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을 위한 역사] ‘어떤 데자뷔’ 무소불위 여왕의 시대 ① 진성여왕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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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을 위한 역사]

‘어떤 데자뷔’, 무소불위 여왕의 시대
① 진성여왕의 몰락

하일식(고대사분과)

 

한국역사연구회는 <시민의 한국사> 출간에 앞서 <한겨레21>에 15회 분량의 ‘시민을 위한 역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고대사 분과 하일식 선생님이 기고한 글입니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1226.html)

 

  역사는 반복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비슷해 보이는 현상이라도 배경과 조건이 다르며, 그 속에서 활동하는 인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얼핏 겹치는 듯이 느낄 뿐이라도 교훈을 얻을 수는 있다.

신라 왕조가 무너지는 혼란의 시기로 대개 진성여왕(재위 887 ~ 897년) 때를 꼽는다. 진성여왕이 즉위 2년째 되던 해를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여왕은 각간 위홍이 죽은 뒤에 잘생긴 남자들을 끌어들여 음란하게 놀고, 그들을 요직에 앉혀 국정을 맡겼다. 총애받는 자들이 방자하게 굴어 뇌물이 공공연히 돌고 상벌이 불공정해져 기강이 무너졌다.”


[사진1] 담양 개선사 석등 : 火舍石에 경문대왕님, 문의황후님, 큰따님이 석등을 세우기를 원하셨다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큰따님은 진성여왕이다. 진골 귀족은 지금의 전남 일대에도 많은 대토지를 갖고 있었는데, 경문왕 집안도 그 하나였던 듯하다. ⓒ하일식


아버지의 후광으로 오른 여왕

이때 누군가 정치를 비방하는 글을 관청 길가에 붙였고 여왕은 사람을 시켜 찾았으나 잡지 못했다. 그러나 “필시 뜻을 얻지 못한 선비의 짓으로 아마 대야주(합천)에 숨어 사는 왕거인인 듯합니다”는 측근의 말을 듣고 왕거인을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왕거인은 분하고 원통했다. 그래서 ‘억울한 사연에 하늘이 반응했다’는 중국 고사를 들먹이며 하늘을 원망하는 글을 써서 감옥 벽에 붙였다. 그랬더니 그날 저녁에 짙은 안개가 끼고 뇌성벽력이 쳤고, 여왕은 두려워서 그를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889년, 신라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지방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사람을 보내 독촉했더니 도적들이 사방에서 벌 떼처럼 일어났던 것이다. 지방 호족이 할거하며 신라 왕조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신호탄이었다.

진성여왕이 즉위한 배경에는 아버지의 후광이 컸다. 여왕의 아버지는 경문왕으로 이름은 응렴이었다. 그가 왕이 된 사연이 재미있다.

응렴이 화랑이었을 때 47대 헌안왕이 대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왕은 응렴에게 “여러 곳을 다니며 특이한 것을 본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응렴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한 사람, 부자이지만 검소한 사람, 권력이 있지만 위세를 부리지 않는 사람”을 거론했다. 이를 기특하게 여긴 헌안왕은 두 공주 중에 한 명을 아내로 맞이하라 일렀다.

응렴의 부모는 “예쁜 둘째 공주를 선택하라”고 권했다. 그런데 평소 그를 따르던 범교라는 승려는 “만약 동생을 택하면 제가 당신의 면전에서 죽게 될 것이고, 언니를 택하면 세 가지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 하였다. 응렴은 범교의 말을 따랐고, 얼마 뒤 병석에 눕게 된 헌안왕은 신하들에게 이렇게 일렀다.

“일찍이 선덕·진덕 여왕이 있었지만 새벽에 암탉이 우는 것과 같아 본받을 수 없다. 맏사위 응렴은 나이가 어리지만 그대들이 임금으로 모시면 마음이 놓일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응렴은 왕이 되었다. 48대 경문왕이다. 나중에 범교에게 세 가지 좋은 일이 뭔지 물으니 “맏공주에게 장가들어 왕이 된 것, 이제 예쁜 둘째 공주까지 취할 수 있게 된 것, 못난 맏공주를 택하여 헌안왕과 왕비가 기뻐한 것”이라 답하였다. 이런 절묘한 대답에 왕은 승직(僧職)과 함께 황금 130량을 내려주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삼국유사>에는 다른 설화도 전한다. 왕의 침전에는 밤마다 뱀이 들끓어 놀란 궁인(宮人)들이 무서워 뱀을 쫓으려 하자 왕이 “뱀이 없으면 편히 자지 못하니 내버려두라” 했다고 한다. 또 왕이 즉위한 뒤에 귀가 길어졌는데 머리쓰개 만드는 자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가 평생 발설하지 않다가 죽기 전 도림사 대숲에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더니 그 뒤로 바람이 불면 대숲이 같은 소리를 냈다. 경문왕이 이를 싫어하여 대를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은 뒤로는 “임금님 귀는 길다”는 소리만 났다고 한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가 서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것이다. 권력을 비꼬는 분위기는 어디나 비슷했던 모양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경문왕에 관한 설화는 많은 은유를 품고 있다. 범교라는 승려와 나눈 대화는 그가 왕이 되는 과정에 모종의 음모가 개입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동생을 택하면 제가 당신의 면전에서 죽게 될 것”이라는 범교의 발언은 음모가 실패하면 예상되는 상황이다.

