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어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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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14 – 어섭쇼

한동안 봄 가을 주말이면 남의 결혼식이나 돌잔치 참례에 바빴는데 이 즈음에는 상가나 고희연장(古稀宴場)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잦아졌다. 어느새 내 삶이 다른 계단 위에 올라선 탓인데, 그런 곳에서 내오는 음식을 씹으면서 ‘각령(覺齡)의 씁쓸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데 그와는 별도로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이 표하는 상투적인 애도(哀悼)나 칠순잔치 마당이 강요하는 작위적인 활기도 사람의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 돌잔치 자리에서는 해맑은 아기의 웃음에 기꺼이 동화(同化)될 수 있지만, 칠순연 같은 곳에서는 아무래도 세월이 만들어 준 반투명한 탈을 쓰고 있어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들 그러니, 억지 웃음이 새겨진 가면을 쓰고 생의 마지막 잔치상을 받는 주인공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묘한 분위기에서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아는 게 병’이라고 연석(宴席) 뒤편에 키치적 문구를 담고 걸려있는 현수막을 보면 때로는 짜증스러워지기까지 한다. 언젠가 “만수무강 하옵시고 천수를 누리소서”라는 고딕체 글귀가 새겨진 현수막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때 나는 이 글귀에서 주인공이 70년간 쌓아온 품위와 소양이 경박한 장사속 앞에 무참하게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선시대에도 나이 70이 넘으면 천민에게도 벼슬을 주었고, 도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궁궐로 불러들여 왕이 직접 잔치를 베풀기도 했다. 질기게 살다 보면 궁궐 출입도 해 보고 죽은 뒤에 묘비명(墓碑銘)도 바뀔 수 있었으니 어쨌든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오래 산다고 해서 묘비명이 바뀌는 일은 없다. 80에 죽으나 90에 죽으나 범인(凡人)은 모두가 학생(學生)이요 유인(孺人)이다. 그런데 정작 70회 수연(壽宴) 자리에서는 느닷없이 천자(天子)가 되고 태후(太后)가 되어 감히 “만수무강(萬壽無疆)”하라는 축사(祝辭)를 받으니 아무리 명분(名分) 인플레가 심한 시절이라고 해도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앞에서는 ‘만년(萬年) 동안 건강하게 살라’고 해 놓고는 곧바로 하늘이 내려 준 수명 – 천수(天壽) – 만 누리라는 야박함에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하옵시고’라는 얼버무림형 존대(尊對) 역시 ‘만수무강(萬壽無疆)’이라는 말로 지존무상(至尊無上)의 지위에까지 올려 놓은 주인공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흔히 외국인들이 우리 말을 배울 때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존대법’라고들 하지만, 어디 외국인만 그러랴. 나 자신이 존대법을 잘 모르고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대개 그러하며, 내 아이들은 더하다. ‘오시래요’와 ‘오라셔요’를 늘상 헛갈리는데다가 ‘잡수세요’와 ‘드십시요’를 각각 어디가 어떻게 잘못되었는지 생각도 못하고 마구잡이로 섞어 쓴다. 오늘날 한국 표준말 – 사전적 정의로는 현재 교양있는 서울 사람들이 쓰는 일상생활언어 – 에서는 ‘시’ 또는 ‘세’만 들어가면 모두 존대말이요,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반말’이다. 이제 존대말은 공식언어이면서 일상생활에서는 화자(話者)보다 윗 급 – 어느 정도의 급(級)인지는 모르겠지만 – 일 듯한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쓰는 말이고, 반말은 사적 언어로서 자기와 친한 동급(同級) 인물이나 가족들, 또는 아랫 사람에게 쓰는 말이 되어 버렸다. 그 탓에 ‘네가 뭔데 반말이야?’는 일상의 다툼에서 ‘선전포고’격 표현으로 가장 흔히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말 뜻으로만 본다면, 존대말의 반대말이 반말일 수는 없다.

