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한글날 유감(遺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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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유감(遺感)

하원호(근대사 1분과)

10월 9일 한글날은 휴일이 아니다. 6공 노태우정권은 등장과 함께 선심행정의 표본으로 설날연휴 등 일시 휴일을 늘였다가 전경련을 비롯한 사용자측의 반대여론에 밀려 휴일을 축소했고 그 바람에 멀쩡한 한글날까지 기념일로서의 휴일의 위치를 빼앗겼다. 누가 더 놀자고 한 것도 아니건만 놀자고 떠들어대다가 그래서 조금 기분이 좋아진 서민에게 너무 놀면 안되니까 다시 줄이자고 하던 노정권의 조령모개(朝令暮改)는 정권이 끝날 때까지 쉴 새없는 정책의 기본방향이었음은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이 지구상에 수많은 문자가 있고 각 나라의 국어로 선택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문자를 만든 날을 기념일로 삼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그나마 우리나라도 노정권의 기막힌 정책으로 ‘그냥 노는 날’ 정도로 치부되었고 국가적 공휴일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전세계 어느 나라도 한글날같은 기념일이 없는 것은 그날이 기념일로서의 의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기념할 날을 모르기 때문이다. 국어로 사용되는 문자가 만들어진 날과 만든 주체, 그리고 그 과정을 소상히 아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물론 자멘호프가 만든 에스페란토어, 몽고의 원나라때 만든 글자 등 만든 과정이 분명한 문자도 있지만, 한 나라의 국어가 아니거나 지금은 소멸되어 사용되지 않는 죽은 언어에 불과하고 말와 글자를 일치시킨 국어로 아직도 생명력을 가진 이토록 과학적 문자는 우리의 한글밖에 없다.

한글날은 처음에는 11월 4일(음력 9월 29일)이었다. 1926년 이날 국어연구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민사라는 잡지사에서 주최하고 일제관리와 언론기관 관계자들이 요리점 식도원에서 모여, 한글을 만든 이후 처음으로 축하 기념식을 올리고 ‘가갸날’로 불렀다. 이듬해 조선어연구회 회원들이 동인지 『한글』을 만들면서 한글날로 고쳤고, 그 뒤 조선어학회에서 10월 9일로 개정, 해방후 공휴일이 되었다. 10월 9일의 근거는 원본 『훈민정음』 서(序)에 ‘정통십일년구월상한(正統十一年九月上澣)’이라고 한데서 근거한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446년(세종 28) 10월 9일이다. 그런데 학자들 중에는 이 날은 『훈민정음해례』라는 책이 완성된 날짜이고 훈민정음창제와 반포날은 1443년 (세종 25) 음력 12월 30일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설에 따른다면 한글날은 양력으로 1월 28일이 되는 셈이다.

한글의 최초의 이름은 물론 ‘훈민정음’이다. 그런데 ‘정음’으로 부른 측은 세종과 창제에 참가한 쪽이었고, 세종당대에도 다른 신하나 백성들은 ‘언문(諺文)’으로 불러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이었다. 게다가 여인네들이 많이 사용했다고 ‘암클’, 그밖에 중들이 쓴다 하여 ‘중글’ 등으로도 불려 한자인 ‘진서(眞書)’에 비해 낮춰 불렀다. 갑오개혁이후에는 관공서문서에 한글을 병용하기도 하면서 ‘국문’으로 한동안 사용하다가 주시경에 의해 현재의 ‘한글’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한글의 창제동기가 단순히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 만들었다는 설은 요즘에는 통설로서의 의미를 잃고 있다. 봉건지배층의 행위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들이 베푸는 시혜(施惠)는 결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혜는 농민의 전리품에 다름아니다. 한글이 농민의 역사적 전리품이라는 시각의 입장에서는 고려 무신정권이후 ‘공후장상(公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는냐’는 피지배계급의 의식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한다. 무신의 난으로 고려귀족계급의 지배질서가 무너지면서 일반 백성들의 정치적 사회적 의식에도 변화를 가져와 자의식을 찾게 된데다가 고려의 패망과 조선의 성립이 중세사회자체를 동요시킨 결과 지배계급의 입장에서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재확립을 위해서도 일정하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 줄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토지제도인 과전법도 실시과정에서는 많은 변질이 있어 종래의 권문의 토지소유를 해체시키지도, 관리에게 주듯이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지도 못하고 소작권 보호 정도에 머물렀지만, 원래의 구상에는 농민에게도 일일이 나누어 줄 계획이 있었다. 농민의 지지없이 정권 수립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이 그 구상의 배경이었다. 세종때의 많은 역사적 발명품, 물시계나 측우기나 농사직설 같은 농업서적, 토지세의 재편 등도 농민의 지지를 획득해 불안정했던 이씨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의 결과 였다.

