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쟁기와 통일

0
248

쟁기와 통일

하원호(근대사 1분과)

조선시대의 명정승 황희가 고려조에 경기도 적성에서 훈도(訓導)를 지낼 적 이야기다. 적성에서 당시 서울이던 개성으로 가는 도중에 누렁소와 검정소 두 마리 소를 몰고 밭갈이를 하다가 나무그늘 밑에 앉아 쉬고 있던 한 노인네를 만났다.

황희가 말을 멈추고 장난스런 말투로 물었다. “영감님 소 두 마리는 다 크고 건장한데 밭갈이하는 힘은 어느 쪽이 더 세우?”

늙은 농부는 황희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그의 귀에 대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 쪽이 낫고, 저 놈은 좀 모자라지오.” 했다.

귓속말에 의아해진 황희가 왜 그렇게 소리를 낮추어 말하냐고 묻자, “아무리 소지만 모자란다고 하면 좋아할 리 있겠소?”했다.

이 말을 들은 황희는 엄청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요새말로 세계관이 달라진 것이다. 황희가 정치적으로 김종서를 길러 세종때 북벌을 추진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지만, 야사 속의 황희는 손자와 종의 아이가 상투를 잡고 흔들어도 그냥 오냐 오냐 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쯤으로 묘사된다.

어느날 집안의 하인 둘이 사소한 일로 다투다가 황희에게 잘잘못을 가려주기를 바라면서 각기 자기 주장을 펴자 네 말도 옳다, 너도 옳다 했다. 옆에서 다른 하인놈이 이 광경을 보고 있다가 다 옳은 법이 어디 있느냐고 따지고 들자 “그래 그 말도 맞구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남의 말을 잘 듣고 비난하지 않는 둥글 둥글하고 너른 성품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것은 바로 누렁소와 검정소의 늙은 농부에게서 얻은 교훈때문이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아동교육의 기본이 “너는 옆집 철이만큼도 못하냐”는 식의 능력대비에 따른 비판을 삼가라는 데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농부의 소다루는 법은 이미 시대를 앞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이야 소의 힘보다는 기계를 많이 사용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으로는 밭갈이에 소 두 마리가 뭣때문에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소 한 마리에 쟁기 하나 다는 것만 보아온 분들에게는 얼핏 이해가 안가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소 두마리에 쟁기를 매어 사용하는 예가 있다. 근래에도 강원도 산간지대나 경기도 북부지역에서 아주 드물게 볼 수 있다.

이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의 보고에도 1980년대 경기도 가평과 양주에서 실제로 확인된 바 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모 티비에서는 강원도 산골에서 그 밭갈이 모습을 직접 찍기도 했다. 이들 지역에서는 소 한마리가 끄는 쟁기를 ‘호리’라고 하고, 두 마리로 끄는 쟁기를 ‘겨리’라고 한다. 겨리는 주로 산간의 거친 땅을 가는데 효율적으로 만들어진 쟁기이다. 겨리로 쟁기질할 때 요령은 두 마리 소의 힘을 한군데 모으는 것이다. 누렁소 검정소의 임자인 늙은 농부의 이야기는 바로 이 쟁기질의 철학인 셈이었다.

한반도에 농경이 시작된 때는 신석기 후반부터라고 믿어지는데 쟁기도 농경의 시작과 함께 만들어졌다. 넙직한 돌로 만든 돌쟁기가 신석기 유물중에 자주 출토된다. 물론 이 돌쟁기는 사람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흔히 가축의 힘을 이용하는 쟁기를 그냥 ‘쟁기’로 부르는 반면, 사람힘이나 가축힘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극젱이’라고 한다. 사람힘만 사용하는 쟁기는 ‘인걸이’라고 부른다.

