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산책] 경상도 보리문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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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보리문둥이(?)

 

군대시절의 추억과 어느 여중생의 대화

요즘은 잘 모르겠지만,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군대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을 비하하는 말이 일상적으로 통용되었다. 전라도 사람에게는 깽깽이, 경상도 사람에게는 보리문둥이라고 통칭하는 말 등이 그것이었다. 거기에는 지역감정이 곁들여있어 때로는 특정 지역에 대한 집단적인 냉소와 폭력이 수반되기도 하였다. 고참이 어느 지역 출신인가에 따라 특정 지역 출신은 군생활이 매우 괴로웠다. 그래서 경상도 출신들은 보리문둥이라는 표현을 몹시 싫어했던 기억이 있다. 필자 역시 왜 경상도 사람들을 문둥이라고 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설마 나병 환자가 경상도에만 유독 많았던 것은 아닐테고, 나병 환자들의 집단 거주지가 경상도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닐터였다. 식민지시대 이래 나병 환자들을 사회적으로 격리시켰던 가장 대표적인 곳은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무대였던 소록도였고, 그곳은 전라도에 있었다. 문둥이 앞에 보리가 들어가는 것은 나병환자 시인으로 유명했던 한하운의 「보리피리」에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부산에 갔다가 군대 시절의 내 선입견, 즉 경상도 사람들은 문둥이란 표현을 싫어할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버스를 탔던 여중생들이 서로를 향해 매우 다정스런(?) 억양으로 ‘이런 문둥이 가스나를 봤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보기엔 전혀 문둥이로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곱디 고운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여학생이나 듣는 여학생 모두 생글거리면서 서로를 문둥이로 지칭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경상도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문둥이라고 부르며, 그 말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 문둥이 앞에 보리란 수식어가 들어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 조선후기 영남 지역으로 가보기로 하자.

경상도를 대표하는 작물 – 보리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쌀밥을 선호했다. 흰쌀밥에 고기국은 꿈에서도 그리는 맛난 음식의 대명사였다. 특히 조선후기 들어 모내기의 보급과 농업 기술의 발달로 쌀의 생산이 늘었고, 쌀밥이 주식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당시 서울이나 호남, 호서 지역 사람들은 평소에는 쌀밥을 먹다가 추수한 쌀이 떨어지는 때인 음력 4월에서 6월까지만 보리로 끼니를 이었다.

경상도는 전라도나 충청도에 비해 산이 많았다. 때문에 논이 전라도나 충청도에 비해 많지 않았다. 논이 많지 않다보니 쌀만으로는 1년을 버티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쌀보다는 밭에서 나는 곡물에 의존하는 비중이 높았다. 경상도 사람들이 쌀을 대체할 작물로 특히 공을 들였던 것이 보리였다. 경상도에서는 일찍부터 모내기를 받아들여 논에서 쌀과 보리를 이모작하는,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농법으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주식으로 쌀보다 보리를 많이 먹었다.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의하면, 다른 지역에서 쌀밥을 먹는 시기인 겨울과 봄에도 경상도 사람들은 보리밥을 먹었다고 한다. 또 속설이긴 하지만, 경상도의 대표적 양반가문인 내앞(川前) 김씨 여자들이 시집을 가기 전까지 먹은 쌀이 모두 합해 2말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경상도 사람들은 조선후기 들어서도 쌀밥보다는 보리밥을 주로 먹었다. 그러므로 다른 지역 사람들이 경상도 사람들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먼저 연상되는 것이 보리였다. 마치 강원도 사람을 감자바위라고 할 때의 감자처럼, 보리가 경상도 사람을 연상케 하는 곡물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보리문둥이라고 할 때의 보리가 여기에서 연유했던 것이다. 한하운의 보리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영남의 정치적 소외와 유소(儒疏), 그리고 문동(文童)

