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제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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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34 – 제중원

전우용(근대사 2분과)

  가끔씩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여럿이 모여 떠드는 ‘여중생’들을 볼 때가 있다. 내 아들 또래의 아이들이니만큼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막상 그 아이들이 내뱉는 욕설 섞인 말을 듣고 나면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곤 한다. 저 아이들은 자기가 하는 욕설의 참 뜻을 모르겠거니 하고 넘어가려 해도, 이미 그 뜻이 내 머리 속에 박혀 들어온 바에는 공연히 그 아이들의 부모를 ‘걱정’하게 된다.

  사춘기 사내 아이들이 거친 욕설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야 ‘공격성’의 과잉 표출이 곧 ‘사내다움’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수만년 – 혹은 수십만년 – 된 착각의 발로라고 하겠지만, 여자 아이들이 욕설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 현상이 남녀 차별의 완화와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욕설’이 그동안 단순, 과격, 압축화의 길을 걸어온 것과는 분명히 연관되어 있다.

  옛날에는 욕설에도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걸맞는 등급이 있었다. 자기에게만 잘못한 사람과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을 저지른 사람의 ‘죄 질’은 분명 다르다. 절도와 강도, 살인죄를 일률(一律)로 다스릴 수 없듯이 ‘오라질 놈’과 ‘염병할 놈’도 구별해서 써야 했다.

  욕설을 범주화하면 ‘모욕형’과 ‘저주형’으로 나뉜다. 모욕형은 상대방의 인격을 깎아내리기 위해 출생 내력을 모욕하거나 – 개자식, 후레자식 등 -, 불구자로 취급하거나 – 병신 ××하네 등 -, 패륜아로 몰거나 – 제기×, 제미× 등 – 하는 유형이며, 저주형은 국가나 신(神)이 상대방에게 벌(罰)을 내리길 비는 유형이다.

  ‘오라질’ – 오랏줄에 묶일 – , ‘경을 칠’ – 얼굴에 자자형(刺字刑)을 당할 – , ‘육시랄’ – 육시형(戮屍刑)을 당할 – 등이 국법(國法)에 저촉되도록 저주하는 것이라면, ‘벼락맞을’이나 ‘염병할’, ‘곱게 죽지 못할’ 등은 천벌(天罰)을 ‘비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모욕형’ 욕설이 더 자주, 더 심한 욕설로 사용되고, ‘저주형’ 욕설은 다소 ‘고졸하고’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되지만, 뜻을 알고서야 그리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의미상으로 본다면 모욕보다 저주가 더 지독하지 않은가.


사진 1) 치료를 위한 주술(呪術). 두통을 유발하는 악귀(惡鬼)를 쫓기 위해 사람을 그려 놓고 머리 부위에 낫을 꽂아 두었다. 의사가 드물기도 했지만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주술은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사용되었다. 조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는 고급 주술에 의존했다.

  저주는 대개 형벌이나 질병에 결부되어 있는데, 염병이나 나병, 오늘날의 AIDS같이 지독하면서도 고칠 방법이 없는 질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하듯이, 욕설에서는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두지 않는다. 형벌과 관련된 저주가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들리는 것은 왕법(王法)에 걸리는 것보다는 천벌(天罰)을 받는 것이 한 두 등급 높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저주 중에서도 가장 심한 저주는 주로 염병(染病) – 전염병, 특히 장티푸스 – 과 관련되어 있었다. 단순히 ‘염병할 놈’에서부터 ‘염병에 까마귀 소리를 들을 놈’, ‘염병에 땀을 못낼 놈’, ‘염병막 살이 삼년에 똥물 한 바가지 못얻어 먹을 놈’ 등 염병과 관련된 저주는 무척 많았다. 세균설이 보편화하기 전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염병을 ‘천벌’ 그 자체로 이해했다.

  “호환 마마 보다 더 무섭다”는 말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콜레라(= 호환)와 두창(= 손님, 마마, 천연두)을 더 무서워 했던 것 같기도 한데, 굳이 염병을 든 이유는 알 수 없다. 호환은 19세기에 처음 전래된 전염병이고 마마는 이름 그대로 ‘마마’ – 존귀한 존재에 대한 높임말 – 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벌은 죄에 대한 응보(應報)이니, 염병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였고 – 현세에 죄를 짓지 않은 자라고 해서 전생에 죄가 없었으리란 법은 없다. 때로는 왕이 지은 죄를 일반 백성에게 묻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 범인(凡人)으로서는 그 벌을 피할 도리가 없었다.