수천년간 ‘어음(語音)’과 ‘문자(文字)’가 서로 맞지 않는 생활을 해 온 탓에 지금으로서는 세종 이전의 말 살이를 짐작하기 어렵지만, 국어학자들은 세종대에만 해도 존대법이 20세기 중반의 그것만큼 복잡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망가지면서 단순해지고 있지만, 과거 한 때의 존대법은 화자(話者)와 청자(聽者) 사이의 관계 뿐 아니라 대화 중에 등장하는 대상에 따라서도 달리 사용되었다. 나는 우리말의 존대법 – 좀 더 엄밀하게는 존비법(尊卑法) – 이 아마도 16세기 이후 주자학적 명분론(名分論)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면서 한층 세밀화되고 정치화되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명분(名分)이란 말 그대로 사람의 등급 – 이름, 명(名) – 을 나누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니 등급에 따라 호칭도 달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사람수를 셀 때에도 등급에 따라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 관리는 원(員)으로 세고 양반은 인(人)으로 셌으며 평민은 명(名)으로 셌고, 노비는 가축(家畜)과 합쳐 구(口)로 셌다. 인구(人口)란 인(人)과 구(口)를 합친 개념인 셈이고, 오늘날 가족과 동의어로 쓰이는 식구(食口)란 실은 그 집에서 ‘먹이는’ 노비와 가축을 포함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개’나 ‘고양이’를 가족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식구(食口)’가 몇인지를 물으면 으례 개, 고양이 숫자는 빼고 말한다. 개와 고양이의 현실적 지위는 상승했지만 개념적 지위는 하락한 셈인가.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 어린아이들. 글을 배울만한 나이가 되면 ‘반말시대’도 끝내야 했다.

어쨌든 등급이 세분화하면 하는만큼, 대하는 말씨도 세분할 필요가 있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그럭저럭 살아남아 있던 존비법(尊卑法)은 기본으로 다섯 단계, 확장하면 일곱 단계였다. 친구간에 사용하는 평어(平語)는 ‘하오’였고, 같은 등급의 손 윗 사람에게 쓰는 상대어(上對語)는 ‘하시오’였으며, 아랫 사람에게 쓰는 하대어(下對語)는 ‘하게’였다. 윗 등급 사람에게 쓰는 존대어는 ‘하십시오’였고, 아랫 등급 사람에게 쓰는 비대어(卑對語)는 ‘해라’였다. 요즈음에는 영문법의 영향 탓으로 보통 ‘하십시오’와 ‘하시오’는 뭉뚱그려 존대말로 취급되고, 하게는 ‘청유형(請誘形)’, 해라는 ‘명령형’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차이는 영어에서 Please가 들어가고 안들어가고의 차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여기에 왕과 왕비, 대비 등에게만 사용하는 극존대(極尊對)가 있어 ‘하시옵소서’가 추가되었는데, 어미(語尾)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표현하는 말까지 바뀌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를테면 밥 먹어라, 수저를 들게, 진지 잡수십시오, 수라를 젓수시업소서 따위가 있어서 같은 대상과 행위를 화자(話者)와 청자(聽者)의 관계에 따라 달리 표현하게끔 하였다.

