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 복원이라는 이름의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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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복원이라는 이름의 파괴
 – 전시 기획자의 辯 –

 김대식(중세사 1분과)

  성균관대학교 박물관(관장 송재소)은 경주 신라 유적의 어제와 오늘 -석굴암ㆍ불국사ㆍ남산- 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지난 9월 19일부터 개최하고 있다.

전시는 석굴암ㆍ불국사ㆍ남산 세부분으로 나뉘는데, 석굴암의 전시는 일제에 의해 복원되기 이전의 모습, 1913년에서 1916년까지의 1차 해체복원, 해방후인 1961년에서 1964년까지의 2차 수리, 그리고 가장 최근[2002년]에 촬영된 모습과 함께 1930년대 촬영된 석굴암 내부모습을 해체ㆍ복원되기 이전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실물의 70%로 재현한 체험공간, 그리고 석굴암에서 발견된 천불보탑ㆍ팔뚝 등 실물이 최초로 공개되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국사의 전시는 일제에 의해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진행된 수리ㆍ복원의 모습을 현재의 모습과 대비하여 보여주고 있다. 경주 남산의 전시는 동남산과 서남산으로 나누어 6m의 파노라마 사진 아래에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유적의 모습과 2007년 현재의 모습을 대비하여 전시하고 있다.

석굴암은 1913년 ‘복원’을 전후한 사진이 한 장 나올 때마다 논란이 되어왔다. 이번 전시는 ‘석굴암 수리’와 관련된 사진을 12장이나 공개해, 9월 19일 개막 이전부터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전시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약간의 기대는 했지만 이렇게 폭발적인 호응은 생각하지 못했다.

사실 석굴암 수리 이전 사진은 처음 공개된 것도 아니고 여러 번 그것도 성균관대박물관소장 유리원판보다 이전의 것도 여러 번 공개된 적이 있어 ‘양치기 소년’ 취급을 받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전시의 원래 기획은 석굴암보다는 경주 남산에 초점을 맞추어 1년 동안 남산을 샅샅이 훑어가며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현장을 찾아 그 모습을 그대로 담아 보여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관심은 몇 안 되는 석굴암의 옛 사진에만 집중될 뿐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석굴암에 대해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석굴암은 창건 이후 조선말기까지 경주지역의 사람들에게는 알려진 곳이었지만, 전국적인 명소는 아니었다. 석굴암은 1907년 군대해산과 전국적인 의병활동 과정에서 일제의 눈으로 발견된 조선의 유적이었다.

석굴암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09년 6월 이토 히로부미를 이어 2대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의 방문이었다. 이후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등이 석굴암을 ‘조선미술의 핵심이자 동양미술의 정수’라고 부르면서 위대한 유적으로 각인되었다. 석굴암은 조선을 대표하는 문화재임은 분명하지만 우리의 관점이 아닌 일본인들의 시각에서 내린 평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진 1) 소내통감 방문 때의 사진으로 추정  사진 2) 1913년 해체복원 직전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대표적인 조선의 문화재를 복원한다는 명분을 통해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려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석굴암과 불국사를 비롯한 경주지역의 문화재였다.

일제의 석굴암 ‘복원’은 문화재가 아닌 일반 건축물의 토목공사라는 시각에서 진행되었고, 부분적으로 파손된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여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어 여기에 조각상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무모한 ‘복원’ 공사의 결과는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비가 새고, 내부에는 이슬이 맺혀 이끼가 끼는 등의 새로운 문제를 일으켰다. 일제는 서둘러 방수공사와 배수로 공사를 했지만, 이슬이 맺히고 이끼가 끼는 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사진 3) 1913년 11월                                   사진 4) 1913년 12월

  해방후에도 이러한 문제가 지속되자, 전문가들이 파견하여 해결방안을 강구하려 하였다. 하지만 1961년 성립된 5ㆍ16 군사정부는 이를 군사작전처럼 해결하려 했다. 일제가 씌워놓은 콘크리트돔에 철근 콘크리트돔을 하나 더 얹어 씌우는 한편, 전실은 팔부중 조각상 2개를 옆으로 펼치면서 대왕암 방향으로 1°돌려놓았고, 여기에 지붕까지 씌워 석굴암을 완전히 밀폐구조로 만들었다.

이러한 ‘복원’은 국민적 합의는 물론 학계의 합의조차 없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졸속 복원은 1964년 6월 3일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계엄령이 내려진 와중에 준공식이 치러져 그 비판을 모면할 수 있었다.


사진 5) 1963년 11월                                사진 6) 1964년 6월

석굴암과 불국사는 일제강점기 ‘복원’ 이후 조선인에게나 일본인 모두에게 조선을 문화를 대표하는 관광의 명소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러하다. 경주는 철저한 경찰국가로 지배한 조선총독부가 관심을 가진 지역으로 발굴과 복원이라는 이름의 파괴를 진행한 지역이다. 반면 철저한 통제로 인해 개발이 억제되어 특정지역을 제외하고는 거의 온전히 보존되었다.

또한 한국전쟁의 전화를 피해를 거의 받지 않았고, 이후에도 개발이 억제되어 한반도 어느 지역보다 파괴가 덜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 경주의 어느 곳에서도 남산의 스카이라인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경주, 아니 한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석굴암은 일제와 우리 스스로에 의해 두 번이나 ‘복원’이라는 이름으로 콘크리트가 덮어씌워지는 운명을 맞았다. 이제 우리는 석굴암을 에어컨과 제습기 없이 스스로의 시스템에 의해 조절되는 원형 복원을 하여야 한다. 이번 전시는 이를 위한 기초적인 자료를 모두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진정한 복원을 위한 논의가 제기되기를 기대한다.


사진 7) 2002년 촬영  <문화재 전문작가 오세윤씨 사진>

–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소장 유리원판에 대하여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은 1,876장의 유리원판을 소장하고 있다. 이 자료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지역, 부여와 공주 등 충청도 지역, 전주와 해남 등의 전라도지역, 서울과 경기도 지역, 강원도 지역 등의 남한 일대를 비롯하여 평양의 낙랑 유적은 물론 해주, 함흥 등 북한 지역, 그리고 중국의 집안과 연길 일대의 유적, 일본 큐슈[九州]의 유적 등 한반도와 주변지역을 망라하고 있다.

이 유리원판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관장과 경성제국대학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며 조선의 문화재 전체를 관리하는 지위에 있었던 후지타 료오사쿠[藤田亮策]가 직접 촬영하거나 수집한 것이다. 후지타는 식민사학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한 인물이자 조선ㆍ일본고고학자의 개척자였다. 또한 그는 자료의 수집에 광적인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후지타는 수집한 자료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여 자료의 대부분을 포장하여 부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당시 일본으로의 귀국선에 휴대 가능한 것은 가방 2개여서 자료의 모두를 가지고 갈 수 없었다.

그는 유리원판과 필드노트류를 ‘한국의 농촌출신 사람’에게 적당한 연구기관에 줄 것을 당부하고 1945년 11월 22일에 부산을 떠났다. 그 중 유리원판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서울의 대학들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 소장자가 1953년 성균관대학교에 매각하였고, 1958년에는 사학과로, 1968년에 박물관으로 이관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진 8) 성균관대학교 박물관 유리원판의 현재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