  치명적인 전염병에만 천벌(天罰 = 죄의 대가)이라는 이미지가 붙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사소한 질병도 대개는 죄와 관련된 것으로 이해해 왔다. 나태, 불결, 음란, 탐욕, 흡연, 음주 등 개인의 악덕 – 이런 것들은 대개 법적 단죄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적․종교적 비난의 대상이었다 – 은 신체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기보다는 신의 뜻에 위배되기 때문에 나쁜 것이었다.

  그 때문에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병자와 죄수(罪囚)를 같은 부류로 취급했다. 이 부당한 동일시(同一視)는 비단 우리나라에만, 또 근대 이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동안 명절이면 재탕 삼탕 방영되던 ‘마스터피스 영화’ 중에 “빠삐용”(1973)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본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지만 당시 ‘흑백’ TV를 통해 본 죄수들의 모습은 여전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특히 흰색 바탕에 세로줄 무늬를 넣은 죄수복은 요즈음의 ‘환자복’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해서 그 때 이미 궁금증의 대상이었다.

  당시 나는 ‘죄 지은 사람’과 ‘아픈 사람’ 사이에서 아무런 유사성도 찾을 수 없었기에, 왜 그들의 복장이 같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내 궁금증은 몇년 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7)라는 영화를 보고 나서 다소 풀렸다.
이 영화에서 교도소와 정신병원은 상호 전환 가능한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두 영화에서 교도소 간수와 정신병원 간호사가 하는 일은 대략 같았고, ‘죄수’와 ‘정신병자’를 가르는 기준도 극히 모호했다. 오늘날에도 흉악범을 교도소로 보낼 지 정신병원으로 보낼 지를 결정하는 것은 판사와 의사이다.

  죄수와 환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보통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사람들이며, 일상적인 ‘타인의 감시’ 아래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고, 그들 자신에 관한 기록이 ‘체계적으로’ 작성, 정리, 보관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강압에 의해서든 자발적으로든 자신의 하루 일과를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빠짐없이 ‘관찰자’에게 보고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사생활’이 없다. ‘관찰자들’은 ‘수용자’ – 수감자든 입원환자든 – 들에게 그날 아침, 혹은 전날 저녁에 무엇을 얼마나 먹었는지, 운동은 얼마나 했는지, 몸상태는 어떤지, 가정환경은 어떤지, 부모나 가까운 친척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 혹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 심지어 내밀한 부부관계에 이르기까지 ‘보통의 사회관계’에서라면 도저히 물을 수 없는 것들을 캐묻고 수용자들은 스스럼없이 그에 대답한다. ‘질문과 대답, 관찰과 보고’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기록’되고 그 기록은 다시 이들 시설에 수용해야 할 ‘일군(一群)의 사람들’을 식별해 내는 계량적(計量的) 지표로 사용된다.

  죄수들은 강절도, 폭행, 사기, 성범죄, 방화 등 범죄 유형별로 분류되고 또 그 죄질(罪質)에 따라 일정한 ‘형량(刑量)’을 선고받는다. 환자들 역시 이환(罹患)된 질병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입원 치료 기간과 치료 방법이 정해진다.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내릴 경우 ‘사형선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교정이 불가능한’ 범죄자와 불치병 환자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직관적 판단에 근거한 것이다.


사진 2) 호구씨. 두창 귀신이다. 호귀마마(胡鬼媽媽)라고도 한다. 아이를 잡아 가는 두창 귀신은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마마’나 ‘손님’으로 불렸다. 사람들은 손님이 찾아오는 일을 막을 수는 없지만 잘 대접해 보내면 큰 화는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종두법이 도입되기 전까지, 무당이 주재하는 ‘마마 배송굿’은 두창의 거의 유일한 치료법이었다. 

  병 걸린 자와 벌 받는 자를 같은 범주로 묶어 보는 관행은 의학 지식이 ‘지배’하는 오늘날까지도 끈질기게 지속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애꾸눈이, 귀머거리, 벙어리, 언청이, 곰배팔이, 앉은뱅이, 절름발이, 곱사등이, 문둥이 등 모든 병자와 장애인을 천시(賤視)․멸시(蔑視)하면서도 유독 시각 장애인에게만은 ‘님’자를 붙여 ‘장님’ – 지팡이 짚고 다니는 님 – 이라고 부르거나 그것도 모자라 소경(少卿)이니 봉사(奉事)니 하는 벼슬까지 붙여 주었다.

