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흰 옷 과 상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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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옷 과 상투

하원호(근대사 1분과)

중국 고대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부여의 풍속을 전하면서. “옷은 흰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는다” 고 전하고, {수서}에도 “신라사람은 옷의 색깔로 흰 옷을 숭상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기록에도 흰 옷을 입는다는데는 변함이 없다. 요즘 TV나 영화에서 시대물을 다룬 장면을 찍을 때는 색깔있는 옷을 많이 등장시키지만, 관리가 아닌 일반 평민이 입는 옷은 어느 때나 대부분 흰색이었다. 고려시대에 흰 옷을 금지시킨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귀족계급 사이에 잠깐 효과를 봤을 뿐 평민들은 여전히 흰 옷을 고집했다. 상투의 기원에 대한 기록은 더 오래 된다. 고조선의 왕이던 위만은 왕권을 장악하기전 중국 동북지역에서 고조선으로 건너왔다. 그 때 이미 상투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위만은 중국인이 아니라 중국동북지역에 광범하게 흩어져 살고 있던 우리 민족의 한 무리라고 본다. 상투야 말로 우리 민족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장가든 남자임을 나타내는 상투는 싸움이 나면 수난을 당하는 신체의 가장 중요한 부속물 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고함을 질러대며 서로 으르다가 심해지면 멱살을 잡고, 볼장 다본 사이 같으면 상투까지 잡았다. 아이 낳는 부인이 그 고통을 남편과 나누기 위해 문창살 사이로 드리민 남편의 상투를 잡아당기는 습속은 가끔 TV 드라마에서도 볼 수 있다. 상투는 일명 ‘고작’이라고 했는데 자기를 버리고 가는 남자를 놓지 않으려고 싱갱이하는 여편네의 한숨섞인 노래에도 이 ‘고작’이 나온다. “에여라 놓아라/ 나는 못놓겠소/ 고작이 빠져도 난 못 놓소”

흰 옷을 입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전통이라 하더라도 흰 옷을 빨아야 하는 부인에게는 그리 아름다운 풍속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옷가지 중에서도 제일 아낙네들의 고민거리가 된 것은 버선이다. 다른 옷은 때를 타 봤자 빨면 새 옷같지만 짚신 발에 신는 버선이야 온동네 먼지를 다 뒤집어 쓰니 아무리 빨아도 새 것 같을 수는 없었고 때뺀다고 양잿물에 담고 방망이로 열심히 두드려야 겨우 흰 빛을 찾으니 버선이란 놈은 사흘들이 바꾸어야 헌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새로 지은 버선을 진솔 버선이라 했는데 한 번 신고 나면 그 이름을 들을 수 없는 이미 헌 게 되었던 것이다. 돈많은 양반이야 진솔 버선이 집 장농에 첩첩이 쌓여 있으니 걱정할 바 아니지만, 가난한 선비나 서민은 그럴 수가 없어 부인이 밤새워 해진 버선에 볼을 받았고 볼받는 솜씨가 부인네의 남편 받드는 평가기준이 되기도 했다.

상투를 자르고 흰 옷을 못입게 한 것은 백년전의 갑오, 을미개혁때다. 고종은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단발령과 함께 흰 옷을 금지하는 법령을 내렸다. 왕과 동궁이 먼저 머리를 깎고 나섰지만 몇천년을 내려온 풍속인 상투를 자르거나 흰 옷을 하루 아침에 벗을 리 만무했고, 그래서 장날의 장터 이쪽 저쪽을 가로막고 순검들이 장꾼들을 기다렸다가 가위로 상투를 자르고 흰 옷에 먹물을 뿌려댔다. 앞 길에는 가위 든 자가, 뒷골목에는 먹통을 든 자가 버티고 서서 장날을 초상날 처럼 만들었던 것이다.

충청도 보은 현감 이규백은 솔선수범해서 단발을 하라는 어명을 받았지만 머리를 깎자니 조상에게 죄인이 되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것같고 안깎으면 칙령을 어기는 것이라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민망한 꼴을 보던 부인 성씨(成氏)는 애통한 나머지 “대군주폐하께서 능히 두발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이면 나머지는 논할 것도 없으리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고 말았다.

개화란 게 사회적 관계나 생산력의 근대화여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국민적 동의를 얻어야 했지만 이같은 겉보기 개화는 오히려 반발만 샀다. 물론 이 억지 개화에는 일본의 입김이 뒤에 있었다. 흰색을 순결이나 신성의 상징으로 보는 것은 동서양이 다를 바 없고, 일본도 제례복나 상복에 흰색을 사용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반적으로는 이상색채라고 해서 ‘고약한 색’으로 본다는 일본 민속학자의 글도 있다. 물론 그들의 색채감각이 문제가 아니라 흰 옷으로 상징되는 우리 민족의 단일성을 흩어뜨리기 위해서 수천년된 습속인 상투와 흰 옷을 없애려고 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래서 최익현같은 이는 머리는 잘라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면서 단발령의 배후에 있던 일본에 대항해 의병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일제때는 흰 옷이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더욱 집착하게 되었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붉은 산]의 끄트머리에도 삵이라는 인물이 죽어가면서 “흰 옷과 붉은 산이 보고 싶다”는 대화가 나온다. 윤동주의 [슬픈 족속]이라는 시에도 흰 옷은 우리민족의 순결함과 고통의 상징이 된다.
“흰 수건이 검은 머리를 두르고
흰 고무신이 거친 발에 걸리우다

흰 저고리 치마가 슬픈 몸집을 가리고
흰 띠가 가는 허리를 질끈 동이다”

한편 일제때 흰 옷을 입지 말자고 선전을 해댄 쪽은 천도교 신파다. 3.1운동의 민족대표이기도 했던 최린은 1930년대 전후해서는 천도교 신파를 이끌고 친일행각의 앞장에 섰는데 총독부의 정책에 맞추어 색의단발(色衣斷髮)운동을 벌였다. 물론 이 시절에는 동아일보나 조선의 문맹퇴치, 생활개신운동, 그리고 기독교의 금주단연운동, 이승만이 배후에 있다던 수양동우회의 체육운동 등의 총독부의 정책과 한 치도 다를 바 없는 운동이 전개되어 당시 세계적 대공황으로 파멸 상태에 빠져 있던 대중의 생활을 단순한 생활태도의 개선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 중에서도 색의단발은 흰 옷과 상투로 대표되는 한국적 요소를 말살시킨다는 점에서 총독부의 입맛에는 딱 들어 맞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흰 옷을 입으려 했을까. 한 때 일본학자의 이야기로는 염색공업이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성과로는 염료의 생산방식은 나름대로 개발되고 있어 염색공업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양반은 이미 관복이 모두 색깔 있는 것이었고 조선말기로 가면 돈을 번 서민들도 비단옷을 걸치면서 색깔있는 옷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농민이야 출입하는 옷 단벌을 빼고 나면 일할 때 입는 건데 일부러 물을 들일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처럼 색에 대한 어휘가 풍부한 민족도 없다. 색에 대한 감각이 없어 그랬다는 일본학자의 지적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렵다. 지금이야 가끔 상투 올리고 갓 쓴 영감님을 보면 동네 꼬마들이 신기한 듯이 따라다니고, 하루만 입어도 매연이 앉아 회색옷이 되는 흰 옷을 입으라고 해도 입을 사람이 없는 세상이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전통이나 관습도 시대가 달라지면 이미 의미를 잃고 만다는 것을 사라지는 흰 옷과 상투가 가르쳐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