기록상 쟁기질에 짐승의 힘을 사용한 것은 신라 지증왕때다. 흔히 우경(牛耕)의 시작을 이때라고 보기도 하는데 이미 고구려의 벽화에 소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나 백제도 이미 우경을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학자에 따라서는 지증왕때의 우경은 단순한 소를 이용한 쟁기질이 아니라 보다 깊숙히 밭갈이하는 심경(深耕)으로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증왕이후의 우경은 신라의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진흥왕때 가야와 한강유역, 나아가 원산지방 가까이까지 진출함으로써 철산지를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철제 농기구를 공급받을 수 있어 신라의 사회적 생산력은 종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삼국 중 만년 후진국의 위치에서 벗어나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요즘 학교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좀 다르지만 60, 7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니신 분들은 삼국통일하면 화랑도를 먼저 생각한다. 그 기억의 저 편에는 60년대 이후 ‘정신교육’으로서의 국사교육이 있다. 물론 화랑도는 진골귀족의 건강한 ‘군인정신’을 기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화랑도같은 청년귀족의 군사교육기관은 고구려나 백제에도 있었고 교육내용이나 조직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화랑도의 지나친 강조는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군사문화가 사회를 지배하고 그 정신적 뿌리를 역사적으로 찾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결코 화랑도에서만 찾을 수 없다. 화랑도의 정신이 신라의 지배계급을 건전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전투를 하는 하급군인의 원천인 농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통일의 기반은 무엇보다 앞서 말한 지증왕 이후 우경(牛耕)의 개발과 진흥왕때의 농경지 확보 등 생산력 발전에 따르는 경제적 바탕이 형성되었던데서 찾아야 한다. 농경의 발전이 농민의 농지에 대한 소유의식을 높였고 지켜야할 땅을 위해 싸울 수 있었다. 화랑도가 삼국통일의 화사한 꽃이파리 한잎이라면 농경의 발전은 뿌리와 줄기였던 것이다.

최근 들어 통일의 논의가 흡수통일쪽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 듯하다. 동독의 사회체제와 경제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서독이 재통일을 이루었듯이 우리의 경우도 북한을 바짝 조아들어가면 경제나 체제가 붕괴되고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을 것’ 이라는 것이다. 그 때문에 북한에 대한 미국이나 정부의 양보(?)가 오히려 통일을 늦추게 한다고 한다. 북한정권 수립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좋은 세월을 기다리면서 장농 깊숙이 간직해 두었던 때묻은 땅문서를 은밀히 사고 판다는 소문은 이 흡수통일의 판단이 사회 일각에서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김일성이 죽고 난 뒤 엄청난 식량위기 속에서 탈북자가 대거 생기고 그래서 내일 모레면 곧 북한이 무너진다는 식의 이야기는 보수신문에서나 열심히 꼬투리를 잡으며 바라는 것일까 현실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일부 우리의 극우보수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북한을 몰라서가 아니다. 미국은 세계 최고의 정보수집능력을 자랑하는 국가다. 무너질 나라와 손잡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앞날의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데 미국이란 나라가 양보한다는 것은 현대세계사나 신문의 외신면을 한번도 펼쳐본 적이 없는 눈뜬 장님이나 할 소리다. 안기부가 그토록 기분 좋아하는 황장엽의 탈북도 북한내 정치 권력의 파워게임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결코 신라의 삼국통일이나 이승만식의 북진통일을 바랄 수는 없다. 무력통일이 가져오는 엄청난 민족적 손실을 생각하면 평화통일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그것도 한쪽이 한쪽을 ‘먹는’ 막연한 흡수통일식의 방법은 오히려 엄청난 통일 비용을 들이고 안그래도 막가는 남한 경제를 무너지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통일을 위한 첫걸음은 몇십년동안 갈라진 사이에 만들어진 서로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틈새를 메우고 민족적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꾸준한 쟁기질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누렁소와 검정소의 쟁기질처럼 한 쪽이 좀 못해도 서로 도와야만이 밭이 갈리듯 통일의 쟁기질도 서로가 비난하지 않고 힘을 모으는 지혜가 그 바탕이다. 과거 신라의 쟁기는 무력통일을 위한 기반이었지만 지금 우리의 이 쟁기질은 민족이 함께 살아가는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쟁기질의 힘은 계속된 흉작의 북한에 우선 식량을 조금이라도 보태는 데서 나올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