  시각장애인을 특별히 ‘우대’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시각 장애가 다른 장애와는 달리 주로 장년기 이후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 어른으로 공경하던 사람이 갑자기 앞을 못보게 되었다고 해서 낮추어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둘째로 – 아마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일텐데 – 육신의 눈이 감기면 마음의 눈이 열린다는 오래된 믿음이 작용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눈 감은 상태에서 보이는 형상 – 꿈 – 이 예시(豫示)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눈 감은 채로 사는 사람들은 ‘신의 계시’를 더 잘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세째로 우리나라에는 시각장애인이 주로 하는 일이 관직(官職) 체계 안에도 들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소경은 점복(占卜)을 담당하는 관리였고, 조선시대의 봉사는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등 ‘삼의사(三醫司)’에 소속된 의원(醫員)이었다.

  장님을 봉사로 높여 부른 의식의 밑바닥에는 무(巫)와 의(醫)가 본래 하나였던 ‘먼 옛날’에 대한 기억이 자리잡고 있었을 터이다. 의(醫)의 옛 글자는 ‘의(毉)’인데, 이는 등에는 활통을 매고 손에는 창을 든 무당을 표시한 것이다. 이 글자가 ‘의(醫)’로 바뀐 것은 주술(呪術) 대신에 약(藥) – 유(酉)는 술, 또는 나무나 과일의 진액(津液)을 의미한다 – 만을 쓰는 치료법이 정립(定立)된 뒤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질병이 ‘죄의 대가’라는 생각이 뿌리 깊게 남아 있는 한, 의사와 무당(=신관(神官))이 전혀 다른 존재로 취급되지는 않았다. 또 병이 한 가지 이유로만 생기는 것도 아닌만큼, 그를 치료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었다. 의학이 다른 방법들을 굴복시키고 ‘유일한’ 과학적 치료법의 자리를 얻은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자의 병(病)과 질(疾), 환(患)은 오늘날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처음에는 서로 다른 질병 – 질환이라 해도 좋고 병환이라 해도 좋다 – 을 지칭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 언어에서도 병은 ‘들고 나는’ 것이거나 ‘걸렸다 풀렸다’ 하는 것이거나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드는’ 병은 몸 밖의 악귀 – 병마(病魔)라 해도 좋고 병독(病毒)이라 해도 좋다 – 가 들어오는 병이요, ‘걸리는’ 병은 자신이 처신을 잘 못 해서 – ‘죄’에 걸리듯이 – 걸려든 병이고, 생기는 병은 몸 안에서 ‘저절로’ 만들어지는 병이다.

  근대 의학이 정립되는 과정에서 질병의 정체와 원인을 둘러싸고 세계 여러 곳에서 여러 차례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지만, 결국 오래된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정의(定義)가 이겼다. 병은 드는 것이기도 하고 걸리는 것이기도 하며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병을 가리키는 순 우리말로 ‘탈’이 있다. ‘탈’은 가면(假面)을 뜻하기도 한다. 신라 사람들이 만들어 썼다고 하는 처용 ‘탈’은 역신(疫神) – 역병 귀신 – 을 쫓는 구실을 했다. 탈이 ‘사고’, ‘고장’이라는 뜻으로도 쓰이는 것으로 보아 ‘탈 나는 것’은 본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탈 쓰는 것은 본 모습을 감추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이 경우에는 드는 것과 걸리는 것, 생기는 것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겠지만, 오히려 이런 미분화된 언어가 질병 치유와 ‘속죄(贖罪)’ 사이의 관계를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고대에는 속죄의 의식(儀式)과 치료의 의식은 같았다. 심지어 현대에도 ‘치유의 기적’을 과시하는 ‘신(神)의 사도(司徒)들’이 적지 않은데 그들이 사용하는 ‘기적의 치유법’은 종종 ‘처벌’이나 ‘고문’과 구별되지 않는다. 의식이 같은데 그 장소와 주재자가 다를 이유는 없었다. 치료와 속죄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신전(神殿)이었고, 신전을 품어 안고 있는 공간은 도시였다.

  독실한 라마교 신자들은 라싸를 향해 오체투지(五體投地)로 삼보일배(三步一拜)를 되풀이 하면서 수천 km를 간다. 이슬람 신자들은 매일 같이 메카를 향해 경배를 드린다. ‘신에게 바친 땅’ 도시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 모두를 정화(淨化)하고 치유하는 공간이었다. 어쨌든 신(神)도 도시에 가야 만날 수 있다. 의학이 주술과 결별한 이후에도 의사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의 수도가 된 서울에는 의사는 새로 들어왔지만 무당은 쫓겨났다.

