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정의를 드러낸 문’―창의문(彰義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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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드러낸 문’―창의문(彰義門)

홍순민(중세사 2분과)

경복궁에서 청와대 서편을 바로 스쳐 지나가는 길을 따라 가다보면 좌우를 깊이 깍아지른 고개를 지나 세검정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 고개 마루에 거의 올라서는 지점, 길 오른편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 1968년 1·21사태 당시 북한 124군부대 게릴라들과 맞서 싸우다 순직한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의 동상이다. 그 동상 앞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옛 성문이 하나 나타난다. 별칭을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는 창의문이다.

창의문은 다른 도성문들과 마찬가지로 태조 5년(1396)에 도성의 서북문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 이름이 ‘의를 드러낸다’는 뜻의 ‘창의(彰義)’로 지어졌는데 아마 서대문인 돈의문(敦義門), 서소문인 소의문(昭義門)과 함께 서쪽의 문으로 인식되어 오상(五常) 가운데 서방에 해당하는 ‘의(義)’자가 붙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런데 그 창의문이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 적이 있다. 광해군 15년(1623) 3월 임인 밤 삼경에 약 1,000여 명의 ‘의로운 군대(義旅)’가 이 문으로 들어와 창덕궁 문으로 나아갔다. 그 때 ‘의롭지 못한’ 왕은 궁궐 담을 넘어 도망을 하고 새 왕이 들어섰다. 광해군에서 인조로 왕이 바뀐 인조반정(仁祖反正)이다. 창의문은 그 이름대로 의를 드러낸 셈이 되었다.

오늘날 광해군을 꼭 ‘의롭지 못한’ 왕으로 볼 것이며, 또 인조반정군을 과연 ‘의로운 군대’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는 달리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조선왕조 시대에는 대체로 그렇게 평가되었다. 영조 16년(1740) 8월 기해에 도성 가운데 이 구역의 수비와 관리를 맡고 있던 훈련도감의 대장 구성임(具聖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시에 의려(義旅)―의로운 군대가 들어온 곳이니 마땅히 개수하여 표시하여야 한다’는 말을 하였다. 영조는 이를 받아 들여 그 이듬해 봄에 개수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 왕명에 따라 이듬해 1월에 개수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그 김에 문루(門樓)도 새로 지었다.

영조대의 문루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요즈음 복원한 것에 비견할 수 없는 기품을 자랑하고 있다. 또 창의문은 현재 남아 있거나 혹은 복원한 도성문들 가운데 유일하게 좌우로 성벽이 살아 있다. 게다가 창의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열려 있어 그리로 지나다닐 수도 있다. 여름에 그 홍예문에 들어서면 시원하기 이를 데 없다. 서북쪽 북한산에서 내려온 바람이 모두 이 한 곳으로 모여드는 느낌이다. 창의문은 살아 있다.

그러나 창의문이 살아 있다고는 하나 온전히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시내 중심가에서 세검정 쪽으로 왕래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창의문으로 드나들지 않는다. 문 서측으로 뚫린 길을 타고 성 밑으로 굴을 파고 다닌다. 창의문은 그저 한 여름 무더위에 인근 노인네들의 땀을 식혀주는 것으로 제 구실을 삼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처럼 자동차가 주된 교통수단이 되어 있는 한 이런 현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창의’를 하지는 않더라도 가끔은 그저 휘적휘적 걸어서 창의문을 드나들어 보는 것도 뜻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닐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