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촌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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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10 – 촌뜨기

도시와 농촌, 또는 서울과 시골이 사람의 거주공간을 구별하여 부르는 용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이 용어는 분명 ‘공간’을 지칭하는 데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을 그림씨로 바꾸는 순간, 이는 공간뿐 아니라 양식(樣式)을 지칭하는 말이 되고, 나아가서는 4차원의 서로 다른 ‘시간대(時間帶)’를 지칭하는 개념으로까지 확장되어 버린다. 얼마전 어떤 여성복 광고에서 “도시적 분위기의 세련된 스타일”이라는 카피를 본 일이 있다. 이 카피에서 앞의 여섯 자와 뒤의 여섯 자는 완전히 같은 뜻이다. “촌티가 물씬 풍기는 세련된 스타일”이라는 말은 생각할 수조차 없지 않은가. “도시적”이라는 말은 “세련된”, “현대적인”이라는 말과 동의어이고, 같은 맥락에서 “촌스럽다”는 말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이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도시와 농촌이 다른만큼 두 공간이 구성되는 “양식(樣式)”과 두 공간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에 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도시가 발생한 이후로, 도시와 농촌의 ‘양식상의 차이’는 항상 존재해 왔다.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도시는 ‘문명을 집적하는 저장소’였고, 그 집적의 성과는 일차적으로 장대(壯大)하고 미려(美麗)한 구조물들로 나타났다. 도시의 대규모 건조물들은 대체로 교아(巧雅)한 장식을 통해 풍부한 상징성을 갖추기 마련이었다. 신(神)의 권능이나 세속 권력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건조물들이 도시 내 주요 지점을 장악하였고, 이들 건조물은 자신을 두드러지게 표현할 수 있는 ‘장식’을 필요로 하였다. 장식성은 도시의 기본 구성요소였고, 도시 주민들 역시 일상적 시선(視線) 속에서 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가 아니라 보다 보면 익숙해지는 것이고, 그 친숙함이 바로 ‘문화’요 ‘성품’이 되는 것이다.

낙원동에서 본 삼성 서울타워. 도시 공간에서 랜드마크 구실을 하고 있는 대형 건물들은 모두 자신을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해 ‘장식’을 사용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대표주자 삼성을 상징하는 이 건물은 공간을 ‘낭비’함으로써 역설적인 장식성을 표현하고 있다. 이 건물은 그 자체로 ‘낭비’와 귀족적 소비가 동일시되는 현대 한국 자본주의의 상징물이다.

