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시계탑(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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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야기 26 – 시계탑(03)

전우용(근대사 2분과)

 

  이 땅에 최초로 기계식 시계를 설치한 건조물 = 시계탑으로 추정되는 것은 1888년 경복궁 내에 신축된 관문각(觀文閣) 옆의 시계탑이다. 이태진 교수는 일본에서 발간된 “일청전쟁화보(日淸戰爭畵報)”에 수록된 삽화를 근거로 하여 관문각 옆에 시계탑이 서 있었음을 밝혔다. 관문각(觀文閣)이라는 이름 자체가 ‘천문을 본다’는 뜻이니 이름만으로도 그 옆에 시계탑을 세울 충분한 이유가 된다.

  최초의 시계탑을 궁궐 내에 설치한 데 대해서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나는 여기에도 신문물에 대한 ‘동도서기(東道西器)’적 태도가 작용했다고 본다. 시간을 보는 철학적 태도는 유교적 틀을 유지하면서 시간을 재는 기계는 서양의 것을 채용한 것이다.

  관문각 옆의 시계는 도성의 문을 여닫는 일이나 관료들의 출퇴근 시간을 알리는 일과는 전혀 관련을 맺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기계식 시계였으나 독자적인 천하의 주인이며 독립적인 시간의 주재자가 되고 싶어 한 조선 국왕의 염원을 상징한 기계였다.

  이 시계는 흡사 세종대의 자격루(自擊漏)처럼 궁궐 깊은 곳에 자신의 존재를 ‘숨겨 놓은’ 비장(秘藏)의 장식물일 따름이었다. 이 시계는 시간을 분할하거나 재조직하는 시계 본연의 기능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고종의 자존심 – 더 긍정적으로 해석한다면 ‘반청자주(反淸自主)의 의지’ – 를 표현한 시각적 상징물로 주로 기능했다.


(사진 1) 1935년에 신축된 경성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 시계탑을 건물의 주요 구성요소로 배치함으로써 시계의 ‘공공성’을 극단적으로 부각시킨 건물이다.

  이 시계탑이 언제 철거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청일전쟁 이후 개국 연호를 사용하고, 뒤이어 연호를 새로 제정했을 때 그 상징적 효용은 사라졌다. 1897년, 대한제국 황제와 하늘 사이의 관계를 직접 표현하는 장소로 마련된 원구단은 시계탑보다 더 직접적인 천자(天子)의 상징물이었다.

  중국, 일본과 구분되는 별도의 대한제국 표준시 –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본초 자오선으로 결정하고 그를 기준으로 각국의 표준시를 정한 것은 1884년 10월의 일이었다 – 를 채택한 것도 ‘별도의 독립된 천하’를 구성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한 직후 우선적으로 취한 조치 중에는 태양력 전용 방침을 폐기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과거의 태음력으로 되돌아 간 것도 아니었다.

  시간개혁은 이번에도 역시 ‘동도서기’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황실 의례(儀禮), 국가 경일(慶日) 등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도(道)’와 관련된 시간은 음력(陰曆)이, 행정이나 대외 교섭 등 ‘기(器)’에 관한 시간은 양력(陽曆)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24시제의 기계적 시간은 일상 생활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윽고 종각(鐘閣)의 종도 울음을 멈추었다.

  1899년, 경인철도와 서울 전차가 각각 개통되었고 그보다 앞서 한강변 주요 포구와 연안 각 항구 사이를 왕래하는 증기선들이 시간에 맞춰 운행하였으나 따로 시계탑이 만들어졌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다.

  시간의 표준은 정해져 있었으나 그를 측정하고 표시할 기계가 없었으니 이후 수십년간 외국인의 조롱거리가 되고 한국인의 자괴(自愧) 거리가 된 ‘코리안 타임’이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 ‘코리안 타임’이니 ‘이슬람 타임’이니 하는 것은 시간대의 변화와 시계장치의 보급 사이에 넓은 간격이 생김으로써 시간을 정확히 지킬 방법을 갖지 못했던 비서구 세계 사람들에 대한 서구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조롱일 뿐이다. 약속시간에 늦는 것만 ‘코리안 타임’이 아니라 빨리 도착하는 것도 ‘코리안 타임’이었다. –

  바빌로니아의 순태음력을 고수했던 이슬람 사람들은 1980년대 이전의 한국 사람들보다 더 ‘시간 관념’이 없어서 ‘보름달 뜰 때쯤 만나자’는 식의 시간 약속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 근래 한국에서 진행된 변화를 통해 보건대 시간 관념은 ‘의식적 노력’ 보다는 오히려 ‘테크놀로지의 변화’에 더 크게 의존한다.


