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사람들] 왕인(王仁)을 통해 생각해 본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와 동아시아 연안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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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인(王仁)을 통해 생각해 본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사회와 동아시아 연안항로

왕인은 어떤 사람인가?

왕인은 고대 일본(왜)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준 백제의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는 중국의 문자와 학문을 수용하여 이를 왜에 전파한 문화 선각자이자 문화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을 만하다.

ꡔ일본서기ꡕ나 ꡔ고사기ꡕ와 같은 일본 고대 사서에서는 왕인의 문화 전파자로서의 공적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하면서 그를 일본 학문의 시조[서수(書首)]로서 대서특필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 사서에서는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왕인에 관한 한, 전적으로 일본 사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정작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왕인에 대한 정보, 예컨데 왕인의 출생지, 성장과 학문 연마의 과정, 그리고 도일(渡日)의 루트 등에 관련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아예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이랄까. 언제부터인가 영암 군서면의 구림마을에 왕인의 탄생과 도일에 이르는 자세한 설화가 전해오고 있어서, 그의 행적을 추적할 일말의 실마리만이라도 이 설화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영암 구림마을에 전하는 왕인 설화

구림마을은 영암 월출산 서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마을 앞에는 영산강 하구로 곧바로 흘러들어가는 마지막 지류인 영암천이 흐르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세를 이루고 있다.

바로 이곳에 왕인과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그런데 이 설화는 왕인의 탄생, 성장과 학문의 과정, 그리고 도일에 이르는 총체적 이야기가 구체적인 지명이나 사물 등에 결부되어 전하고 있어, 근거없는 예사 설화와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구림마을의 별칭인 성기동(聖起洞)은 그의 성스런 탄생과 관련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 책굴(冊窟)이라 불리는 자연 석굴은 그가 자라면서 학문에 정진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책굴 바로 앞에 있는 석상은 왕인석상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 자리잡은 양사재(養士齋)는 왕인이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전한다. 뿐만 아니다. 상대포(上大浦)라는 포구는 후에 왕인이 일본으로 떠났다는 곳이고, 상대포에 이르는 길목에 있는 돌정고개는 왕인이 일본으로 떠나면서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이별의 아쉬움을 표한 곳으로 전한다.

우리의 문헌 자료에 전무한 왕인에 대한 설화가 이처럼 구체성을 띠면서 구림마을에 전한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왕인에 대한 어떠한 설화도 구림마을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렇지만 이를 그대로 사실로 믿기에는 주저되는 바도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설화에 불과하다는 점, 더욱이 그 설화가 조선시대까지 어떠한 사서나 지리서에서도 채록된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설화가 처음 입록된 것은 일제시기인 1920년대에 편찬된 ꡔ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ꡕ의 성기동조에서 “백제 고이왕대에 왕인이 여기에서 탄생하였다”고 기록된 것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혹자는 구림마을의 왕인 설화는 옛부터 전해져 온 것이 아니라 1920년대에 ꡔ조선환여승람ꡕ의 편자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된 것으로 보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설화를 조작한 동기가 확인되지 않고 있고, 성기동과 책굴과 양사재와 상대포와 돌정고개 등과 결부된 왕인 설화가 구체성과 총체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이를 단순 조작으로 치부해 버리는 것도 아쉬움을 남긴다. 그래서 이 설화가 의미하는 바를 서남해지방의 해양사적 위치와 관련지워 추론해 보는 것은 왕인의 새로운 이해에 전혀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왕인의 도일(渡日) 시기

왕인이 영암 구림마을에서 태어나 중국의 문자와 학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일본에 전파했다고 한다면, 이는 서남해지역이 차지하는 해양교류사적 역량이 상당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왕인의 도일 시기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본의 고대사서 ꡔ고사기ꡕ에 의하면 백제의 조고왕(照古王)이 현인(賢人)을 보내달라는 일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와니[和邇]란 인물을 보내어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전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가 왕인이다. 또한 ꡔ일본서기ꡕ에 의하면 응신천황(應神天皇) 16년 6월에 일왕의 요청으로 백제의 왕인이 도착하여 태자[菟道椎郞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ꡔ일본서기ꡕ의 기년에 따르면 응신천왕 16년은 서기 285년(백제 고이왕 52년)에 해당되고, ꡔ고사기ꡕ에 나오는 조고왕은 흔히 백제 근초고왕(재위기간 346~374년)으로 비정되는 인물이므로, 양 사서에서 표명한 왕인의 도일 시기는 상당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일본 고대사서의 기년(紀年)이 그만큼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례이다. 일반적으로 ꡔ일본서기ꡕ 응신기(應神紀)의 기년은 2주갑(周甲, 120년) 내려서 재조정해야만 실연대에 부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왕인이 도일한 연대는 405년(285+120)으로 재조정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말하면 왕인의 도일 시기는 3세기 말, 4세기 중․후반, 혹은 5세기 초반의 세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필자는 이 중 5세기 초반설에 비중을 두고 있다.

3~5세기 영산강유역의 해양사적 위치와 왕인

왕인의 도일 시기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겠는데, 이를 모두 포괄해도 3~5세기로 압축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서남해지역의 해양사적 위치를 살펴보는 것은 왕인 설화의 사실성을 뒷받침해 주는 하나의 실마리를 모색하는 길이 될 것이다.

먼저 ꡔ삼국지ꡕ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서해와 남해를 연결하는 위치에 있는 서남해지방은 3세기 단계에 한․중․일을 연결하는 동북아 연안항로의 주요 요지였음이 시사되어 있다. 그리고 해남 백포만 연변(沿邊)의 군곡리패총과 두모패총 등은 그 중요한 물증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ꡔ진서(晋書)ꡕ의 장화열전(張華列傳)에 의하면 282년에 20여 국에 달하는 신미제국(新彌諸國)이 집단적으로 진(晋) 왕조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는데, 신미제국이란 서남해지역에 산재해 있던 세력집단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보면 적어도 3세기부터는 서남해지역에 중국대륙 및 일본열도와 교류하던 유력한 해양세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이 지역에 산재해 있는 ‘옹관고분’이 확인되면서, 이를 서남해지역 해상세력 존재의 고고학적 물증으로 주목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옹관고분’은 영산강유역과 서남해 바다를 따라서 분포하고 있는 이 지역 특유의 고분으로서, 이 지역에 강과 바다를 통로로 하여 정치적 연대망을 형성했던 독자적 해상세력의 존재를 강하게 시사해주고 있다. 더욱이 ‘옹관고분’의 존속 기간이 3세기~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고 있어서, 왕인의 도일 시기와 정확히 맞물려 있다.

이 점을 주목한다면 왕인은 옹관고분을 축조한 서남해지역의 해상세력과 관련된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설화 상에 왕인의 고향으로 전하는 영암 구림마을은 옹관고분의 핵심 분포지인 영암 시종면과 지근(至近)한 거리에 있어, 왕인이 구림마을에 실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은 없다고 여겨진다. 또한 설혹 설화 상의 왕인을 구림마을의 역사적 실존인물로 간주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연안항로를 통해 중국 선진문화를 수용하고 이를 일본에 전파해준 일반적인 고대 해양세력이 서남해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만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왕인을 특정 고유인으로서가 아니라 연안항로를 통해 동북아 문화교류를 매개해준 상징적인 인물로서 간주하면 어떨까 한다.

강복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