반면 농촌의 건조물들에서 ‘장식성’은 예외적으로만 나타날 뿐이었다. 그나마 극히 투박하고 소략하여 ‘상징성’ 말고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장식’들이 농촌 장식의 일반적 특징이었다. 문화재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도 불상이나 불탑, 범종 등의 ‘양식(樣式)’만을 보고도 서울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지방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시대에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깜깜하더라도 말이다. 농촌은 생산하는 공간이되 축적하는 공간은 아니었고, 권력이 지배하는 공간이되 권력을 낳는 공간은 아니었다. 그탓에 농촌에 세워지는 건조물들은 대개 장식성을 아예 무시하거나 최소화한 채 기능성을 압도적으로 강조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 곳에서도 역시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느끼고 행동했다. 도시는 화려했고 농촌은 질박(質朴)했으니,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도 주변 경관을 닮아갔다. 도시 사람은 꾸밈이 많고 교활한 반면, 농촌 사람은 투박하되 순수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가 언제나 “시간적 격차”로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도시가 농촌을 방치해 둔 채 일방적으로 문명을 집적해 나가기는 하였지만, 그 변화의 속도는 사람들이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렸다. 그 탓에 한가지 양식이 수백년 동안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이었다. 이를테면 유럽 도시들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의 세 가지 건축, 미술 양식만으로 1,000년을 버텨 왔다. 수많은 실험적 양식의 건축물들이 여기저기에 속속 들어서는 오늘날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 – 세계 어느곳의 도시이건 – 의 눈으로 볼 때에는 과거의 도시 역시 발전이 지체된 공간에 불과하다. 도시에서조차 변화는 아직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전근대의 도시와 농촌은 양식상에서만 구분되었을 뿐, 서로 다른 시간대에 위치한 공간은 아니었다. 그들 간의 차이에 ‘시간대’가 포함된 것은 근대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17세기 나가사키의 난관(蘭館)을 드나들던 네덜란드 상인들은 수십년이 흘러도 결코 변하는 법이 없는 일본인들의 옷 모양새를 비웃었다. 15세기말 지리상의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재화(財貨)는 유럽의 부를 급속히 늘렸고, 그를 발판으로 유럽은 거의 독립적으로 전개되던 4대 섬유 문명 – 고대의 4대 문명권은 섬유에서도 각각 견(絹), 면(綿), 모(毛), 마(麻)를 특징적으로 발달시켜 왔다 – 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17세기 세계 경제의 수도 구실을 하고 있던 암스텔담은 이미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의복을 통해 지위를 표현하던 고대 이래의 ‘전통’은 부르주아지 주도하에 ‘사치스러운 유행’으로 재창조되었다. 변화를 일상 속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네덜란드 부르주아지들이 볼 때, 일본인들은 아직껏 중세의 그늘 속에 살고 있는 유럽 농민들과 유사한 존재, ‘촌티 나는’ 존재였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인들에게도 네덜란드인들의 ‘변덕’을 조롱할 권리는 있었다. 일본인들이 보기에 양자의 차이는 성향 – 변덕과 지조, 사치와 절검 – 에 있었을 뿐 ‘시간대’에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 대립적 균형이 이윽고 무너지기 시작했음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조선왕조 초기의 서울은 우리나라 역대의 어떤 수도보다도 문화적 폐쇄성이 적었다. 특정 부족집단이나 호족세력이 자기 근거지를 그대로 수도(首都)로 삼았던 관행 – 고구려와 백제가 천도(遷都) 이후 새 도읍지의 주민을 어떻게 재편성하고 지방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설정했는지에 대해서는 과문한 탓에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삼가 가르침을 구한다 – 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왕조가 서울을 새 도읍지로 정하고 그 곳에서 지배층과 도시 주민을 재구성한 방식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개경의 옛 귀족 상당수가 자의로 또는 타의로 지배층 대열에서 이탈하였고 다수의 시골 출신자들이 새 도시의 새 주인이 되었다. 복제(服制)도 바뀌었고, 일상 언어도 분명 재구성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유의 변화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도 세종대에는 방금 만들어진 한글 발음의 표준을 따르기 어려운 서울 사람들이 많았을 게다. 그 때에도 ‘經濟’를 ‘겡졔“로 발음하는 사람이 있었을 터이고, ’머꼬‘와 ’무시기‘를 두고 다투는 사람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요즘처럼 ’표준말‘이 정해져 있지는 않았으니, 그를 부끄러워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도시 서울의 문화적 특질이 형성되기까지에는 다양한 언어와 다양한 습속이 뒤섞여 새로운 문화로 정형화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왕조 초기 서울은 여러 방면으로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 사람과 지방 문화의 유입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과거제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고, 왕조 중기에 접어들면서는 시골에 은둔해 있던 사림의 정치적 진출도 본격화하였다. 반면 새로 들어오는 자들 만큼이나 서울에서 물러나는 사람도 많았다. 세상에 도가 있으면 출사(出仕)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은거(隱居)하는 것 –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 은 공자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이 가르침은 배척당해 물러나는 자들에게 서울에서 쫓겨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게끔 해 주었다.

