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박물관] 현대사 사진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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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진답사

1. 연재를 시작하며

 고지훈(현대사분과)

개인적으로 ‘일각을 여삼추’처럼 소중히 써야할 이 중차대한 시점에, 이런 한가한(?) 에세이 비스무리한 글을 쓰고 있자니 좀 거시기하다. 하지만 이게 다 한때 연구회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 길이라 생각하고 겁없이 연작원고를 써보기로 했다. 한데 왜 뜬금없는 사진이야기일까? 무엇보다 먼저 솔직히 고백해야겠다. 사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필자는 사진학이나 포토저널리즘 혹은 현상학(이건 아닌가?), 아무튼 사진과 관련된 어떤 분야에 대해서도 완전한 문외한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요즘 유행하는 시뮬라시옹 뭐 어쩌고, 이미지와 실체의 인식론적 관계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딴 머리아픈 이야기는 저얼대~로 안한다. 아니 못한다. 그저 눈꺼풀에 힘 빼시고 가볍게, 즐겁게 그렇게 보자는 이야기다. 사족이지만 필자가 희망하는 ‘답사기의 전범’은 요기 아래 올라있는 박종진 선생님의 ‘개성답사기’다. ‘현대사 사진답사’도 그와 닮았으면 좋겠는데… 뭐 희망사항일 뿐이다.

삶을 두동강 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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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워싱턴 D.C.의 유태인학살기념관(Holocaust Memorial Museum) 전경. copy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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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유태인 학살 사진 – 출처 : Viki Goldberg, The Power of Photography, 1991

사진에 관한 에세이를 여러 편 낸 수잔 손탁은 『On Photograph』(1977)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기꺼이 말할 수 있다. 그 사진들(2차대전 직후 독일의 포로수용소의 참혹을 담은 사진들)을 보았던 12살 이전과 이후의 삶으로, 내 인생은 완전히 두개로 나눠져버렸다고

유태인 학살을 담은 사진들은 유태인이 아니더라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번씩은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사진을 본 사람들 모두 손탁처럼 인생이 ‘두동강’나는 경험을 하진 않는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워싱턴 D.C에 갈 기회가 있었을때 홀로코스트 기념관엘 가봤다. 한데 두동강은커녕 밍숭맹숭한 맘으로 나왔다. 뭐 필자의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유는 다른 데서 찾고 싶다. 바로 나와 손탁 사이의 넘기힘든 ‘간극’말이다. 그 하나는 ‘시간’이며 다른 하나는 ‘민족’이다. 짐작하겠지만 손탁은 2차대전 종전 무렵 12살이었고, 유태인 출신이다. 유태인 학살은 ‘타인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손탁에게는.

수잔 손탁, 바로 요 아지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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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출처 : 어떤 블로그에서 훔쳐온 것이다. 근데 블로그 주소를 메모한다는 걸 깜박했다. 이 연재원고의 가장 큰 적은 ‘copyright’가 될 것 같다. 모아둔 사진의 출처를 일일이 다 뒤지는 것은 완전 불가능이지만, 가급적 최선을 다해 출처를 밝히겠다. ‘copyleft’라는 표기를 해놓은 사진은 경우 무단복사ㆍ전재를 하셔도 좋다

하지만 손탁에게는 불가능한 ‘거리두기’가 20세기 말에 태어나, 21세기에 살고있는 나에게는 가능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나의 ‘윤리관’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뜻이다. 한데 손탁의 저 ‘인생이 두동강나는 경험’을 보면서 문득 데쟈뷰 비스무리한 걸 경험한다. 바로 광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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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5ㆍ18 기념재단(http://www.518.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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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5ㆍ18 기념재단(http://www.518.org/)

나같은 凡人들은 대개 머릿속에 지우개를 서너개쯤은 갖고 다녀야 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하거나 불쾌한 기억을 수시로 지워줘야 한다. 예컨대 엊그제 옆자리 후배에게 빌린 오백원짜리 동전두개에 대한 기억같은 것들 말이다. 아마 5백원짜리 동전 두개에 대한 기억은 일주일 안에 완전히 사라지겠지만, 저 사진들을 포함한 광주관련 사진들은 아마 평생 못잊을 것이다. 사실 대학 1학년 대동제때 봐야‘만’ 했던 사진은 저기 위의 사진들보다 훨씬 더 참혹한 것이었다. 『타인의 고통』(수잔 손탁)에 소개되었듯, 바타이유란 사람은 凌遲刑을 당하는 중국 죄인의 참혹한 사진을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는데, 글을 그렇게 난삽하게 쓰는 이유가 있었다. 제정신이면 그런 글과 그런 짓을 못한다. 우리같은 범인들은 도저히 못그런다. 내장이 튀어나오고 얼굴이 뭉개지고… 온통 붉은색 투성이인 그 사진들은 ‘5ㆍ18사진전’이란 이름으로 매년 내걸렸지만, 처음 한번 본 뒤로는 두 번 다시 보지않았다. 그리고 ‘5ㆍ18사진전’은 언젠가부터 대학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참혹한 광주의 사진이 보는 이로 하여금 불러일으키는 두번째 반응은 바로 ‘신뢰’였다.(첫번째 반응은 경악 아니 기겁이라고 해야겠다) 유언비어라고만 생각했던 그 모든 사실들에 대한 무한대의 믿음말이다. 한자공부 할 요량으로 열심히 읽었던 조선일보에서는 “유언비어에 속지말라”고 했던 그 허구들이 이제 진실이 되버린 거다. 유태인 학살도 마찬가지였단다. 처음 유태인수용소의 소식이 서방에 전해졌을 때 그 뉴스를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단다. 심지어 유태인신문에서조차 반신반의했다니 말 다했다. 한데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태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수잔 손탁과 같은 유태인들을 비롯 많고 많은 ‘서구문명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문명권에서 저질러진, 이 믿고싶지 않았던 잔혹극의 실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광주와 유태인수용소의 차이는 피해자의 규모도 있겠지만, 사진이 공개되는 시간에도 현격한 차이가 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신군부가 히틀러보다 훨씬 더 오래 버텼기 때문이겠다.

