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민예(民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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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민예(民藝)인가?

서명일(근대1분과)

   “가령 조선이 부흥해 에도성이 헐린다고 생각해보라.
누가 에도성(江戶城)의 죽음 앞에 슬퍼하지 않겠는가?”

  지난 11월부터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는 일본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철거위기에 놓인 광화문을 바라보며, 조선이 강대해져 일본의 궁성(宮城)인 에도성을 허물어버린다면 일본인의 마음이 어떨지 되물으며 광화문의 보존을 역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어로까지 번역·소개된 그의 글은 여론을 촉발시키며 광화문을 철거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도자기에 매료되어 이 땅을 처음 밟은 이래 3.1운동을 옹호하는 등 일본의 무력적인 식민지배를 비판하며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을 알리는데 힘을 기울인 까닭에 그는 조선을 사랑한 양심적 지식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 결과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1889~1961 – 사진출처 : 일민미술관)

  잘 알려진 것처럼, 야나기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민예(民藝)’라는 말을 만든 장본인이다. 익살스런 호랑이 그림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민중들의 그림에 ‘민화(民畵)’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도 역시 그였다. ‘민중의 공예’를 뜻하는 민예라는 말 속엔 수 천년을 이어온 귀족적 예술에 대한 염증과 자본주의 시대에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몰개성의 공장제 생산품에 대한 반발이 담겨 있다.

  그는 인위적인 감상용 작품이 아니라, 현실의 필요가 만들어 낸 민중의 소박한 생활용품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쓰임이 없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는 그의 유명한 명제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 결과 대량생산 체제가 진척된 일본보다는 산업화의 손때가 덜 묻은 식민지 조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국보처럼 떠받들어온 다기(茶器·이도다완)가 조선에선 평범한 막사발에 불과한 것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게 조선의 미적 정체성은 민중의 소박한 삶 속에 베어있는 자연스런 아름다움에 있었다.

  이번 특별전 역시 허름한 찻잔과 삐뚤어진 항아리, 각종 짚공예품과 목기류 등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저 평범한 생활도구들로 보이지만 당대 최고의 미학자였던 야나기의 눈에 든 것들이어서 그런지, 전직 국립중앙박물관장의 친절한 해설을 곁들인 작품소개란이 일간지 지면을 장식하고, 스타급 미학자들의 관람평이 이어질 만큼 예술성을 인정받는 모양이다. 그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조선시대의 막사발과 목조편구(사진출처 : 일민미술관)

  하지만 안타깝게도 찌그러진 항아리를 보고 예술의 향기를 느낄만한 심미안은 없는지라 ‘이 얼마나 아름답지 않냐!’는 말들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게 사실이다. 감수성이 부족하면 사람이 삐딱해지기 마련이다. 지난 한 시절 야나기를 식민사학의 이론가 정도로 폄하하며 맹렬히 비판했던 적이 있지만, 조선의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분명 애정과 존경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가 조선의 문화적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민예품들이 정작 대다수 조선 사람들에겐 하루하루 반복되는 고단한 일상의 일부에 불과했단 사실이다. 자신이 매일 접하던 것들이 어느 순간 ‘예술’로 칭송될 때, 예술로 둔갑한 생활용품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 겉으로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속으론 “무슨 이 따위 것들이 예술이냐”고 빈정대지나 않을까? 생활의 궁핍함을 이기지 못하고 도시로 혹은 만주로 떠나가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용한 막사발과 주전자, 그리고 그들의 헤진 옷을 기워 입던 목각실패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여유가 있었을지 의문이다.

  민예에 대한 관심은 아무 개성없이 대량생산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생활용품들에 대한 반발에서 촉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아직 공장제 대량생산품에 질릴 만큼 충분한 자본주의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 요컨대 前자본주의적 일상이 남아있는 조선에서 민예론은 일부 지식인의 고상한 취미생활에 머물 공산이 크다.

  민중이 느끼지 못하는 민예론은 일종의 권력이다. 매일같이 사용하던 항아리가 낯선 외국인의 입을 통해, 그것도 조선을 식민지배하고 있는 일본 지식인의 입을 통해 예술품으로 칭송될 때, 좌우 대칭조차 맞지 않는 항아리를 두고 예술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사람들은 일순간 미적(美的) 무지렁이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은 곁에 두고도 예술품을 몰라본 자신을 질책하며 개안(開眼)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식민지란 조건에서 민예론은 정치적으로 악용될 여지가 다분하다. 조선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려던 야나기의 본 뜻과는 달리 식민지배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고 소박한생활용품에서 미적 정체성을 발견하는 민예론이 이미 ‘내지’(內地)로 편입된 조선을 보편성이 결여된 향토색 짙은 ‘지방’문화로 설명하거나 자본주의적 전망을 결여한 저발전의 증거로 설명하는데 유용한 이론적 토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3.1운동을 옹호한 이후 총독부의 요주의 인물로 감시당하던 야나기였지만, 그가 조선에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문화정치’가 마련한 틈바구니 때문이었고 조선에서 그의 연설이 열릴 때면 언제나 총독부의 지원이 이어졌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을 사랑했고 자신이 사랑한 조선의 아름다움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전시의 부제이기도 한 “야나기가 발견한 조선”은 어디까지나 조용하고 소박한 시골마을에 불과하다. 귀족적 예술과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시스템에 대한 반발이 그를 조선으로 이끌었지만, 정작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있던 조선 사람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가 외면한(?) 호사스럽고 휘황찬란한 것들이 아닐런지.

  야나기가 조선의 아름다움을 탐색하기 이전, 조선의 문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고려청자나 금속활자 등을 거론하며 문화적 자긍심을 드러내곤 했다. 아마도 서구와 같은 문명국임을 증명하기 위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크고 화려한 것들을 찾게 된 까닭일 것이다.

  야나기가 조선에서 소박한 민예품을 발견하는 동안 이 땅의 사람들은 그것과는 전혀 다른 고려청자에 시선을 빼앗긴 셈이다. 민예품과 고려청자의 차이는 그들이 딛고 선 조건의 차이를 말해준다. 끊임없이 ‘문명’임을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과 서구적 문명에 반기를 들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외부를 관찰하는 사람의 차이랄까? 흔히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지만, 똑같이 사랑하면서도 그들이 발 딛고 서있는 곳이 어디냐에 따라 보이는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