다음은 문둥이의 연원에 대해 알아보자.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문둥이는 문동(文童)이라는 말이 시기를 내려오면서 바뀐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문동이라는 말은 조선후기 정치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영남지역은 “인재의 부고(府庫)”라고 칭해질 정도로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하였다. 숙종 초반까지만 해도 영남에 기반한 정치세력이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숙종 연간의 당쟁에서 기호지역에 기반한 남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영남 남인은 고립무원의 재야세력으로 전락하였다. 게다가 영조 연간에 일부 소론과 함께 영남 남인이 무신란(戊申亂)을 주도하였다. 무신란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가지고 일으킨 것이었다. 당시 국왕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패배로 끝났고, 그 결과 영남 남인은 정치적으로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입었다.

정치적으로 실각한 영남 남인들은 중앙 정계에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수단으로 집단으로 상소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른바 유소(儒疏)가 그것이었다. 조선은 사림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조선 사회에서 사림이란 명칭은 최고의 영예였다. 그들의 여론인 사론(士論)은 국가의 공론(公論)을 대표했고, 그들의 기상인 사기(士氣)는 곧 국가, 국민의 원기(元氣)로서 적극 배양해 주고 권장해 주어야 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조선왕조는 건국 초부터 관료예비군인 사림을 양성하기 위해 교육과 인재 양성에 주력했는가 하면, 사림 즉 선비의 이름으로 행해진 언동에 대해서는 개인이나 집단을 막론하고 위정자들이 최대한 관용을 베푸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유생들이 때로는 부당한 집단행동이나 과격한 유소를 했을 때도 국왕이나 집권층은 그들이 아직 배우는 학생이라고 간주하여 늘 관용을 베풀곤 하였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 18세기 이후 영남 남인들은 영남의 거의 모든 유생이 서명한 유소를 통해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곤 했다. 때로는 많은 수의 유생을 확보하기 위해 상소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유생을 협박하거나 회유하는 일도 많았다. 그래서 한 번의 상소에 만명이 서명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영남 남인의 정치적 소외가 뚜렷해질수록 상소에 서명하는 유생 수가 증가하였다. 정조 이후 영남 유생 만명이 서명한 상소라는 의미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가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만인소가 작성되면 상소의 맨처음에 서명한 이-이를 소두(疏頭)라고 한다-와 그를 지지하는 일군의 유생들이 함께 상경했다. 그리고 소를 올리기 위해 서울 거리를 활보하였다. 19세기 서울은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도회적 풍모가 드러났고, 서울 사람들의 옷맵시는 매우 세련되었다. 영남 유생이 쓰는 사투리와 시대에 뒤진 복장은 서울 사람들의 눈에 띄었다. 서울 사람들은 상소를 하러 올라온 영남 유생을 보고, “영남의 보리 문동(文童)들이 또 상소를 올리러 왔구나”하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그러한 회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영남 사람하면 ‘보리문동’이라고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는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 그것도 특정 집안 사람이 권력을 독점했던 때였다. 그 여파로 영남과 같은 지방의 정치세력은 권력에서 밀려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남 유생들은 정치적 발언권을 잃지 않기 위해 자주 유소를 올렸고, 그로 인해 보리문동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래서 보리문동은 어디까지나 경상도의 양반만을 지칭한 말이었지, 결코 경상도 사람들 모두를 지칭한 말이 아니었다. 보리문동으로 불리던 이들 역시 양반이 아닌 경상도 사람들과 일체감을 갖지 않았다.

그런데 박정희 이후 지역감정이 기승을 부리면서 경상도 사람들은 모두가 보리문둥이라는 일체감을 갖게 되었고,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에 결속력을 보이곤 했다. 얼마전에 있었던 총선에서도 여전히 구태의연한 정치인들은 지역감정에 편승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했고, 그것은 어김없이 효과를 보왔다. 정치적 소외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노력에서 비롯된 ‘보리문동’이라는 말이 멀어지는 권력을 붙잡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여기에서 또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본다.

 

이욱(고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