소쇄원. 기묘사화 이후 낙향한 조광조의 문인 양산보가 담댱에 지은 원림(園林)이다. 조선 중엽만 해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고향(故鄕)에 장원을 짓고 나라에 도가 없음을 탓하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을 ‘시골뜨기’라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왕조 초기에는 새로 벼슬을 얻어 입경하는 자와 그를 따라 온 가솔과 노복들이 분주히 새 집을 알아보는 동안, 벼슬을 그만둔 관리를 따라 낙향(落鄕)하는 무리가 이삿짐을 싸는 알아 매일같이 되풀이되었을 것이다. 시골 사람이라고 해서 평생 시골에서 ’썩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서울 사람이라고 해서 세세손손 서울 사람으로 남으라는 보장도 없었다. 경관(京官) 중에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과 시골은 결코 바뀔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서울 사람과 시골 사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존재였다. 이 때에도 시골 사람을 향인(鄕人)이라 하여 서울 사람과 구별해 부르기는 하였지만, 그들을 ’촌티‘가 뼈속까지 배어 교정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취급하지는 않았다. 향인(鄕人)이란 단지 ’아직‘ 현달한 직질을 갖지 못한 자들, 다소 어리숙하지만 순박한 사람들 – 이런 사람들도 서울에 몇 달만 머물면 금새 영악해진다 – 정도의 의미로 쓰였다. 지배체제가 안정되는 조선 중엽이 되면 새로 벼슬길에 나온 시골 선비들을 ’조정의 예절도 모르고 사체(事體)에도 어긋난다‘고 비웃는 일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모르는 것은 배우면 그만이었다. 향인(鄕人)도 기회만 닿으면 얼마든지 경인(京人)이 될 수 있었고, 경인(京人)도 언제든지 낙향(落鄕)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살아야 했다. 아니 오히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재상(宰相)이라 하더라도 죽음을 앞두고서는 고향(故鄕)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관료들이 ’부모 봉양‘을 핑계대고 낙향 = 피신하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시골 사람이 서울에 자리잡기가 갈수록 어려워져 갔고, 서울 사람이 아주 낙향(落鄕)하는 일도 드물어졌다. 18세기 이후 서울이 지방으로부터 빨아들이는 재화의 양은 크게 늘어났지만, 그에 반비례하여 인재를 끌어들이는 규모는 축소되었다. 이제 부(富)의 원천은 더 이상 농토(農土)에 국한되지 않았다. 상업적 이익은 그보다 더 빨리, 더 대규모로 부를 집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귀거래(歸去來) 귀거래혜(歸去來兮)’를 읊으며 낙향(落鄕)하여 산수(山水)를 벗삼는다는 생각은 낭만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서울에 남아 계속 부(富)를 거머 쥐어야 했다. 경향(京鄕) 간의 통로는 빠르게 폐색(閉塞)되어 갔으며, 서울 양반들은 경화거족(京華巨族)이 되어 권력과 부, 사회적 지위를 세습적으로 독점했다.

노론이니 소론이니 남인이니 하여 학연으로 혼맥으로 끼리끼리 뭉친 서울의 대관(大官) 나으리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자식들에게 물려 주기 위해 못하는 일이 없었고 안하는 짓이 없었다. 특히 시골의 인재를 뽑아 올리는 빨판 구실을 해 왔던 과거제가 심각하게 망가졌다. 시험문제 빼돌리기, 답안지에 표시하기, 대리시험이 광범위하게 자행되었다. 그러나 부정과 불법에는 어쨌든 위험이 따랐다. 합법적이고 정당한 방법이 필요했다. 17세기 중반부터 서울 문체와 시골 문체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의 경화자제들은 시골 유생들이 배우기 어려운 새로운 문체를 배웠고, 출제자들은 그에 합당한 문제를 내었다 – 서울 선비들은 사륙문(四六文)을 익혔으나 시골 선비는 그를 제대로 못했다 – . 이렇게 해서 경화거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 주었고, 그럼으로써 자기들만의 서울,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어 갔다. 정교하게 고안된 과거(科擧)와 전고(銓考)의 여과장치를 거치면서 ‘명가의

자제는 날 때부터 다르다’는 환상이 퍼져 나갈 공간도 넓어졌다.