어린아이들이 이 복잡한 존비법(尊卑法)을 배우는 데에는 아무래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따로 ‘배움의 유예기간’을 주었는데, 그 동안에 사용하는 말이 어미(語尾)를 생략하고 어간(語幹)만 쓰는 ‘반말’이었다. 즉 반말은 ‘어린아이의 말’이었다. 조선 시대에 몇살 때까지 반말이 용인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그렇듯이 물론 개인차는 있었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은 명문가의 아이는 일찍 ‘반말 시대’를 졸업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집 아이들은 여남은 살 될 때까지도 ‘반말 문화’를 지켜갔을 것이다. 몇해 전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젊은 여성이 결혼한 후 시부모를 ‘시엄마, 시아빠’로 지칭하는 것을 듣고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대상을 시엄마, 시아빠로 지칭한다면 그 말씨 역시 ‘반말’이 될 터이겠으니 말이다. 엄마에게는 ‘~ 해 줘’가 어울리고 어머니에게는 ‘~해 주십시오’가 어울린다. 수십년래 가족주의가 확산되고 자녀를 한 둘만 낳는 경향이 일반화되면서, ‘어린 아이 시절’ 역시 극단적으로 길어지고 있다. 고등학생이 ‘어린이날 선물’을 기다리고, 이미 부모가 된 사람이 자기 부모를 ‘엄마, 아빠’로 부르는 일이 새삼스럽지 않다. 반말이 평어(平語)의 자리를 대신한 것은 쓰기 쉬운 때문이라기 보다는 아무래도 이같은 사회현상 탓일게다. 신분제도가 무너진 이상 말살이의 존비법도 당연히 무너져야 하지만, 평어(平語)나 상대어(上對語)가 사라지고 존대말과 반말만 남는 현상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18-19세기 어느 시점에선가에도 서울 말에서 존비법(尊卑法)이 균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시오’와 ‘하십시오’의 중간쯤에 자리잡은 얼버무림형 존대, ‘합쇼’가 서울 특유의 방언(方言)으로 등장한 것이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이른바 ‘깝쇼체’라고 하는 서울 방언은 수시로, 도처에서 들을 수 있었다. 택시 기사는 ‘어섭쇼, 어디로 모실깝쇼’라고 행선지를 물었고, 음식점 점원은 ‘어섭쇼, 뭘 드릴깝쇼’로 주문을 받았으며, 남대문시장 옷가게 주인은 ‘어섭쇼, 골라봅쇼’로 흥정을 걸었다. 얼핏 들으면 ‘어서 오십시오’를 줄인 말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서 오시오’를 살짝 변형시킨 말 같기도 했다. 이 말씨의 참된 겨눔쇠는 바로 이 애매함과 불확실함에 있었다. 흔히 ‘서울 방언’이라고는 하지만, 이 말투는 서울 사람 중에서도 특정한 부류, 상인층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말투였다. 신분제를 사회 운영의 핵심 원리로 간직하고 있던 중세 도시에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신분을 가리키는 ‘표지(標識)’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그 중세성이 해체되어 가면서 도시는 이제 ‘익명성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분제와 익명성은 결코 정합적일 수 없었다. 조선적 신분제 속에서 정형화된 존비법(尊卑法)은 도시에서 배회하는 ‘익명의 존재’들로 인해 심각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신분을 특정하기 어려운 존재와는 상종하지 않으면 되었지만, 장사꾼들은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양반인지 무뢰배인지 시골 아전인지 외양만으로는 알 수 없을 경우, 장사꾼 특유의 셈법으로 대처해야 했다. 시전 상인들 역시 중촌(中村)에 살아 스스로를 중인으로 치고 있었는데, 정체불명의 사람을 대하면서 상호 관계에서 먼저 손해를 볼 수는 없었다. 어정쩡하게 얼버무리는 존대가 만들어진 것은 그런 심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초가집이지만 가족들의 입성이나 가구, 살림살이는 깔끔하고 단정하다. 남녀노소 함께 모여 사진기 앞에 늘어선 것을 보아 가장이 ‘개화(開化)’에 적극적이었던 듯하다. 집의 규모나 복식, 사람들의 태도 등을 보건대 아마도 중인(中人) 가정이었을 것이다. 1890년대 서울 중인(中人)은 20세기에 들어와 도시 중산층의 중핵이 되었고, 그들의 직업 역시 ‘최고의 직업’으로 격상되었다.

19세기말, 신문이 등장하면서 그 일부 지면에 여러가지 ‘꼬이는 광고’가 실리기 시작했다. 좀 점잖게 사람을 부르는 글은 ‘왕림(枉臨)시’ 따위였고, 낮춰서 부르는 글은 ‘조량(照亮)’ 등이었다. ‘하옵시고’는 상대(上對)인 ‘시’과 평대(平對)인 ‘’을 대충 섞어 만든 말인데, 꼬치꼬치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하시옵고’를 ‘하옵시고’라고 잘못 발음했으려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이래 서울의 특징적인 방언은 이렇듯 ‘도시내 익명성(匿名性)의 확장’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후 도시 서울이 상업도시, 소비도시로서의 특징을 강화해 나가면서, 상인의 언어 역시 전도시적으로 확대되었다.