  내 어머니는 지금도 아픈 갓난쟁이를 들쳐 업고 큰 마을 한약방을 찾아 캄캄한 밤 길 15리를 허겁지겁 달렸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다. 그 때까지만 해도 병원은 아주 멀리 떨어진 읍내(邑內)에나 있었다.

  병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지만, 그를 치료하는 일에는 언제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따른다. 통행에 최우선권을 보장받는 앰뷸런스는 그 제약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차에 동승한 환자 보호자들도 가끔씩 ‘너무 늦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의학적 치료는 도시에서나 가능했고(하고), 시골은 주술과 ‘경험방(經驗方)’의 땅, 기껏해야 ‘돌팔이’ – 돌아다니며 물건이나 기예를 파는 사람, 그래서 그 물건과 기예를 믿을 수 없는 사람 – 의사가 간간이 출몰하는 땅으로 남아 있었다.


사진 3) 종두침과 두장판. 비록 졸렬해 보이는 도구이지만, 이 도구가 수많은 어린 생명을 구하고 얼굴 얽는 것을 막아 주었다. 종두 보급과 더불어 큰 병도 사람이 막을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세균이 ‘발견’되고 그를 퇴치하는 방법이 개발된 이후, 한동안 의학이 모든 병을 이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널리 유포되었는데, 이 희망은 종교적 열정을 상당 부분 대체하였다.

  조선 왕조 개창 직후, 서울에 내약방, 전의감, 혜민국, 동서대비원, 제생원 등 여러 개의 국립 의료기관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정(仁政)을 표방한 조선 왕조조차 인술(仁術) = 의술(醫術)을 펴는 시설은 서울에만 만들어 놓았다.

  내약방은 궁궐 안에, 전의감은 궁궐 가까이에, 혜민국은 도성 안 궁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대비원은 도성 밖에 있었다. 서울 안에서도 의술의 수준은 궁궐에 가까울 수록 높았다. 그 얼마 뒤 내약방은 내의원으로, 혜민국은 혜민서로, 대비원은 활인서로 바뀌었고 제생원은 혜민서에 통합되었다.

  내의원이나 전의감은 그 기능과 대상을 떠나 이름 자체가 드라이하지만, 대비(大悲)니 제생(濟生)이니 하는 이름은 그 안에 이미 종교적 색채가 짙게 배어 있었다. 대비원을 활인서로 개칭하고 제생원을 혜민서에 통합한 것은 ‘속죄와 치유’의 권능이 부처가 아닌 왕에게로 옮겨 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국립 의료기관들의 이름에서 한 가지 더 주의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조선시대의 관서(官署)들은 기능과 위상, 등급과 위치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나뉘었다. 중국 관서의 이름을 딴 것도 있고, 옛 왕조의 관행을 승계한 것도 있어서 이름만으로 관서의 등급과 성격을 구분할 수는 없다. 혹시 이런 걸 연구한 사람이 있을까 해서 여기저기 찾아 봤지만, 관련 연구는 없었다. 무모한 감은 있지만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을 뒤적여 나름대로 추정할 밖에.

  전의감의 감(監)은 그냥 책임을 맡았다는 뜻이고, 혜민서․활인서의 서(署)는 대체로 단독 건물이다. 이런 이름은 오늘날에도 소방서(消防署), 세무서(稅務署) 등으로 남아 있다. 원(院)은 담장(垣)에 둘러싸인 건물(군)을 말한다. 그래서 승정원․사간원 같은 관서, 홍제원․이태원 같은 국립 여관 – 역시 관서이지만 – , 서원․사원 같은 사설 종교․교육 시설 등 ‘원’자가 붙은 시설은 모두 담장을 가진 건물(군)이다.

  담장은 격리의 표징이다. 담장은 외부와 내부를 구분하고, 사람의 출입을 제한하며, 담장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부의 규칙에 따르도록 하는 장치이다. 따라서 혜민국(서)과 제생원은 모두 백성에게 왕의 은혜를 베푸는 시혜적인 국립 의료기관이었지만 이름이 달랐던 만큼 시설의 형식과 기능도 달랐다.


사진 4) 두창예방 표어 당선작. 1923년 동아일보. 1등작은 “죽을래 얽을래 종두를 할래”, 2등작은 “백번 기도가 한 번 우두만 못하다”, 3등작은 “곰보는 문명의 수치”였다. 1등작은 얼핏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연상시킨다. “백번 기도”보다 나은 근대의학은 “문명”과 단단히 결합되었으면서도 그 전파를 위해서는 종교 포교와 흡사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다만 이 “세속의 신학(神學)”은 “천상(天上)의 신학(神學)”보다 효과가 더 직접적이고 가시적이었기 때문에, 곧바로 모든 현대인의 신체와 동작을 지배할 수 있었다.

