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복원된 문의 비애 : 혜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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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문의 비애 : 혜화문

홍순민(중세사 2분과)

백악에서 동남쪽으로 흘러내려 가던 산줄기는 지금의 성균관 대학교 뒷편에서 ‘매봉우리―응봉(鷹峯)’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 번 솟았다. 백악이 342m인데 비해 응봉은 133m밖에 되지 않아 얼핏 보아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응봉은 백악이 서울의 오른편 젖가슴을 이루는 데 대해 왼편 젖가슴을 이루는 봉우리이다. 백악이 젊은 여인의 젖가슴처럼 위로 뾰족히 솟았다면 응봉은 아기를 몇 키운 여인의 젖가슴처럼 펑퍼짐하게 퍼졌다. 그렇게 응봉은 그 자락을 넓게 펴 그 품에 창덕궁과 창경궁, 종묘 그리고 그 옆으로는 성균관을 품고 있다. 도성은 그 응봉을 감싸고 돌아 지름의 명륜동과 북창동을 가르며 끊어지며 이어지며 내려간다. 가다가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삼선교 넘어가는 고개 마루턱에서 동소문로와 만나 혜화문을 이루었다.

혜화문은 도성의 동소문이다. 태조 5년(1396년) 도성을 짓고 여덟 문을 낼 때 그 하나로 지었다. 그 때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 그러나 성종 연간에 창경궁을 지으면서 그 정문을 홍화문이라고 이름을 짓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惠化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애초에는 문루가 있었으나 아마 임진왜란 당시 문루가 없어진 듯, 영조 20년(1744)에 가서 이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던 어영청(禦營廳)에 명하여 문루를 짓고 현판을 달도록 명함으로써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석축을 쌓고 홍예문을 낸 위에 단층의 문루가 올라 앉은 모습으로서 고갯 마루에 들어서 좌우의 산세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문은 소문이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동북 방면, 곧 경기도 양주, 포천을 거쳐 강원도, 함경도로 나가는 길의 시발을 이루는 곳이라 실질적으로는 대문 이상으로 통행이 빈번한 곳이었다. 이러한 문을 일제가 그대로 놓아 둘 리가 없었다. 일제는 도로를 정비한다는 명목으로 1928년에 문루를 헐어 없앴고, 1939년에는 석축마처 헐어 버렸다.

혜화문은 1992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94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복원은 되었지만 혜화문은 더 이상 본래 의미의 문은 아니다. 문이라기 보다는 무슨 망루 아니면 정자 같이 5m는 됨직한 높은 석축 위에 덩그라니 앉아 있다. 그곳으로는 차는 커녕 사람도 일부러 올라가 보지 않는 한 지나 다닐 수 없다. 그렇게밖에 지을 수 없는 담당자들의 고충은 이해가 간다. 왕복 8차선이나 되는 길 가운데 어떻게 문을 내겠는가. 제자리를 찾아 복원을 한다면 현재의 숭례문―남대문이나 흥인문―동대문처럼 길 한가운데 들어앉아 교통 흐름을 방해나 하는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길 한 옆으로 비켜 복원할 수밖에 없는데, 그 지형이 길 좌우로 산기슭이니 하는 수 없이 이렇게 절벽 위에 올라 앉힐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복원된 혜화문이 눈에 차지 않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지옥’으로 불리는 서울의 교통 사정에서 볼 때 어찌보면 옛 성문을 복원하는 것 자체가 사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허겁지겁 사는 데서 벗어나 좀 여유를 부리는 데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때때로 사치가 필요하기도 하다. 단 그 사치가 허영이 아닌 제대로 멋을 부리고 진정한 즐거움을 맛보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복원은 되었으나 외면당하고 있는 혜화문은 이런 문제를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