 

 

모당평생도 중 한 폭. 조선 후기에는 서울내기, 그 중에서도 북촌내기들이 평생을 서울에 눌러 앉아 권력과 부를 세습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조선 후기 세도가문의 대표격이었던 안동 김씨는 본관인 안동(安東) 보다도 그 집거지인 서울 장동(長洞)으로 더 유명했고, 그 탓에 약칭으로 장김(長金)이라 불리웠다. 오늘날 대치동이나 청담동쯤 되면 장동(長洞)에 비할 수 있을런지.

경화거족(京華巨族)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사치스러운 유행을 만들어 감에 따라 서울과 시골 사이에 ‘시간적’ 장벽이 덧씌워졌다. 조선 후기부터 향인(鄕人)을 대신하여 향암(鄕闇, 또는 鄕暗)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시골 사람은 예절과 사체(事體)를 모를 뿐 아니라 시세(時勢) – 시간의 흐름이요 세월의 변화이니, 그 자체가 시간이다 – 에도 어두운 자들로 취급되었다. 서울 사람들에게 시골 사람은 옷차림과 행동거지뿐 아니라 말투에서도, 심지어 외모에서까지도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을 갖는 ‘타자(他者)’들, 과거의 사람들이 되었다. 시골에 사는 사람들만 조롱거리가 된 것이 아니었다. 어렵게 과거의 관문을 뚫고 새로 도성민의 자격을 얻은 사람들에게도 시골 뜨기 – 향산(鄕産), 향생(鄕生) – 라는 딱지가 붙었다.

요즘도 시골 사람처럼 보이는 자들을 흔히 시골뜨기, 촌뜨기라고 한다. 시골내기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잘 쓰지 않는다. 반면 서울 사람을 서울내기라고는 해도 서울뜨기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서울뜨기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되 이미 사어(死語)가 된 지 오래이다. ‘내기’는 출생지를 표시하는 것이요, ‘뜨기’는 출신지(出身地))를 표시하는 것이다. 경향(京鄕) 간에 왕래하면서 정처(定處)를 찾지 못하는 자들, 어디서 났는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할 수 없는 자들을 ‘뜨내기’라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아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자’ – 서울내기 – 와 시골에서 올라온 자 – 시골뜨기 – 는 급이 다른 인간들이었다. 시골 사람은 서울에 들어오더라도 온전한 서울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시골뜨기는 시세(時勢)에 뒤쳐진 ‘과거의 인간’들이었다. 한 공간 아래 다른 시간대에 사는 사람들이 병존하게 되었다.

이제 각 지방의 인재와 문화를 용해하여 새로운 서울 사람, 새로운 서울 문화를 만들던 국초의 활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경화(京華) 벌열로 누대에 걸쳐 권세를 누려온 자들만이 ‘서울내기’ – 경종(京種) – 로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다. 경아전(京衙前)이나 군교(軍校)와 같은 미관말직에 있는 자들도 ‘서울에 와서 동서남북도 구분 못하는’ 시골 출신 벼슬아치들을 우습게 보았다. 벼슬 못지 않게 출생지 – 출신지가 아니라 – 가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벼슬의 고하와 무관하게 시골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일반화되었다. 고종 초년에는 일개 군관이 이웃집에 이사 온 시골 출신 예조좌랑을 일삼아 멸시하다가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어났다. 물론 하극상의 죄를 범한 군관은 처벌받았지만, 처신을 잘못하여 아랫사람의 웃음거리가 된 시골 출신 벼슬아치도 함께 목이 잘렸다.

