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 만조백관은 간 데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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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조백관은 간 데 없고

홍순민(중세사 2분과)

“천하의 일이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않으면 폐하여지는 것은 필연적인 이치입니다. … 옛 학자께서 말씀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돌보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 도리를 묻고, 저녁에는 법령을 다듬고, 밤이면 몸을 편안히 하는 것, 이것이 임금이 부지런히 해야 할 일들이다. 또 말씀하기를 현자를 구하는 데 부지런히 하고 현자를 임명하는 데 빠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도전의 말이다. 정도전은 조선을 개창하는 데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람이다. 그는 경복궁을 짓는 일도 주도하였고, 당시로서는 당연히 그 궁궐과 전각의 이름을 짓는 일도 맡았다. 그럴 때 정도전은 근정전과 근정문의 이름에 임금이 갖추어야 할 도리, 치자의 덕목을 정사에 부지런히 하라(“勤政”)는 말에 함축하여 태조에게 간언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근정전은 왕의 건물, 왕의 존엄을 드러내기 위한 의식용 건물이었다. 그런만큼 경복궁에 있는 건물들 가운데서 그 크기와 치장이 가장 장대하고 화려하였다.

지금 보아도 근정전은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의 근정전은 태조 때 지은 건물은 아니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버렸고, 지금의 것은 고종 초년 흥선대원군이 주도해서 지은 건물이다. 그러므로 지금 근정전은 19세기 중반의 시대 분위기를 담아 훨씬 더 크기가 커지고 치장도 화려해진 것이다. 크고 화려해지기는 했지만 오늘날 근정전에서 선초 정도전이 그렸던 치자의 철학, 임금의 위엄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 근정전을 보려면 동쪽 주차장을 지나 매표소를 거쳐, 웬만해선 이것이 다리인지 아닌지 의식조차 하지 못하게 놓여 있는 웬 돌다리―영제교(永濟橋)를 건너, 어떤 문을 들어서게 되어 있다. 그 문은 얼핏 보면 옛날 문 같으나, 실은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의 한 귀퉁이 벽을 뚫어 낸 것으로서, 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참 아리송한 시설이다. 아무튼 그 문 아닌 문을 들어서면 근정전이 보인다. 보이긴 보이는데 정면이 아니라, 엉뚱하게 오른쪽 뒤 그늘진 모서리부터 보인다. 사람으로 치자면 누구를 처음 만나는데 얼굴이 아니라 뒤통수부터 보는 셈이다. 그러니 근정전, 더 나아가 경복궁의 첫인상이 제대로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에돌아 갈 게 아니라 광화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지금 헐어 버린 총독부청사 터를 밟고 지나 근정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근정전을 만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수 없으니, 우선 옆구리를 튼 문 아닌 문을 들어섰다 하더라도 근정전 뒤통수부터 보지 말고 둥근 기둥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회랑을 따라 천천히 반바퀴를 걸어 돌아 남쪽 근정문 앞으로 가서 서 보시라. 그 자리에서 근정문을 열고 들어섰다 생각하고 이제 고개를 들어 근정전의 정면을 바라보시라.

근정전부터 보지 말고 그 뒤 좌우 먼 산을 바라보면 백악이 어머니의 품이 되고, 인왕이 부드러우나 힘있는 팔이 되어 근정전을 보듬고 있는 형국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당기면 그렇게 감싸 안긴 근정전이 행복한 듯 나래를 펴며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그 근정전을 감싸 호위하고 있는 회랑이,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마당에 깔린 평평한 돌들이,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품계석이, 높은 이층 기단이, 기단에 둘러쳐진 돌 난간이, 난간 요소요소에 앉아 있는 돌짐승들이, 한껏 치장한 근정전의 단청과 창살 등 세부 모습이, 이 모든 것들이 어울려 빚어내는 조화가 좌악 다가온다.

그리고 더 눈을 크게 뜨면, 아니 눈을 감으면, 저 근정전 안 용상에 앉아 계신 임금과 이 뜰에 가득 들어선 만조백관과 호위하는 군사들과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들과 시립한 여러 관리, 노복, 궁녀, 내시들이, 그들이 연출해 내는 엄숙한 의식이 보인다. 이 근정전의 앞 마당,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평평한 돌이 깔린 그곳이 바로 조정(朝廷)이다. 근정전은 그렇게 조하(朝賀)를 비롯하여 국가적 의식 행사를 치르던 경복궁의 정전이다. 그 근정전에 지금은 임금도 만조백관도 간 데 없고, 내외 관광객들만 건성건성 지나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