한글도 마찬가지다. 자의식의 성장은 문자로의 의사표현도 바라게 되어 농민으로 하여금 소외된 문자생활권으로의 진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세적 지배질서의 재확립을 위해서라도 백성을 지배계급의 입맛대로 ‘훈민(訓民)’할 필요성이 있었고, 그래서 ‘정음(正音)’을 만들었던 것이다. 훈민정음을 만든 초기에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과 같은 유고적 덕목을 담은 서적을 펴내 백성들에게 편찬보급한 것은 이러한 의도의 발로다. 『용비어천가』와 같은 이씨의 정권 장악을 합리화하는 글을 지은 것도 같은 목적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훈민정음의 반포시에 최만리 등의 인물들은 이에 극력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흔히 이들을 한자를 숭상한다해서 사대적으로 보지만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원래 세종은 궁중안에 절을 지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한글을 만들고 나서 앞서의 유교적 덕목의 책만 지은 것이 아니라 『석보상절』과 같은 불교서적도 많이 간행했다. 최만리의 입장에서는 한글의 창제가 숭불행위로 보였던 것이고 척불숭유를 이상으로 삼는 조선의 정치적 이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세조가 등장한 후 성상문 등 한글창제에 참가한 학자들이 대거 숙청되고, 연산군 때는 연산군의 학정을 비난하는 한글 대자보가 나붙었다는 이유로 한글사용자를 밀고하고 한글서적을 불태우는 혹독한 한글 탄압책을 폈다. 그 이후 한글은 사류(士類)들에는 발붙이지 못하고 안방의 ‘암클’이나 절간의 ‘중글’로만 남아 서민들의 표현수단이 됨으로서 초기의 과학성에 비해 계속적 발전을 못하고 근대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창제이후 몇백년 동안 한글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달라지는 언어체계에 따른 새로운 연구는 실학자의 몇편 연구결과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문자라도 표현할 수 있는 한글의 특성상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이 감해질 수는 없었다. 1880년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한국에 와서 왕보다 더 큰 권력을 휘두르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 다 되어서야 돌아간 중국의 원세개는 중국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칭송하고 어려운 한자보다 한글을 보급하자고 주장했다. 원세개의 주장은 소국의 문자를 쓸 수 없다는 중국지배층의 격렬한 반론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지만 한글이 가지는 소리글자로서의 우수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중국글과 요즘의 한글과는 함께 사용하기 어렵다. 중국어는 높낮이의 사성(四聲)이 있는 반면에 지금 한글에는 이것이 없다. 그러나 예전의 한글은 중국식 사성까지 표기할 수 있었다. 원세개의 한글사용주장은 결코 공론(空論)이 아니었던 셈이다.

한말이후 우리 글로서의 한글이 인식되면서 한글연구의 불이 붙더니 식민지의 암흑기에서도 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1940년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한글사용 자체가 거부되면서 조선어학회사건까지 있었던 것이다. 해방이후에는 한글이 우리의 국어로 자리 잡아 수많은 대학에 국어국문과가 반드시 끼이는 등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시련은 있었다. 이승만 정권때는 한글간소화 정책이라 하여 한글철자법을 19세기의 『성경』투로 돌리자는 의도가 있었다. 서양사람이 번역한 한글성경,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언문성경이 기독교적 정서에 맞다는 철저히 기독교적 발상이 그 배경이지만 이같은 반역사적 사고는 한글학자을 위시한 대중의 격렬한 반대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요즘 기독교쪽에서 만든 새 한글성경은 현재의 문자생활에 맞춘 것이어서 기독교내부의 문자생활을 한꺼번에 백년 건너뛴 혁신적인 것이다.

한글은 아직도 완성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언어는 완결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며 인간생활의 변화에 따라 함께 바뀌어 간다. 하지만 일정한 시점에서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자기의 모국어를 다듬어야함은 항상 진리다. 최근 제정된 맞춤법은 우리의 문자생활에 많은 혼돈을 가져오고 있다. 그 이유는 맞춤법제정의 과정이 전국민적 여론 수렴과 학문적 토론의 결과라기 보다 몇몇 국어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제기한 원안을 별다른 수정없이 통과시킨 탓이다. 사실 이 글도 요즘의 맞춤법을 제대로 따랐는지는 의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글날의 공휴일부활은 다시 한 번 논의되어야 한다. 문자생활에 근거하는 현대사회에서 그 문자가 제정한 날을 기념하고 되새겨 올바른 문자생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우리사회의 발전과 불가분의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