아무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카메라가 발명(1839년)된 이후 발생한, 전쟁을 포함한 모든 ‘대량살상’은 언제나 사진에 의해서 그 ‘실존’이 입증되곤 했다. 이 ‘살상의 현실’이란 언제나 참혹하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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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6> 1915년, 동터키 지역 거주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학살 – 출처 :  Peter Stepan ed., Photos that Changed the World, Prestel(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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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7> 남북전쟁 당시 학대받은 북군 포로 – 출처 : Viki Goldberg, The Power of Photography,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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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8> 한국전쟁 피학살자들 copy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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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9> 베트남전 – 출처 : Peter Stepan ed., Photos that Changed the World, Prestel(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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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베트남전 – 출처 : Viki Goldberg, The Power of Photography, 1991

터키학자들이 아직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을 부정하고, 또 서방에서도 “유태인학살은 없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존재하지만, 우린 굳이 그들의 장광설을 읽지 않아도 그것이 거짓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바로 저런 사진들 때문이다. 남북전쟁 당시 북부를 온통 쑤셔논 벌집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저 남군의 포로학대 사진이었고, 반전운동을 본격화시키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저런 베트남전의 참상을 담은종군기자들의 작품 덕이었다. 연민과 동정 그리고 분노로 이어져 결국엔 그들을 행동케 만든 것은 바로 그들이 본것에 대한 무한한 ‘신뢰’였다.

눈을 뜨다

광주와 유태인학살 그리고 베트남전의 사진들이 결국 분노로 이어졌다면,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믿음이 곧 사랑과 용서, 관용과 같은 비교적 ‘착한 감정들’로 연결되는 경우 역시 허다할 것이다. 예컨대 이런 사진의 경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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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1> 10월 16일, 고려대기환경연구소가 발표한 위성사진 두 장. 왼쪽은 2000년 5월에 촬영된 것이고 오른쪽은 2006년에 촬영된 것임.

남한보다 평균 신장이 10cm도 더 작다는 북한어린이들, 계속된 식량난으로 죽은 사람이 족히 수십만은 될거라는 말들, 그래서 시장바닥에 떨어진 국수가락이건 나무껍질이건 인육이건 가리지 않고 죄다 먹는다는 둥의 이야기를 듣곤했다. 하지만 “북한이 사회주의 천국”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이런 이야기 역시 믿지 못하긴 마찬가지다.

‘가만가만. . . . 통계치는 (식량지원을 위해) 조작된 것일 수도 있고 . . . 북한의 평균사망률이 어떤지 몰라도 아마 자연사한 사람들의 수치를 아사자로 둔갑시킨 것일 수도 있으며 . . . 인육이야기는 상식적으로 믿기 힘들고… 또 시장바닥에 떨어진 게다리를 나도 어렸을 때 주워먹었자나, 그거도 여러번이나? 아 안 믿어, 못 믿어, 믿기 싫어.’

뭐 이런 식이었다. 그 어떤 통계나 풍문들, 증언들을 들이대도 흔들리지 않던 북한체제에 대한 ‘판단유보’는 한 장의 위성사진으로 쉽게 해결되었다. 바로 저 사진이다. 저 사진을 보는 순간 러시아혁명 직후 레닌이 했다는 말이 떠올랐다.

“사회주의는 곧 소련의 전기화(electrification)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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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2> 모스크바의 농업연구소에서 전기농기구(electric plough)의 실험을 지켜보고 있는 레닌. 1921.10.22 – 출처 : http://www.marxists.org/

젠장. 저 공식이 맞다면 북한은 원시공산주의에나 해당할 것이다.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북한상황의 심각성을 믿게 만든 것도 바로 저 한 장의 사진이다.(위에 나온 것은 최근 공개된 위성사진이지만 필자가 본 것은 4-5년 전쯤에 공개된 저 비슷한 야간위성사진이다. 한데 그 사진은 찾지 못했다) 저 사진을 보고도 “보라! 평양은 암흑 속의 등불이며 탁류 속의 청류 …” 어쩌고 하는 넋나간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다. 저 한치 앞도 분간이 안되는 깜깜한 세계 속에 살아가고 있는 ‘난처한’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불사”를 외치는 부류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어쨌건. . . 등대처럼 홀로 발광하고 있는 평양을 제외한 전체가 암흑에 빠져버린 저 사진 한 장은, 유태인 학살 사진만큼이나 ‘의심’을 ‘믿음’으로 바꾸어 놓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렇다고 앞서 등장한 통계와 유언비어를 믿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이제야 믿게되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심각한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결국엔 왜 심각하게 되었는지의 문제는 물론 ‘믿음’으로 해결될 수 없고, ‘납득’되어야만 한다. 이건 사진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포토저널리즘의 한계도 바로 이 지점이다.

