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아빠, 무명이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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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무명이 뭐예요?

하원호(근대사 1분과)

지금은 중학교 다니는 딸애가 초등학교 초년 쯤인가, “아빠, 무명이 뭐예요?”하고 물었다. 무명이라. 하기야 “목화밭 목화밭 ” 하는 노래도 시골서 자라 지금 40대 이상된 분들 정도가 되어야 “아 그 밭!”하고 목화 따먹던 생각이 나지,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목화밭’은 요즘 아이들에게는 조용필의 ‘킬로만자로의 표범’보다 현실감이 없다.

침침한 안채 골방의 베틀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엣다 하고 던져주던 엿조각의 단맛이 생각나는 ‘무명’이란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니 입고 있는 옷이 뭘로 만들어졌냐?”
“순면 100%래요.”
“그걸 순 우리말로 하면 몽땅 무명이란다.”
수입면으로 만든 옷을 무명옷이라고 말했으니 틀린 건 아니지만, 글쎄, 그래도 엿냄새나는 무명옷이랑 요새 미국 목화 농장에 나온 면으로 짠 순면옷이 과연 같은 체온의 옷일까.

목화를 문익점이 가져온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 이야기야 따로 할 것도 없다. 그런데 목화를 가져온 후에 어떻게 무명을 만들었나는 좀 전문적인 이야긴 만큼 필자가 한 마디쯤 거들어도 될 것 같다.

경상남도 산청군에는 문익점이 ‘면화를 처음으로 재배한 사적비’가 서 있다. 비문에는 문익점이 목화 종자를 가져와 재배의 묘를 얻어 3년만에 번성시켜 전국에 퍼뜨렸다고 한다. 또 손자 문래(文萊)는 물레를 만들어 ‘문래’로 이름짓고, 문영(文英)은 베짜는 요령을 얻어 이를 ‘문영’이라 했는데 지금은 와음이 되어 물레와 무명이라 부른다고 한다. 전래와 재배는 문익점이, 물레 제작은 문래가, 무명 만드는 법은 문영이 했다는 이 설은 문씨 집안 전래의 이야기로 내려왔고, 비문은 이를 따른 듯하다.

그런데 {고려사} 열전의 문익점에 대한 항목은 문씨 집안의 설과는 좀 다르다. 문익점이 장인인 정천익에게 가져온 종자를 주었고, 정천익이 재배방법을 몰라 거의 다 말라 죽이고 한 줄기만 자라나 3년만에 크게 번성했다고한다. 정천익은 재배만 한 것이 아니라 씨아와 물레도 발명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태조실록}에는 이보다 좀더 자세히 적혀 있다. 문익점이 심은 종자는 다 제대로 자라지 못했고 오직 정천익의 것이 한개가 살아 그 해 가을에 백여 개의 열매를 얻었고, 그 뒤 해마다 종자를 얻고 그것을 퍼뜨려 심도록 했다고 한다. 또 기구를 만드는 과정도 적혀 있다. 정천익이 지나가는 호승(胡僧;중국승려? 인도승려?) 홍원(弘願)을 붙잡아 두고 며칠을 공들여 대접한 뒤 기구를 만드는 법과 목화의 씨를 빼는 씨아질, 베짜는 기술을 습득하고 집안의 여종에게 가르쳐 1필의 베를 짜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널리 전해져 10년이 채 못되어 전국에 보급되었다고 한다.

한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 보다는 아무래도 사서(史書)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보다 신빙성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여러가지 정황을 살펴 보아도 {태조실록}의 기사가 제일 믿을 만하다고 본다.

그런데 {태조실록}의 기사 중에 호승이 베짜는 기술까지 전래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다소 의문스럽다. 무명으로 옷을 해 입기 전에도 이미 다른 직물로 옷을 해 입고 있어서 베짜는 법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씨를 빼고 실을 뽑는 기술이다.

조선중기의 대유학자이던 조식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에는 손으로 씨를 빼고 실을 뽑았는데 중국의 승려가 씨아, 물레를 만들어 사람들에세 옷감짜는 기술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조식의 설은 승려가 가르친 것이 베짜는 직조기술이 아니라 실뽑는 방적술이었다는 것이다. 조식이 살던 지역이 문익점이나 정천익이 살던 곳과 가까워 조식의 설에는 이 지방에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가 남아 있을 가능성도 있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믿을 만하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던 씨아나 물레는 인도나 중국에서 쓰던 것과 똑같았다. 따라서 실만드는 물레를 문래나 정천익이 만들었다는 앞의 비문이나, {고려사}의 기록은 믿기 어렵고, 조식의 기록처럼 중국 승려가 전수해 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같다.