  태조 6(1397)년에 설치된 제생원은 처음 의학 서적 편찬을 맡았으나 태종 5(1405)년 ‘연고 없는’ 환자를 수용하는 시설로 바뀌었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도성 조영을 위한 토목공사가 끊일 새 없었다. 공사가 많다보니 ‘산업 재해’도 빈번했는데, 다친 일꾼들은 거의가 지방에서 올라 온 장정(壯丁)들이었다. 이들은 서울에 이렇다 할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제생원은 주로 이들을 수용하여 돌보기 위한 시설이었다. 도성 조영 공사가 마무리된 뒤인 세조 2(1456)년 제생원을 없앤 것도 이 무렵에는 이미 ‘수용 치료’할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격리 수용과 처치, 관찰이라는 근대의학적 – 이는 분리 추출과 실험, 관찰이라는 근대 과학의 일반적 방법론과 동일하다 – 치료 방법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치료의 공간’은 주로 집이었지 병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의사는 많았으되 병원은 거의 없었다.

  알렉산드리아 같은 고대 도시에 잘 만들어진 병원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는 아마도 식민 도시에 특징적인 시설이었을 것이다. Hotel과 Hospital 모두 ‘객(客)’을 위한 시설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바, 유럽에서도 18세기 ‘대감금의 시대’를 겪고 난 뒤에야 제대로 된 병원이 출현했다.

  제생원 폐지 이후 서울에는 환자를 위한 수용 시설이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활인서(活人署)는 가난한 떠돌이들에게 죽이나 나눠 주는 일을 맡았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의사가 상주하면서 환자를 치료하는 시설 – 의원(醫院) – 이나 다수의 환자를 수용하여 치료하는 시설 – 병원(病院) – 이 도시의 핵심 시설로 등장한 것은 개항 이후였다.

  1877년, 일본군이 부산에 제생의원(濟生醫院)을 세웠다. Hospital은 Hotel – 둘 다 객(客)을 위한 시설이며 어원(語源)도 같다 – 과 더불어 왕도(王都) 서울이 아닌 다른 도시 – 19세기말 이후 개항장 외국인 거류지들은 왕도(王都)의 촉수였던 도호부(都護府)들을 제치고 근대 도시화의 길을 앞장 서 열었다 – 에 먼저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 시설이었다.

  이 병원에서 진료를 맡은 일본 군의(軍醫)는 조선인들에게도 근대의학의 ‘혜택’을 베풀었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의심이 적은 – 일본 의사의 신체 검사 제안을 받은 사람들은 이를 나라를 빼앗기 위해 미리 조선인들의 힘을 측정해 두려는 술책이라고 의심했다 – 조선인들을 ‘측정’하기도 했다.

  측정의 결과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 군의 고이케(小池正直)는 그가 측정한 조선인 남성 75인의 평균신장을 180cm로 기록했다. 이는 그가 측정한 일본인 남성 2,500명의 평균신장 158cm보다 20cm 이상 큰 수치였다. 상당히 황당한 수치이지만 당시 조선에 들어와 있던 일본인 의사들은 대개 이를 수긍했다. 그들은 이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도 덧붙였다.

  원산에 있던 기타지마(北島)는 ‘한인(韓人)은 체격이 강장(强壯)하여 아시아 인종 중 제1인데, 이는 육식(肉食)을 많이 하면서도 미개하여 정신을 쓰는 일이 적기 때문‘이라고 했고, 역시 원산의 고마츠(小松)은 ’한인(韓人)은 위생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약한 자는 어려서 모두 죽어버리고 건강한 자만 살아남기 때문‘이라고 했다.

  인천의 다나카는 ’한인의 체격은 구미인과 비슷한데, 인문(人文)의 개발에 따라 키가 작아진다는 증례(證例)가 있다면 한인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유독 서울에 있던 카이로세(海瀨)만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평균 신장이 비슷하다는 주장을 폈는데, 서울 사람들이 시골 사람보다 더 작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개항장의 일본인 의사들은 조선인들의 신체를 ’측정‘하고 그 결과를 ’해석‘ – 그들은 근대 의학의 방법으로 측정했으나, 비근대적․비의학적 방법으로 해석했다 – 했다. 사람들을 측정하고 그 평균치를 구하며, 그를 역사․문화․생활과 관련하여 종합적으로 해석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국가‘나 ’왕‘, ’사제‘들이 먼저 했던 일을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인 군의(軍醫)가 시작했다.