다음의 사진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이와 비슷한 문제를 제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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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3> 1952년 8월 어느 날, 경북의 한 관공서에서 촬영된 사진. NARA 소장. copyleft

‘부산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어렵게 직선제 개헌(‘발췌개헌안’)이 이뤄지면서, 이승만의 재선은 99.9%는 결판 났었다. 따라서 1952년 8월 5일 치러진 정부통령 선거에서 관심은 부통령 선거였다. 한데 이승만 통치시대 치러진 선거 가운데 가장 설명하기 곤란한 결과가 이날 부통령투표 결과였다. 무명의 함태영이 이승만에 버금가는(?) 위력을 가진 이범석(위 사진의 기호 9번, 작대기 아홉개 그려진 칸이다)을 아슬아슬하게 누른 것이다. 좀 과장된 표현이긴 해도 그가 거느린 족청은 “대한민국의 행정력과 맞먹을 정도”의 거대조직이었다. 한데 이승만이 부통령으로 지명하기 전까지는 시쳇말로 “자기식구들 말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던” 인물인 함태영이 당선된 것이다. 그 어떤 연구자도 속시원하게 해명하지 못하는 미스테리 중의 미스테리다. 아마도 투표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저 건물 입구에 서 있는 ‘투표용지견본’이 어쩌면 힌트가 될 수 있다. 한반도 위성사진만큼 전국적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니 ‘설득력’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준봉투표, 이승만의 지명, 관권선거와 같이 ‘하나 안하나 마찬가지’인 말보다는 훨씬 더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기껏해야 2-3번 정도 해봤을 투표, 그것도 한지 몇 년이나 지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투표방법, 제사상에 올릴 음식순서도 매년 헷갈리는 법인데 말이지. 저 견본용지의 위력은 아마 대단하지 않았을까? 알 수 없다. 이것이 사진의 한계이자 ‘현대사 사진답사기’가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이기도 하다.

나중에 우린 저 비슷한 모양의 ‘투표용지견본’이지만 이범석의 이름 아래에 표식이 된 사진도 보게될 것이다. 아울러 가림막도 없이 뻥뚫린 기표소들, 투표자를 쏘아보듯 감시하는 선거감시원들, 투표용지를 활짝 펴서 집어넣는 촌로, 무표정한 유권자들의 사진들도 볼 것이다. 이런 것들은 말과 글로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이름뿐인 선거’의 단면을, 이미지를 전해줄 것이다. 말로는 많이 들었지만 봤을때 느끼는 희열은 또 다르다.

한편 주한미대사관에서 심각하게 체크하던 이승만의 바이탈 수치를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유일하게 그의 건간상태를 식별케 해주는 자료는 ‘퉁퉁 부은’ 59~60년 무렵 각하의 용안이 담긴 사진들과 앉아서 사진을 찍는 횟수가 늘어가는 경무대의 접견모습들이다. 특히 매년 하나씩 늘어가는 생일케이크의 양초갯수에 정비례해서 어둠이 짙어가는 그의 표정도 인상적이다. 아마 재판정에 앉아있는 다양한 피고의 표정들을 비교할 기회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고개를 떨쿤이와 빳빳이 세운 그들의 내면을 마음대로 짐작해보기도 할 것이다. 그런가 하면 45년 10월~46년 초반경 김일성의 급격한 체중증가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서도 간단히 고찰(?)해 볼 것이다. 비슷한 시기 평생을 지하에서 활동하다 처음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두명의 지도자(김일성ㆍ박헌영)가 보이는 대조적인 표정에서도 뭔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탱크와 정면으로 맞섰던 민간인들은 20세기 지구촌 구석구석에 존재했는데 그들의 표정은 또 어떻게 다 다를까? 똑같은 차에 타거나 나란히 앉아 있으면서도 결국 운명이 엇갈렸던 라이벌과 협력자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불길한 앞날을 미리 읽어보는 것도 재밌을 것이다. 라이플을 들거나 맨 최고권력자들의 사진에선 비겁함과 잔인무도함의 구린내가 주로 풍기겠지만, 어떤 경우 경건함과 성스러움의 향기를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국한하지 않았으므로 외국사진들도 드물지 않게 등장할 것이다. 양해해주시길 바란다. 대충 생각나는 것은 이 정도다. 뭐 이런 식으로 연재가 진행될 것 같다.

“2번 이상 실었으면 연재 아임니꺼?”라는 항변을 하는 사태가 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끝으로.

현대사 분과, 고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