마찬가지로 무명이 문영의 와음이라는 설도 믿기 어렵다. {태조실록}의 기록에 의해도 무명을 처음 짠 것도 문영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무명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나왔을까. 조선중기의 어느 기록에 의하면 목화에서 얻은 실로 짠 이 옷감에 이름이 없어 이름 없다는 뜻의 ‘무명(無名)’을 붙였다고도 한다.

원래 말의 어원이라는 게 언어학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견강부회해서 온갖 설을 갖다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설도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무명의 한자말은 목면(木棉)이고, 목면의 중국식 발음은 ‘무미엔(mu mian)’이다.

언어학적으로 보아 무명의 어원은 ‘무미엔’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를 가져오면서 그것으로 짠 옷감의 이름이 ‘무미엔’인 줄 몰랐을 리 없고 정천익이 ‘무미엔’을 만드려는 생각없이 중국승려를 집안에 끌어들였을 리도 없다. 따라서 ‘문영’설이나 ‘무명(無名)’설보다는 ‘무미엔’설이 가장 그럴 듯하다고 본다.

무명이 있기 전에도 여름이야 삼베나 모시를 입고 하층 계급은 대충 걸치고 지냈지만, 겨울나기는 걸칠 옷가지가 마땅치 않았다. 귀족쯤 되면 비단옷입고 절절 끓는 방구둘에 버티고 살아가니 별 상관 없다 하더라도 평민은 비단은 만들어도 입을 처지는 못되고 심하면 짐승가죽이나 짚새기도 걸치고 지냈다. 자유로이 옷을 지어 입을 수 있고 겨울지내기도 한결 나은 무명은 우리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 왔던 것이다.

그래서 무명은 쌀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에서 없으면 안되는 것이 되었고, 쌀과 함께 조세로도 받았고 화폐로도 사용되었다. 선비가 과거 보러 서울 가는 길에 부인이 밤새워 길쌈한 무명 한 뭉치를 지고 가면 노자돈이 되고도 남았다. “주모, 여기 얼마우?” 하고는 무명 한 자락을 칼로 뭉툭 떼어 주는 광경은 주막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무명은 우리 보다 한 세대 전의 어른들 생활 속에도 살아 있는 전설이 된다. 필자의 친척 할머니 한 분은 집은 기둥만 남고 양반 명색만 가진 집안에 시집을 가셨는데 남편되시는 어른은 늘 출타를 하시고 일년 가야 한두 번 들를까 말까 였다. 가끔 집에 들어오면 바가지는 커녕 반가와 그냥 가슴이 콩당 콩당 뛰었다고 한다. 그래서 농사일 사이 사이 틈틈이 짜낸 무명으로 새옷 지어드리고 한 보름 극진히 모시고 나면, 그 어른은 남은 무명을 털어 등에 지고는 또 출타하셨다고 한다. 요새 젊은이들이야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하나 반문할런지는 몰라도 먼 옛날이 아닌 한 세대 전 이야기다.

우리 전통문화의 하나가 되어 있던 무명이 적수를 만난 것은 개항이후이다. 개항후에 일본과 청나라는 영국제 면제품을 우리에게 중계무역을 했는데, 그 때 들어온 영국제품은 카네킨이었다. 일본사람들은 그 음을 자기들 발음 그대로 한자로 적었고 우리말로 읽으면 금건(金巾), 요새 옥양목이 그것이다. 청일전쟁이후가 되면 일본의 면공업도 상당한 발전을 봐서 자기들 면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해, 요즘 광목 정도되는 씨이팅이나 우리 나라에서 가장 좋다고 치는 진주지방의 목면을 흉내낸 목면을 우리 무명보다 싼 값으로 팔았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나름대로 자라나고 있던 영세한 면공업을 무너뜨렸고, 목화밭도 일본에 수출하던 콩을 심는 밭으로 많이 바뀌었다.

영국의 예에서 보듯이 산업혁명은 최초로 면공업에서 출발하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가 시작되는데 일본에서의 면제품 수입은 우리의 자주적 근대로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은 우리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자기들 면공업의 원료기지로 삼으려고 육지면을 강제로 재배시켜 문익점이 가져온 목화씨의 후손은 이 때 많이들 사라졌다.

그래도 농사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 집에서 길쌈도 하는 바람에 일제때까지는 우리 무명 만들기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50년대이후 미국 쪽에서 파란 눈의 미모의 목화 아가씨들을 앞세워 목화농장에서 대량생산한 목면을 우리나라에 쏟아 부으면서부터는 베틀이나 씨아는 박물관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는 골동품이 되었고, ‘목화밭’노래도 우리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미국 남부 어느 농장 톰 아저씨 오두막집의 애송곡쯤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