사진 5) 제중원. 1930년대 경기여고 기숙사로 사용되던 옛 제중원 건물. 제중원은 근대적 국립병원으로서는 작은 규모였지만, 국가가 서양 의학을 – 서양 종교가 아니라 – 공인(公認)하였음을 상징하는 시설이었다. 제중원 설치를 계기로 사람들은 떳떳하게 ‘서양근대의학’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신실한 ‘의학의 신도(信徒)’가 되었다.

  1885년 봄, 서울에 서양 근대 의학을 채용한 새로운 국립병원이 생겼다. 이에 앞서 조선 정부는 1882년말에 왕이 백성에게 베푸는 은혜를 상징하던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혁파하고 그를 전의감에 부속시켰다.

  얼마 후 전의감 건물도 비우고 사역원(司譯院) – 조선시대 의관(醫官)과 역관(譯官)은 같은 부류로 취급되었고, 자기들끼리도 그렇게 살았다. 사역원은 역관 양성 및 통역 사무를 담당하던 기관이다 – 안에 밀어 넣었다. 빈 전의감 건물은 우정국(郵政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이때에는 이미 서울에도 일본인 의사가 와 있었다. 또 1879년부터 시작된 우두 접종이 무당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보급되고 있었다. ‘의술이 정묘(精妙)하면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두려움을 잊고 싸운다’는 식의 서양 의학 도입론도 저변을 확대해 가는 중이었다.

  고종은 아마도 혜민서와 활인서를 혁파할 때부터 서양식 병원 – 치료 기능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통계 기능까지 갖춘 – 을 염두에 두었던 듯 하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돈’이었다. 마침 ‘공짜’로 의술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884년 일본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 맥클레이(McClay)는 김옥균을 통해 왕에게 서울에 병원을 내겠다는 제안을 전달했다.

  왕은 이 일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 얼마 후 김옥균이 정변(政變)을 일으킴으로써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 갔다. 공교롭게도 김옥균이 난을 일으킨 건물은 예전에 전의감이었던 우정국이었다. 그 건물에서 칼에 맞아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집으로 데려 온 묄렌도르프는 중국 선교사로 있다가 조선에 흘러 들어와 미국 공사관 부속의사로 있던 알렌(H. N. Allen)을 불렀다.

  알렌은 민영익을 고쳤고, 그 덕에 왕을 직접 만날 수 있었다. 왕은 서양식 병원에 대한 관심을 내비쳤고, 알렌은 병원만 만들면 ‘공짜’로 일할 사람들이 자기 말고도 더 있다고 했다. 이 만남의 결과 옛 제생원과 비슷한 이름의 제중원(濟衆院)이 만들어졌다.

  제생원을 혜민국에 합설한 지 400여년 만에, 서울에 다시 왕이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수용’하는 시설이 생겼다. 이 시설은 갑신정변 주모자의 한 사람이던 홍영식(洪英植)의 집을 개조한 것으로, 진찰실, 입원실, 대기실, 수술실, 약국이 갖추어져 있었다.

  제중원 개원에 앞서 통리아문은 서울 사대문과 종각에 방(榜)을 붙이고 나라에서 약값을 대는 병원이 생겼음을 알렸다. 또 이 병원에 초빙한 미국 의사가 외과(外科)에 장점이 있음을 특기(特記)했다.

  본래 제중(濟衆)이란 만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이지만, 제중원은 기본적으로 ‘빈천(貧賤)한 백성’의 구제에 중점을 두었다. ‘공짜’ 좋아하는 것이야 빈부귀천이 차이가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외과(外科) 질환을 ‘빈천자의 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정조(正祖) 때의 의관 강명길(康命吉)은 『제중신편(濟衆新編)』에 “부귀한 자의 병은 대개 속(本)에서 오고 빈천한 자의 병은 대개 겉(標)에서 온다”고 썼다. 17~18세기 유럽 도시를 특징지웠던 구빈원(救貧院) (= Poorhouse 또는 Workhouse)과 제중원(濟衆院)은 그 이름에서만은 같은 시설이었다.

  알렌은 제중원 개원 1년만에 만명 이상의 환자를 보았다고 기록했다. 한성주보의 ‘통계’는 그 수를 반 정도로 줄여 잡았다. 한 두 사람의 의사가, 조수나 간호사도 없이, 수술도 하고 조제도 하면서, 더구나 시도 때도 없이 궁중에 불려 가는 상황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환자를 하루 평균 30명 이상 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수많은 서울의 병자 – 꾀병 환자를 포함하여 – 들이 제중원을 찾은 것은 분명하다.