(사진 2) 1992년 여름 청량리역 시계탑 앞에 모여든 젊은 피서객들. 역전(驛前) 시계탑은 광장(廣場)을 포함하는 랜드마크로서 찾기 쉽고 모이기 쉬운 장소(場所)였을 뿐 아니라, 만남의 ‘시간’에 대한 기준점이기도 했다. ‘약속’이라는 개념의 시간적 장소적 결합태(結合態)로서 이보다 좋은 공간은 드물었다.

  도시 서울 한복판, 누구나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공공시계’가 등장한 것은 1902년의 일이었다. 서울 전차와 전기사업을 독점하고 있던 한성전기회사 – 1898년 고종이 미국인 콜브란과 보스트윅을 청부인으로 하고 이채연(李采淵)을 사장으로 하여 설립한 회사였다. 1904년 러일전쟁 와중에서 콜브란 등은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고 회사명을 한미전기회사로 바꿨다 – 는 처음 보신각 맞은 편 행랑(行廊)을 사옥으로 썼으나, 전등 전차 사업이 확장되면서 1901년에 새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지금의 YMCA 좌측, 장안빌딩 자리였다.

  새 사옥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고 완공 후 중앙 첨탑에는 대형 시계가 설치되었다. 아마 이 무렵부터 전차도 시간을 지켜 가며 운행하기 시작했던 듯 하다. 사실 개통 직후의 전차는 정해진 시간표가 없었을 뿐 아니라 정거장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아무곳에서나 승객을 태우고 내려 주었다.

  이런 운행은 전차의 속도를 떨어 뜨렸을 뿐 아니라 사고 – 이른 바 전차소타사건(電車燒打事件)으로 비화된 어린애 역살(轢殺) 사건 외에도 가끔 전차로 인한 교통사고가 일어나곤 했다 – 유발의 가능성을 높였다.

  이런 문제들은 일정한 위치를 정하여 전차의 발착(發着)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거장을 따로 만들면서, 구획된 거리에 대응하는 구획된 시간을 적용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에 따라 시간을 알려주는 기계식 시계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을 것이다.

  한성전기회사 사옥의 시계는 시간과 거리, 속도 사이의 함수를 가르치는 훌륭한 교본(敎本)이었다. 사람들의 전차 이용이 잦아지면서 원판 위를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시계 바늘과 정거장 사이의 레일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전차 사이의 상관(相關) 요인들이 자연스럽게 인지되기 시작했다. 이제 ‘절약되는 시간’과 ‘단축되는 공간’이 구체적 실체(實體)로 다가서게 되었다.

  우리 말에서 ‘조금’ – ‘좀’ 또는 ‘쫌’이라 해도 좋다. 요즘 나도는 유머 중에는 경상도 사람들을 ‘쫌’ 한 단어면 모든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로 묘사하는 것이 있다 – 은 ‘잘’ 만큼이나 글자만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운 부사(副詞)다.

  ‘잘했다’가 욕인지 칭찬인지 구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말이 튀어나온 상황 전체를 이해해야 하듯이 – 비서구 세계 사유방식의 특징을 통채로 ‘연역적 사고’에서 찾는 서구 학자들도 많다 – , ‘조금’이 little인지 아닌지, 시간을 말하는지 공간을 말하는지는 겪어 봐야만 안다.

  나는 대학시절 겨울방학 때 경상도 산골에 있는 친구집을 찾아 가는 길에 한 촌로(村老)에게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물어 보았다가 된통 골탕을 먹은 경험이 있다. 그 노인은 심상하게 ‘쫌만 가면 돼’라고 답했는데, 그 쫌이 거리인지 시간인지, 거리라면 대략 몇 km이고 시간이라면 대략 몇 분인지를 구체적으로 물어보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날, 해 저물어 가는 길을 겁에 질린 채 허위허위 걸어야 했던 기억은 지금껏 생생하다. 지금은 농촌의 시간대도 판연히 달라졌지만, 1980년대초만 해도 분이나 km 보다는 반나절이니 시오리 – 50%의 편차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다 – 니 하는 말이 더 어울리는 지대가 남아 있었다.

