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1908~1945 일제의 임야소유권 정리와 ‘민유림’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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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1908~1945 일제의 임야소유권 정리와
‘민유림’운영」
(2008. 2.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최병택(근대사 분과)

  이 논문은 일제에 의하여 시행된 임야소유권 정리의 결과와 그 이후 수립되었던 삼림정책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주목하여 이를 밝히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조선총독부의 산림정책과 임야소유권 정리 등의 문제는 그다지 주목받는 주제가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지배와 더불어 임업문제를 매우 중시하고 이른 시기부터 관련 정책을 마련할 정도로 산림문제에 적극적이었다. 산림녹화라는 문제는 미곡생산과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일제로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을 터이다.

산림관리는 정책당국자 뿐만 아니라 농민의 입장에서 보아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농가경제는 ‘바닥풀’ 등의 녹비재료와 장작을 확보하지 않고서는 성립되지 아니한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임산자원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국가정책상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로 꼽혀왔던 것이다.

필자는 산림이 지니는 이러한 의의에 착안하여 일제 산림정책의 특징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논문작성을 시작하였다. 산림정책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임야의 소유권문제를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야소유권에 관한 기존의 연구성과들은 대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분석경향을 따라 일제가 사유지를 대거 국유지로 ‘강탈’하였음을 논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던 바 필자는 사료분석과정에서 그러한 기존의 해석이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임야소유권의 정리 결과 실제로 국유지가 늘어났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필자는 2006년부터 2년간 경기도 내 여러 시지역의 시사편찬위원회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는 한편 국가기록원 소장 데이터베이스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임야조사부를 분석하였다. 필자가 입수한 자료는 경기도 시흥군, 고양군, 양주군 일대의 임야조사부였는데 이들 자료를 확인한 결과 일제가 국유림을 확대하기 보다는 사유림을 늘리려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임야소유권을 정리하는 정책은 1908년부터 실시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제는 대한제국 법령 형태로 <삼림법>을 공포하고 조선인들이 각자 점유하고 있던 임야를 신고하도록 하였다. 원래 조선왕조는 ‘與民共利’의 원칙을 표방하여 山林川澤의 경우 그 소유를 엄격히 제한하였다. 물론 그 원칙에도 불구하고 분묘 금양 등의 방법으로 오랫동안 산림을 점유한 경우가 많았는데 일제는 바로 이들 점유지를 사유지로 인정하기로 하고 신고절차를 밟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임야에 세금이 매겨질 것이라는 풍문이 돌아 실제로 신고를 필한 경우가 적었다. 이러한 임야는 국유림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렇게 국유로 편입된 임야를 그대로 국유지로 계속 관리하지 않고 곧바로 사유지로 귀속시키는 정책을 구사하였다.

국유편입지를 사유지로 되돌리려는 정책은 1911년 조림대부제도를 필두로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조림대부제도란 원래의 연고자에게 조림의 의무를 부과하고 계약기간 내에 조림을 성공한 것으로 인정되면 해당 임야에 대한 소유권을 완전히 양여하는 제도이다. 이 조림대부를 시행하기에 앞서 일제는 먼저 국유편입지 가운데 계속 국유로 남겨둘 것과 민간에게 돌려줄 것을 가르는 ‘구분조사’를 시행하였고 ‘구분조사’ 결과 원래 점유자가 있는 곳은 그 점유자에게 대부하고, 점유자가 없는 동시에 민간에게 돌려줄 것으로 구분된 임야는 일인자본가 등에게 이를 대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조림대부정책은 처음 그다지 호응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조선인 연고자들은 재산적 가치가 그리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 임야를 대부받게 되면 즉시 조림비용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이를 꺼렸던 것이다. 때문에 일제는 “극력으로 이를 권유”한다는 등 사실상 거의 강제적으로 대부정책을 관철해나갔다.

조림대부제도가 시행될 무렵이었던 1917년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이 종료되자 임야조사사업에 돌입하여 임야의 점유자로 하여금 다시금 소유권 신고를 이행하도록 하였다. 이 때는 토지조사사업과 마찬가지로 地主總代를 동원하여 상당히 철저히 소유권신고서를 제출하도록 독려하였고 심지어 지적신고서를 제출하지 않은 곳도 사유권을 인정하였다.