  당시 서울 성내 인구가 20만명 정도였음에 비추어 볼 때, 전체 도성민의 5% 가까이가 개원 1년 안에 제중원을 찾은 셈이다. 물론 개중에는 아픈 데도 없으면서 그저 ‘양귀(洋鬼)’나 한 번 볼 양으로 찾은 사람도 적지 않았을 터이지만.

  그러나 ‘강제로’ 제중원에 끌려 온 사람은 없었고, 그 안에서 ‘강제로’ 노동했던 사람도 없었다. 이름에서, 그리고 어쩌면 구상(構想)에서 제중원은 유럽의 구빈원과 비슷한 시설이었지만, 그것을 끌어안고 있는 ‘도시 공간’과 ‘도시민’의 구성이 달랐다. 서울에서 ‘놀고먹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아니었고, 아직은 도시 빈민에게 ‘시킬 일’도 별로 없었다.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았는지 나중에 멸실(滅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제중원 주사들이 작성한 통계 자료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알렌조차 몇몇 환자들의 수술과 치료 사례를 미국 선교본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올렸을 뿐인데, 이런 사업의 속성을 감안한다면 그 수치를 곧이 곧대로 믿을 수만도 없다.

  또 알렌도, 헤론도, 빈튼도, 에비슨도 조선 사람의 몸 보다는 ‘영혼’에 주된 관심을 기울였다. 여행가들, 외교관들, 장사꾼들 중에도 조선인들의 규격을 기록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제중원 의사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과학이 종교에서 분리되고 나아가 종교에 대해 승리를 선언한 뒤였지만, 선교사들이 조선에 가지고 들어온 의과학(醫科學)은 역설적으로 종교와 재결합한 것이었다.

  왕은 빈천한 백성들에게 자신의 은혜를 보여 주고 더불어 그들을 ‘근대적으로’ 관리하는 기술을 배우고 싶었겠지만, 선교사들은 왕의 은혜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고 싶어 했고, 조선 국왕의 신하가 아닌 주님의 사도(司徒)로 살고자 했다.

  조건도 나빴다. 제중원 개원 이듬해, 서양 의사의 외과술이 탐났던 모양인지, 원세개(袁世凱)는 제중원을 자기 공관(公館) 옆으로 끌고 가 버렸다. 1894년 고종이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을 때, 에비슨은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제중원 운영의 전권은 미국 선교부로 돌아갔고, 그들은 이 곳을 선교 기지로 만들었다.

  왕은 그 뒤에도 제중원을 자기 병원으로 생각했고, 선교사들도 공식적으로는 ‘왕립병원’이나 ‘정부병원’이라고 했지만, 그들에게 조선 국왕이나 정부는 자기들 ‘신의 의지’를 구현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다.

  대한제국 선포 후인 1899년, 정부는 다시 내부 산하에 ‘병원’을 설립했다. 후일 광제원(廣濟院)으로 개명된 이 시설이 우리나라의 국립 의료기관으로는 최초로 병원 명칭을 쓴 것이다. ‘병원’은 서양 의학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지만, 유럽 구빈원의 ‘방법’과는 연결되어 있었다.

  ‘병원’이 주로 관심을 기울인 대상은 빈민과 죄수들이었다. ‘병원’ 의사들은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한편으로 감옥서에 찾아가 죄수들을 보살폈다. 병원의 진료 실적은 매달 통계로 작성되어 ‘상부’에 보고되었다.

  일반 환자와 죄수들을 ‘함께’ 돌보았다는 점에서, 그러면서도 감옥서 진료, 양약 처방, 한약 처방을 구분하여 통계를 작성했다는 점에서, ‘병원’은 구빈원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병원 역시 환자와 죄수들의 ‘평균치’를 추출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사진 6) “광혜원터” 표석. 현 헌법재판소 안에 세워진 이 표석은 제중원을 “알렌이 고종황제의 윤허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제중원은 알렌이 설립한 것도,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도 아니다. 오늘날 박문국과 한성순보에서 이노우에 가꾸고로(井上角五郞)나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지만, 광혜원(제중원)하면 바로 알렌을 연상하는 사람은 무척 많다. 우리의 근현대사가 일본에는 너무 야박하고 미국에는 지나치게 후한 태도를 일반화시켰다 하더라도 이건 너무 심하다. 제중원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알렌의 건의를 받은 – 굳이 알렌의 이름을 넣고 싶을 경우에 – 고종의 지시에 따라 통리아문에서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이다.

