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부처님의 대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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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대궐

하원호(근대사 1분과)

이젠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씨의 안국동집은 서울에서도 알아주는 99칸이 넘는 대저택이다. 민간의 집이란 게 임금이 사는 대궐보다 나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예전의 국법이었다. 그래서 기둥의 두께나 넓이, 방의 칸수 등에 모두 제한이 주어졌지만 이 집만은 궁궐에 못지 않는 대단한 고루거각이다.

이 집을 지은 이는 고종때 ‘망난이’로 불리던 민영주(閔泳柱)다. 민비의 일족이던 민영주는 민씨일문의 비호 아래 인천 월미도를 외국인에게 팔아 먹는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하여 떵떵거리고 호사를 누렸지만 행동이 개차반이라서 세평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망난이’라는 별명으로도 모자라 뒤에 가서는 ‘부처님’이라고 거꾸로 비꼬아 불렀다. 이 민망난이가 부처님 소리를 들으며 지은 집이 바로 이 집이다.

하루는 고종이 경복궁 뒤로 궁내 거동을 하던 길에 이 집을 보게 되었다. 궁궐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궁궐과 다름없는 이 집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네 집이냐고 물었다. 민영주의 집이라고 하자 곧 그를 불렀다. 민영주는 아찔했다. 국법에 없는 집을 지었으니 이젠 꼼짝없이 걸렸구나 했다. 그러나 말 잘하는 민영주가 그냥 당할 리 없었다.

“네가 지은 집이 꼭 대궐같구나.”
“신이 어찌 감히 대궐을 지었겠습니까.”
“그러면 무엇인고?”
“저 집은 신의 집이 아니오라 절(寺)집이옵니다.”
“뭐 절이라구?”
“네. 분명 절인줄 아뢰오. 세상에서 신을 가리켜 망난이라 일컫삽더니 근래 와서는 부처님이라고 부릅니다.”
왕은 픽 웃었다. 제 험담을 제 입으로 늘어 놓고 있으니 웃음이 나올만도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되면 으례 절간에 들어 앉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민씨일족을 다스릴 힘이 없던 고종으로서는 재담 한 마디에 이 ‘부처님의 대궐’을 그냥 웃어 넘길 도리 밖에 없었다.

의식주는 인간생활의 기본이고 차례로 따져 집이란 게 옷이나 음식 보다 뒤로 가지만, 사치에도 한계가 있는 옷이나 음식에 비해 자신의 부를 확실히 남다르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집이다. 그래서 가진 사람들의 집넓히기에 대한 열망은 없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국내 최대의 재벌이 자신의 집 주변 땅을 몽땅 사들여 동네 하나를 자기 집으로 삼으려는 짓거리는 저 민영주의 부처님짓과 그대로 닮았다.

원래 집의 기본 형태는 동굴이나 움막이다. 원시인들의 유골이 발견되는 곳은 평지보다는 대체로 동굴인데 평지가 후세의 뭇사람들의 손이 가서 유골이 남아날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동굴은 입구가 묻혀 버리면 사람의 출입이 어려운데다가 온도나 습도가 일정해서 오래 보존되는 탓이었다.

우리나라 석기시대의 움막은 대체로 땅을 60-70cm의 깊이를 파고 동물가죽이나 나무가지를 위에 덮은 형태였다. 원형이나 네모꼴 모양이 많고 움막의 가운데에는 화덕(爐)를 두어 난방과 취사를 겸하게 하고, 출입구는 남쪽으로 내었다.

그런데 크기는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것이 각기 다르다. 구석기는 보통 30m2정도로 어른 10명쯤 거주하는 크기였고, 신석기는 18m2 정도인데 어른 4명이 살 수 있는 넓이다. 이 주거형태의 변화는 가족 구성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구석기시대는 채집경제로 생계를 이었는데, 사냥감의 수확이 불규칙한 남자의 노동력보다는 안정적으로 먹이를 채집하고, 자식을 낳아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여성이 사회적 지위에서도 농경사회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혈통도 모계로 갔다. 한 250만년으로 보는 인류의 전역사는 이 모계적 성격의 사회였다. 그러다가 오래되어야 4-5천년전쯤 되는 신석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농경이 시작되었고, 농경이 요구하는 근육노동력을 가진 남자가 노동력의 질에서 여자보다 우위에 서면서 비로소 지금과 같은 단혼소가족의 부계사회가 출현한다. 신석기 시대 움막의 크기는 이같은 가족구성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가 모든 사회적 가치의 척도로 삼는 가족윤리라는 것도 인류역사를 양적으로만 본다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의 남성의 근육노동력은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그 가치가 축소되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노동력도 중요시하게 되었다. 과학화가 고도로 진행되어 생산력 수준이 근육의 힘이 아니라 두뇌나 섬세한 손놀림에서 결정되는 지금 같은 사회에서는 여성노동력이 남성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분야에 따라서는 나을 수도 있으니, ‘여성해방’은 구태여 여성들이 앞장 서 주장할 것도 없는 사회적 현상이다. 요즘 신세대 맞벌이 부부간에 집안일을 나누는 것을 나이 드신 분들은 못마땅하게 여기지만 농경사회의 가치관으로 산업사회의 현상을 평가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사실 필자처럼 신세대가 아니라 구세대에 가까운 나이에다가 게을러 빠지고 전근대적 봉건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인간이 집안에서 설거지나 청소를 하고 싶어 하는 건 아니다. 맞벌이 마누라를 둔 덕분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청동기시대도 여전히 움집의 형태를 띠지만 온돌도 발견되고 지상가옥에 가까운 형태다. 요즘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가 서는 것은 갈수록 위로 향하는 인간의 집형태를 반영하는 것같기도 하다. 석기시대의 집크기가 대체로 일정한데 반해 청동기시대의 집은 차이가 많다. 현재 발굴된 집단 주거지를 보면 그 규모가 5.2m2에서 80.5m2까지 크기가 각기 다르다. 그것은 바로 압구정동 80평짜리 아파트와 단칸방만 빽빽히 들어선 달동네의 차이와 같다. 계급간의 분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유명백화점이나 자동차판매회사가 주요 고객으로 삼는 기준이 아파트 평수라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인격이 아파트 평수에 비례하지는 않지만 돈이 사회적 가치의 척도인 자본주의사회에서 집크기는 집소유자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옷이나 다름없다. 요즘 돈가진 사람에게서 비오면 방안에서 우산 쓰고 있던 조선시대 명정승 맹사성의 안빈낙도(安貧樂道)를 바랄 수야 없다. 곳곳마다 ‘부처님의 대궐’이 들어서지만 이제 말릴 임금마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