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서울의 중심, 종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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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심, 종루

홍순민(중세사 2분과)

옛 종루의 양편에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중국 비단을 파는 면전(綿廛), 국내에서 생산되는 비단을 파는 면주전(綿紬廛), 국산 면포를 파는 면포전(綿布廛), 국산 마포를 파는 포전(布廛), 저포와 황저포(黃苧布)를 파는 저포전, 중국의 거친 베와 서양 모자를 파는 청포전(靑布廛), 각종 종이를 파는 지전(紙廛), 각종 건어물을 파는 내외어물전(內外魚物廛) 등이 큰 점포로서 이들을 육의전(六矣廛) 혹은 속칭으로 주비(注非)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이것들이 그 당시에는 가장 중요한 상점들이었다. 오늘날 종각 부근에 있는 점포와 비교해 보면 시대의 변화가 새삼 느껴진다.

종루는 상점들이 꽉 들어찬 시전의 중심지, 상업활동의 본거지만은 아니었다. 여러 면에서 큰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우선 그 이름부터 작지 않은 뜻이 담겨 있다. 후대인 1895년(고종 32)에 지은 것이기는 하지만, 보신각(普信閣)이라는 이름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오행(五行) 사상에서는 동, 서, 남, 북, 중앙의 오방(五方)에 각각 목(木), 금(金), 화(火), 수(水), 토(土)의 오행과 유학사상의 오상(五常)―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연결시키는 관념이 있다. 이에 따라 서울 도성의 4대문 이름을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북대문은 약간의 변화를 주어서 숙정문(肅靖門) 하는 식으로 인의예지를 따서 지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신각은 그 중앙 신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보신각은 서울의 중앙이라는 뜻이다.

종루―보신각은 오행사상의 관념상으로만 서울의 중앙이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위치로 보아도 서울의 가장 중심이 되는 두 가로, 남대문로와 운종가가 만나는 곳에 있을 뿐 아니라, 서울 사람들의 일상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종루에서 치는 종은 시각을 알려주는 기능을 했다. 오늘날처럼 집집마다 개인마다 시계를 갖고 있지 못했던 조선시대에는 이 종루의 종소리는 하루 일상 생활의 기준이 되는 것이었다. ‘밤이 되었다, 하루 생활을 마감하라, 성문을 닫는다’는 뜻으로 하늘의 기본 별자리 수를 따라 28번을 치는 인정(人定)과 ‘새벽이 밝는다, 하루 생활을 시작하라, 성문을 연다’는 뜻으로 불교의 33천(天)에서 따와 33번을 치는 파루(破漏)는 현대에 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당시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소리였다.

상상해 보시라. 궁궐에서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가 나면 광화문 앞을 비롯해 몇 군데서 그것을 받아 종루에 알리고, 다시 종루의 종소리를 받아 사대문을 비롯한 곳곳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서울의 새벽과 저녁을. 그 시대에는 오늘날같은 소음이 없었으므로 그 소리는 은은하면서도 장엄한 타악기 연주로 서울의 하늘을 채웠을 것이요, 서울 사람들의 마음을 충만히 채웠을 것이다. 그렇기에 한말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도 이곳에서 열릴 수 밖에 없었고, 해방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종로 네거리 종각 앞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오늘날 그 종소리는 점점 사라져 간다. 무슨 국경일이나 제야(除夜)에 TV 전파를 통해서나 겨우 듣는다. 매일 그 종소리를 들으려 하는 것은 과욕임을 안다. 그러나 일년에 한 두 번이 아니라, 그것도 방송을 통해서가 아니라 될 수 있으면 자주, 많은 사람들이 종로 네거리에 모여 직접 그 종을 치며, 종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하나로 묶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아울러 그 형태도 좀더 우리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에 맞는 모양과 크기로 바꾸고, 위치도 인도 뒤편으로부터 다시 옛날처럼 종로 네거리를 떠억 사방으로 걸쳐 그 밑으로 차와 사람이 지나다니도록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상징이 빈곤한 서울의 상징으로 우뚝 세웠으면 좋겠다. 희망사항일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