해제, 교복․두발자유화, 해외여행자유화를 단행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이 모든 권리들이 불과 35년 전에는 금지된 것이었다.

 

노인이 된 덕수는 마지막으로 삶을 회상한다. 한국전쟁, 피난생활, 파독광부, 베트남전쟁, 유신체제, 이산가족 상봉 등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그의 삶은 2016년 현재 70~80대의 삶을 대표한다. 그들은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체험했고,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그 질곡을 버텨냈다. 비를 가릴 집 한채 없던 그들의 삶에서 번듯하게 자란 자녀들과 본인소유의 주택은 고난을 이겨낸 삶의 보람이자 긍지이다. 그 결과, 과거는 흑백사진처럼 변색되었다. 사진을 찍던 당대의 고난은 사라지고, 현재의 성취가 과거에 오버랩되었다. 마치 성장이 독재를 대체한 것처럼. 지나간 과거는 사람에게 힘겨운 기억이지만 동시에 아련한 추억이다. 국제시장은 기억 대신 추억을 선택했다. 영화는 끝났고, 오늘도 누군가는 추억의 정치 속에서 ‘안전하게’ 삶을 영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