1933년, 조선어학회는 ‘표준어’를 지정하면서, 그를 “서울 중류층 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로 규정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조선어학회를 주도한 사람들 중에는 서울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최현배는 울산 사람이었으며 이희승은 개성 사람이었고 이극로는 의령 사람이었다. 그들의 스승 주시경도 황해도 평산 사람이었다. 이들은 서울 사람들을 중류니 상류니 하류니 하는 식으로 – 이는 전형적인 일본식 표현이지만, 그걸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 나누고, 그 중 중류층 사람들의 말을 ‘표준’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조선어학회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에게 ‘서울 중류층’이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는가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세기초까지도 서울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 각각은 서로 다른 말씨로도 구분되고 있었다. 궁중 언어나 고관 대작 나으리들의 입에 밴 ‘해라’체는 당연히 고려 밖이었을 터이다. 하촌이나 문밖의 ‘아랫것’들 말투도 ‘교양 없음’을 표시하는 것이라 하여 – 오늘날의 표준어 규정은 ‘중류층’이라는 개념 대신 ‘교양있는’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 빼놓았을 듯 싶다. 상촌의 아전 말씨는 비굴해 보였을 것이니, 아마도 이 때 ‘서울 중류층’에 걸맞는 지위로 표상된 사람들은 예전의 중인(中人)들이었을게다. 더구나 이 시대에는 이미 이들이 도시 부르주아지의 중추를 점하고 있었다. 상인, 의사, 변호사, 통역관, 예술가 등 근대 이후 당당한 ‘중산층의 본류’가 된 사람들은 대개 옛 중인(中人)의 후예들이었다.

그렇다고 ‘깝쇼체’가 표준어의 지위를 얻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말투는 좀 더 하급의 서울 사람들이, 특히 인력거꾼이나 행상, 점원들이 쓰는 방언(方言)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 다만 1930년대 이전 어느 시점부터는 중인(中人)의 언어와 문화가 ‘일본인의 그것’과 함께 서울 도시 문화의 새로운 표준으로 기능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식민지화 이후, 서울의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끌어간 사람들 중 다수가 서울 출신이든 지방 출신이든 중인(中人)의 대열 속에서 나왔고, 1930년대 초반에 가서는 자신들의 언어적 표준을 전국적 표준으로 선포할 수 있는 자격을 자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 이 때의 표준어 선포는 어디까지나 자임(自任)이었다. 일본 식민지 권력이 그를 공인(公認)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사실은 이 무렵에도 서울의 언어생활은 ‘신분제의 유제’와 ‘익명성’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1934년 여름, 당주동에서는 한 젊은이가 집에 물 길어다 주는 물장사에게 ‘하게체’로 말했다가 20여명의 물장사들에게 집단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촌 젊은이에게 체질화되어 있던 ‘양반의 습성’과 새로이 ‘시민권’을 얻은 북청(北淸) 출신 청년들의 ‘익명성에 기댄 평등의식’이 정면으로 충돌한 사건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을 일상에서 무수히 겪으면서 차츰 언어생활에서 신분적 구분선을 걷어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하십시오’, ‘하시오’, ‘하게’, ‘해라’, 반말을 모두 사용하면서도 – 이제 ‘하오’는 여보(여기 보오, 이 보오)나 와요 등 부부 사이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말이 되어 버렸다 – 범주로는 존대말과 반말만 남겨둔 언어 세계를 만들어냈다. 그 때문에 범주와 용법의 불일치로 인한 오해와 다툼도 아직껏 되풀이되고 있다. 꽤 오래 전 내가 무척 좋아하는 후배에게 ‘하게’체로 말을 건넨 적이 있었다. 이 마음 여린 친구, 면전에서는 아무 말도 안했지만 속으로 무척 화가 났었다는 말을 그 한참 후 다른 후배에게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제는 범주와 용법을 통일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듯 하다. 그렇다고 요즘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특이한 언어들이 표준의 지위를 얻도록 방치할 일도 아니다. 내 아들 녀석, 아침마다 ‘안녕히 다녀오3’하고 인사하는데, 그 놈의 ‘하3체’는 아무리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 몇달 전 어느 학술회의 석상에서 중견 국어학자에게 ‘표준말’ 제정 당시의 서울 중류층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고 물어 보았는데, 돌아온 대답은 ‘모르겠다’였다. 감히 이런 글을 쓴 것은 그 ‘모르는’ 문제에 대해 생각을 나누고 싶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