  제중원도 ‘병원’도 사람에 관한 통계를 작성하는 ‘기계’로서는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병원은 그 안에 ‘수용된’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 아니다. 병원은 감옥과 더불어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친다.

  근대 이후의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한’ 처신법을 배우고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 개인위생과 신체규율을 배운다. 이 두 시설은 근대 사회가 만들어낸 ‘합리적 규율’ – 왕명이나 신의 뜻이 아니라 – 을 사회 전체에 확산시키는 핵심 기구이다.

  개항 이후 새로운 의학 지식에 접한 사람들은 병 – 염병이나 호열자, 마마조차도 – 이 악귀(惡鬼)의 저주와 무관함을 알게 되었다. 이제 의학 지식은 법률 지식과 더불어 ‘욕설’에 담긴 저주를 풀기 위한 열쇠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 지식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기 시작했다.

  복종하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법률 지식과 의학 지식으로 무장한 전문가들이 왕의 신하들을 대신해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정치 권력은 ‘위생 지식’을 확산시키는 데 힘을 기울였지만, ‘공중(公衆)’이 결국 굴복한 대상은 세속 권력이나 종교 권력이 아니라 ‘지식(知識)’ 그 자체였다. 서울 사람들이 제중원과 ‘병원’에서 배운 것은 바로 이 지식에 복종하는 법이었다.

  제중원이 설치된 지 120년 남짓 지난 오늘날, 사람의 일생은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병원 신생아실에서 병원 장례식장까지’가 되어 버렸다. 밥상에 채소만 올려놓는 어머니나 아내에게는 심하게 투정부리던 사람도, 방송에 나온 의사가 건강에 좋다고 하면 채소만 먹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의학의 발전은 사람의 수명을 많이 연장시켰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얻은 시간 중 상당 부분을 병원에 ‘다니거나’ ‘입원’하는데 바치고 있다. 이제 병원은 아플 때만 가는 곳이 아니다. 병원은 예뻐지기 위해서, 아프지 않기 위해서, 심지어는 자신이 아픈지 안 아픈지에 대한 판단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 가야 하는 곳이 되었다.

  반복이지만 현대 의학에서 질병은 ‘아픈 상태’가 아니라 ‘비정상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인들은 ‘자기 몸’에 대한 포괄적 판단 권한을 의학에 양도한 사람들이다. 현대인들은 몇 시간을 자야 하는지, 무엇을 얼마나 먹어야 하는지, 화장실에는 몇 번을 가야하며 얼마나 앉아 있어야 하는지, 이는 몇 번을 몇 분 동안이나 닦아야 하는지, 얼마나 움직이고 걸어야 하는지, 책과 눈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눕고 앉고 서는 자세는 각각 어때야 하는지 등등 세세한 동작(動作) 하나하나에 대해서까지도 의학적 판단에 의지하고 있다. ‘염병할’이 지독한 저주에서 가벼운 ‘상소리’로 지위가 급락한 것은 이 모든 과정과 함께였다.

※ 제중원으로 용도 변경된 홍영식의 집은 재동 현 헌법재판소 구내에 있었다. 제중원이 구리개의 청국 병영 옆(지금의 을지로 외환은행 자리)으로 옮겨 간 뒤, 그 집은 안경수(安駉壽)에게 넘어 갔다가 안경수가 사형당한 뒤에는 이호준(李鎬俊)의 집이 되었다.

1900년, 그 집을 대한제국 정부가 매입하여 광제원(廣濟院)으로 삼았다. 광제원이 의학교, 의학교부속병원, 대한적십자병원과 함께 대한의원으로 통합된 뒤에는, 한동안 관용 건물로 쓰다가 경기여자고등보통학교(해방 후 경기여고)가 되었고, 1988년 헌법재판소가 들어섰다. 홍영식과 안경수는 모두 역적으로 몰려 비명횡사했고 – 둘의 처형 모두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다 – , 이호준은 천수(天壽)를 누렸지만, 그 두 아들 이윤용과 이완용은 만고의 역적(逆賊)이 되어 있다. 정말 지기(地氣)라는 것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불과 수십년 사이에 한 집에서 줄줄이 역적(逆賊)이 나온 예도 찾기 어렵다.

더구나 제중원, 광제원으로 쓰던 시절에 이 집터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는지도 알 수 없다. 흉하기로 치면 서울 안에 이보다 흉한 터도 없을 터인데, 지금의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 그저 헌법재판소가 그 땅의 흉악한 기운을 잘 눌러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