  전기회사 사옥의 시계탑은 시간에 대한 중세적, 농촌적 태도와 근대적, 도시적 태도를 가르는 기준점이었고, 종교적으로 통합되어 있던 시간에서 물화(物化)된 시간을 떼어 내는 메스였다. 다만 이 시계는 사람의 동작과 행위를 직접 규제하지는 못했다. 이 시계는 다른 기계, 즉 전차를 매개로 사람들의 시간 생활에 개입하였고, 그런 만큼 간접적이었다.


(사진 3) 1915년경 종로의 보신당시계포. 상호를 적은 간판 아래쪽에 ‘각국 금은시계안경판매’라고 씌어 있다. 안경은 나중에 ‘독립’했지만, 시계는 여전히 귀금속(貴金屬)과 함께 취급되면서 고대로부터 지속되어 온 신성(神性)의 잔영(殘影)을 간직하고 있다.

  사람의 행동을 직접적이고도 강력하게 규제하는 공공시계는 1908년 대한의원 본관이 완공되었을 때 비로소 출현했다. 서양의 점성술이든 동양의 사주학이든 사람이 태어난 시간 – 연, 월, 일, 시 – 에 따라 평생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은 매한가지다.

  근대 이전의 서양의학은 특히 점성술과 건강의 관계에 민감했다. 천문학은 의과대학의 필수과목이었는데 환자의 출생시간이 그의 질환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의사들은 수술시간을 정할 때에도 천문을 살피곤 했다.

  근대 서양의학은 천문학과는 완전히 결별했지만, ‘시간의 신비로운 힘’에 대한 의존을 다 버리지는 못했다. 지금도 의료와 관련된 모든 행위는 시간과 함께 표현된다. ‘매 식후 몇 분마다 복용할 것’, ‘매일 몇 시간 이상 규칙적으로 운동할 것’, ‘식후 몇시간 뒤의 수치’, ‘분당 맥박수’, ‘몇시간에 걸친 대수술’ 등. 시간을 중시하는 근대 서양의학의 관행이 근대적 합리성의 소산인지 아니면 중세적 신비주의의 잔영(殘影)인지를 굳이 따질 필요는 없다.

  병원의 시계는 의료진과 환자 모두에게 ‘취해야 할 행동’의 시점을 알리는 일종의 필수적인 ‘의료기계’였다. 이 기계는 다른 매개장치 없이 곧바로 사람의 행위와 동작을 지배했다. 매개장치가 있다면 그것은 명령권과 지배권을 가진 다른 인격 – 의사, 조수, 간호사 등 – 이었다.

  명령조든 당부조든 ‘시간에 맞추어’ 자라, 일어나라, 밥 먹어라, 피 뽑자, 주사 맞아라와 같은 지시는 환자 자신을 위해 거부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병원 시계의 바늘은 사람의 동작을 직접적으로 규제했고, 시간 지키기는 다른 모든 행위의 전제가 되는 기초적 행위가 되었다.


(사진 4) 1904년의 인천 외국인 거류지. 외국인 상점 처마 밑에 시계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공공시계보다 상점의 시계가 조금 더 일찍 보급되었다. 한국 자본주의화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통국가와 제국주의 자본 사이의 다툼은 이렇듯 시계를 통해서도 표현되었다.

  1888년 이후 20년에 걸쳐 서울 공간 위에 차례로 들어선 세 개의 시계탑은 신(神)이 주재하던 신비로운 시간이 기계적으로 분할되는 물화(物化)된 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나 모든 변화는 언제나 중첩적이며 자주 역방향의 변화를 포함한다. 물화(物化)된 시간이 모든 사람의 일상을 지배하기까지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남아 있었다. 시간은 시계를 통해 물화(物化)된 자태를 보여주었지만, 사람들은 그에 즉각적으로 친숙해질 수 없었다.