공간적으로는 도성 문만 나서면 바로 시골이었지만, 사람들이 느끼는 도성과 시골의 정서적 거리는 갈수록 멀어졌고, 시골은 끝내 장막 저편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무엇이든 시야(視野)에서 사라지면 신비로워지는 법이다. 먼저 왕이 안절부절하기 시작했다. ‘당상(堂上) 이상과 삼사(三司)의 반열에 시골 출신이 없다’는 점이 불안한 현실로 인지된 것은 이미 현종대의 일이었는데, 영조대에 이르면 아예 과거 합격자에 시골 출신이 가뭄에 콩나듯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영조는 과거 시험에서 시골 출신 할당제 – 인일제, 삼일제, 칠석제 등의 시험에서는 반드시 시골출신과 서울출신을 따로 전형(銓衡)하여 각각 1인씩을 장원(壯元)으로 뽑고 전시(殿試)에 직부(直赴)케 하였다 – 까지 시행하면서 시골 선비들을 끌어 올리려 애썼고, 도성 나들이라도 하게 되면 반드시 시골에서 올라온 자들을 불러 들여 시골 형편을 직접 들었다. 이는 물론 왕 자신의 정치적 지반을 다지려는 뜻에 말미암은 것이었지만, 그 한켠에서는 시골 구석 어딘가에는 반드시 개세지재(蓋世之才)를 지닌 큰 인물이 있을 것이라는 신비주의적 사고도 작용했을 것이다.

궁벽한 시골 구석 어딘가에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위대한 도학자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산림처사(山林處士)에 대한 막연한 숭앙(崇仰)을 낳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차피 되지도 않을 과거에 매달리느니 산림처사를 자처하면서 공부나 열심히 하여 후일을 기약하려는 시골 선비도 늘어났다. 이들 중에는 아예 세상을 뒤바꿔 버릴 꿈을 꾸는 자들도 있었다. 더불어 성(聖)과 속(俗)으로 구분되었던 도시와 농촌의 관계도 점차 역전(逆轉)되어 갔다. 서울은 도의도 염치도 팽개쳐버린 탐욕스러운 무리들이 권세(權勢)와 부(富)를 얻기 위해 악다구니를 벌이는 혼탁한 공간이요, 농촌은 세속에 대한 욕심을 끊은 청정(淸淨)한 도학자들이 사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경화거족(京華巨族)이라고 해서 내내 서울에만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도 나이가 들어 은퇴하거나 병이들면, 또는 일시적으로 피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바로 시골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찾아 내려간 시골은 연고지일망정 고향은 아니었다. 또 그들이 찾은 시골은 ‘생활과 결합된 공간’이 아니라 ‘이미지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그들에게 시골은 수려한 산수를 벗삼아 낚시나 즐기고 술이나 마시면서 유유자적 세월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일 뿐이었다. 그곳에서는 노동할 이유도, 심지어 노동을 감독할 필요도 없었다. 유럽의 도시 부르주아지들이 귀족 영주들의 생활을 부러워한 나머지 ‘전원(田園)’을 창조한 것과는 달리, 조선의 귀족들은 무릉도원(武陵桃源)에 관한 오래된 설화를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직접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양에서나 조선에서나 전원(田園)의 이미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조는 ‘우로(雨露)는 땅을 가리지 않는데 인재를 취하는 일에 어찌 경향(京鄕)을 가리는가’라고 꾸짖었고, 정조는 ‘급제를 차지하는 자들은 모두 남산(南山)과 북악(北岳) 사이에 사는 집안 자제들 뿐’인 현실을 통탄했다. 경화거족들이 끼리끼리 출제자도 되고 감독관도 되고 응시생도 되는 현실에까지 손을 댈 수는 없었지만, 서울 선비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출제되는 과거는 고쳐 보고자 했다. 인재를 끌어들이는 통로가 막혀 버리면 나라가 쇠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왕은 자기 나라를 위해 그 길을 넓혀 보고자 했지만, 경화벌열은 자기 가문을 위해 그 길을 막아 두고자 했다. 영조와 정조가 최근 서울대에서 시행하기로 한 통합형 논술시험안을 보았다면 아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강과 청계산 사이에 사는 집안 자제’들만 인재로 취급되는 세상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