뱀이 꼬이고 귀가 길어졌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뱀은 동서양 모두에서 사악함을 상징한다. 경문왕의 측근으로 음모와 술수에 능한 자들을 뱀에 빗댄 듯하다. 왕이 된 뒤에 귀가 길어졌다는 것은 뭘까? 숙덕거리는 비난이 생길까, 왕위를 노리는 다른 움직임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우던 분위기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노력 때문이었는지 경문왕 때는 3번의 반란 모의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경문왕은 통치력을 안정시키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왕권을 드러내 보이려 했다. 여러 번 번개를 맞아 손상된 황룡사 9층 목탑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것이 경문왕 때였다. 뒤이어 첫째, 둘째 아들이 차례로 왕위에 올랐으니 49대 헌강왕과 50대 정강왕이다.

헌강왕이 신하들과 나눈 대화에는 “서라벌에는 초가집이 없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태평스런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는 귀족들의 삶에 국한되며, 실제 동시대의 서라벌에는 끼니를 걱정하는 빈민이 많았음이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헌강왕과 신하의 대화는 태풍 전야의 고요함 같은 것이었다고 할까.

정강왕은 즉위한 지 2년 만에 병석에 누워 신하들에게 “내 여동생은 명민하고 뼈대가 장부와 같으니 선덕·진덕의 옛일을 본받아 왕위를 잇게 하라”고 당부하였다. 진성여왕이 왕위에 오른 사정은 이러했다. 앞서 경문왕이 장인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때와, 정강왕이 누이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 꺼낸 명분은 상반된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에게 일관된 명분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1년 만에 여왕의 하야

진성여왕은 일찍부터 각간 위홍과 내밀한 관계였는데, 그는 여왕의 숙부였다. 신라 귀족들 사이에는 극단적 근친혼이 드물지 않았고 고려시대에도 그랬다. 그래서 진성여왕과 숙부의 관계도 훗날의 윤리적 잣대로 평가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위홍 사후의 방탕한 생활로 보아, 숙부에게 기댄 만큼 충격도 컸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진성여왕 때를 전후한 지식인의 동향도 흥미롭다. 당시의 혼란을 고스란히 겪은 이가 최치원이다. 그는 헌강왕 때인 885년에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왕실의 문필을 맡고 몇 군데 태수직을 전전했다. 그리고 혼란이 이어지던 894년 여왕에게 ‘시무십여조’(당장 힘써야 할 10여 가지)를 올렸다.

<삼국사기>는 여왕이 이를 좋게 받아들였다고 했지만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그의 건의가 실행된 기록도 없고 그럴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당시의 위기는 몇 가지 조치로 갑자기 해소될 것이 아니었고, 여왕이 그럴 의사와 능력을 가졌을 리도 만무했다. 귀족들도 스스로 변화할 필요를 못 느꼈을 터이고, 이미 신라의 영향력은 서라벌 일대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흔히 최치원의 ‘개혁안’이라 부르지만 나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를 개혁적 인물로 보지 않는다. 건의문을 올린 이후 최치원의 행적은 해인사 초입의 길상탑에서 나온 벽돌판에서 확인된다.

이는 최치원과 승려들이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의식을 치르며 만든 것이었다. 해인사를 습격한 도적떼를 막다가 전사한 50여 명의 명단이 나열되었고, 몇 년간 이어진 참혹한 상황도 적어놓았다. “악 중의 악(惡中惡)이 없는 곳이 없고, 굶어 죽은 시체와 전사한 해골이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


 [사진2] 해인사 길상탑 ⓒ하일식


 [사진3] 해인사 길상탑지(일부)

더 버티지 못한 여왕은 즉위 11년째 되던 897년에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신라 역사상 살아서 왕위를 물러난 유일한 경우였다. 요즘 말로 하면 하야(下野)한 셈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신라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신라 말에 ‘삼최’(三崔)라 불린 인물들이 있는데 그들의 향배가 흥미롭다.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에 대한 충성심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늦게 유학했던 최승우는 귀국한 뒤 견훤에게 가서 필력을 날렸다. 그리고 최언위는 귀국한 뒤에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을 따라 개성으로 가 왕건 밑에서 많은 이의 신망을 얻으며 활동하였다.

진골 귀족의 해묵은 권력 다툼

물론 신라의 멸망은 갑작스런 일이 아니었다. 오로지 진성여왕의 방탕함과 실정 탓이라고 보아도 곤란하다. 8세기 말부터 진골 귀족들은 왕위 다툼에 몰두하였다. 숙부가 조카를 살해하고 왕이 되기도 했다. 김헌창은 아버지가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자 앙심을 품고 822년 웅천주(공주)에서 ‘장안’이란 새 나라를 선포했다가 진압되었다. 그 뒤에도 신무왕 같은 이는 무력투쟁에서 밀려나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의탁했다가 그의 군사력을 빌려 왕이 되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국왕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골품제에 불만을 품은 지방 세력은 힘을 기르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흉년과 가뭄,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무리지어 도적이 되었다. 왕위 쟁탈전으로 어지러워진 중앙정부는 지방 통제력을 잃었고, 이는 다시 진골 귀족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지방 곳곳에 흩어져 있던 대토지를 관리할 능력이 약화되어 과거처럼 호사를 누리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도적이 된 농민의 무장력을 호족들이 차츰 흡수하고 중앙정부를 대신하면서 ‘호족의 시대’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