  시간 앞에서는 그 어떤 절대권력도, 그 어떤 초인(超人)도 작아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 역시 존귀한 신물(神物)로 대우받았다. 시계가 금 은 보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보물(寶物)’이 된 것은 단지 그 값이 비쌌기 때문만은 아니다 – 1910년대 초반 시계 하나의 값은 어지간한 서울 기와집의 반값 정도였다 – 

  1970년대까지만 해도 라디오나 TV 방송에서는 사진관이나 보석상 광고를 자주 내보냈다. 나는 아직도 ‘사진하면 허○허○ 사장(寫場)’이나 ‘금은보석 시계는 종로 보○장에서’라는 광고 멘트를 그 리듬까지 기억하고 있다.

  초상화의 후신인 사진(寫眞)처럼 시계도 신물(神物)이었고 그래서 귀물(貴物)이자 보물(寶物)로 취급받은 것이다. 시계는 예전처럼 천자(天子)나 왕(王)을 상징하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그에 버금가는 부귀(富貴)를 누리는 사람들의 신분과 지위를 표상하는 물건이었다.


(사진 5) 1970년대의 아파트 부엌에 걸린 괘종시계. 거실에는 이보다 더 큰 시계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시계는 다른 ‘가구들’에 비해 대체로 그 존재감이 과장되어 있었던 바, 흡사 오늘날 TV가 실내 가구(가전제품)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같았다.

  그러나 이윽고 시계는 도시 곳곳의 ‘공공시설’과 ‘상업시설’들의 벽면이나 별도의 시계탑에 속속 내걸리기 시작했다. 철도역에도, 학교에도, 관공서에도, 교회에도, 공장에도, 상점에도 시계가 내걸렸고 그 중 상당수는 종(鍾) 소리로 출근시간이나 등교시간을 알렸다. 이들 시계탑은 들어서자마자 도시의 중요한 랜드마크가 되었고, 특히 역 시계탑 앞은 오랫동안 약속장소로 애용되었다.

  그 얼마 후에, 가장 값나가는 이사집 선물로 시계가 선택되는 시대가 열렸다 – 얼마전까지만 해도 큰 나무상자 안에 들어 있는 괘종 시계로 거실 한쪽 면을 다 채우다시피 한 집이 많았다 – . 1차대전을 계기로 손목시계가 대중화한 뒤로는 하이칼라 신사나 모던보이, 모던 걸의 손목에도 시계가 둘리기 시작했다. 귀하다는 것은 곧 드물다는 것이니 흔해지면 자연 천해지기 마련이다. 시계가 늘어나면서 거기에 달라붙어 있던 신(神)의 자취도 희미해져 갔다.

  내가 처음 손목시계를 얻은 것은 – 아버지 것을 물려 받았는데, 그 무렵의 내 동년배들 다수가 그러했다 – 중학교에 입학한 다음이었다. 중학생이 찰 정도면 이미 흔해진 것이라 해야겠지만, 지금과 비교해 보면 그 때에도 시계는 귀했다. 때 맞춰 시계에 ‘밥 주고’ ‘맞춰 주는’ 일이 결코 귀찮지 않을 만큼, 내게 그 시계는 귀물(貴物)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계는 금은보석상에서도 취급하지만 구두나 핸드백을 만드는 ‘명품업체’에서도 만들고 길거리 노점상에서도 판다. 값비싼 시계와 싸구려 시계의 가격차에 시계의 정확도가 꼭 비례하지도 않는다.

  명품시계는 여전히 부귀와 특권의 상징이지만, 관심없는 사람에게는 명품과 짝퉁, 싸구려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 시간이 물화(物化)된 만큼 시계도 평범한 ‘물건(物件)’이 된 셈인데, 다만 시계는 현대가 과잉소비시대임을 감안하더라도 유난히 과소비되는 물건이라는 특징이 있다.

  지금 나는 손목에도, 주머니 속에도, 책상 위에도, 거실 벽에도, 침대 옆에도 시계를 차고 넣고 두고 걸고 있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알지 못하면 당황하게 되어 버린 탓인데, 이런 막연한 불안상태는 현대 도시인 대다수가 공유하는 것이다.

  또 내가 가진 시계의 일부는 특정 시점에 종소리를 내도록 되어 있다. 물론 그 ‘종소리’는 에밀레종이 내는 것처럼 신성하고 웅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그저 경박하고 차마 듣기 어려운 기계음을 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여전히 내 삶에 관한 전권(全權)을 쥔 신(神)의 목소리이다. 비록 시계종이 울릴 시간을 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나는 오늘도 그 시계의 알람음을 거역하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내게 그 알람음을 중단시킬 권리가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