임야점유자가  만일 조림대부를 먼저 받았다면 조림대부계약을 먼저 인정하는 방식으로 조림대부제도와 임야조사사업을 조정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렇듯 일제는 임야조사사업과 조림대부제도를 통하여 국유로 편입된 연고임야를 원 연고자에게 대거 돌려주었던 것이다. 1926년에는 아예 <조선연고삼림특별양여령>이라는 법령을 공포하여 증빙자료 부족 등의 이유로 소유권을 인정받지 못한 곳을 거의 대부분 원래의 연고자에게 돌려준다는 방침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제가 사유지를 대거 법인한 것은 임야소유자들에게 식림비용을 부담시키고 삼림조합비를 부과하여 郡재정을 확충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임야소유자로 ‘인정’된 사람들은 삼림조합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삼림조합비와 묘목대금 및 기타 잡부과금을 부담하여야 하였다. 임야조사사업 등의 임야소유권 정리과정은 사실상 이 삼림조합을 운영하기 위한 정비작업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삼림조합은 산림녹화를 명분으로 조합원에게 조합비를 거두었지만 실상 그 녹화대책이라는 것은 소유자들이 자기 소유지에 입산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이른바 ‘금벌주의’를 관철하는 데에 머물렀다. 조합비는 거의 모두 군청직원의 급여나 사무비로 전용될 뿐이었다.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삼림조합을 “직업기관에 불과”하다고 비꼬기도 하였다.

삼림조합이 부과하는 각종 부과금은 가난한 조선 농민들로서는 부담하기 어려운 액수였다. 때문에 1930년대 초반에 이르면 조합비 납부를 거부하는 움직임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급기야 단천군에서는 삼림조합비를 내지 아니한 조선인들에게 경찰이 폭력을 행사한 데에 항의하던 농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던 중 13명이 총에 맞아 숨지는 참극이 발생하였다. 당시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와 함경도 일대에서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서울에서도 격문이 나붙을 정도였다.

일제는 “소유권을 가진 자는 이에 합당한 의무를 져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며 임야소유자들에게 산림녹화의 제반 의무를 다하라고 요구하였고, 그들이 생활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하였던 녹비재료, 장작 등의 채취를 일방적으로 금지하였다. 조선인들은 자신들의 재산권과 생존권이 위협받는 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삼림조합에 대한 불만이 커져가자 일제는 1933년 이른바 <민유림지도방침대강>을 발표하여 사유산지에 대한 입산을 더욱 통제하고, 삼림조합을 해체하는 대신에 조합비를 임야세로 대체함으로써 거납행위에 더욱 강경히 대처하였다.

이상과 같이 사유지 법인 이후 시행된 각종 정책은 지식인과 국가가 전통적으로 표명해왔던 산림의 공공성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된 것이었다. 전통시대에는 산림이 ‘여민공리’의 대상지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산물을 제한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국가가 금하지는 않았다.

가난한 농민이 가장 마지막으로 그들의 생계를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산림이었기에 위정자들 역시 그러한 현실을 인정하였던 것이다. 이른바 ‘근대적 소유권’의 확립이라는 구호 아래에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은 그러한 공공성 원칙을 ‘후진적 관행’으로 매도할 뿐이었다.

이들 사유산지에 대한 정책 이외에 필자는 촌락공용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진행하였다. 촌락공용림은 일본연구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른바 ‘입회지’와 비슷한 성격의 임야이다. 자연촌락의 주민들이 부근 산지를 금양, 관리하면서 이를 경제적, 문화적으로 이용하는 관행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있었다.

최근 연구성과 가운데에는 한국에서 ‘입회지’가 존재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필자는 실제로 촌락공용지 즉 이른바 ‘입회지’가 존재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먼저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구 중추원문서의 관계자료를 열람하는 동시에 일제시대 당시의 신문, 면세입세출예산서 등에서 산림금양의 사실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마을을 몇 곳 선정하여 실지조사를 행하였다.

필자가 촌락공용림의 이용관행과 일제시기 그 처리의 추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방문한 마을은 경상북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임곡리, 충청북도 제천시 백운면 평동리, 충청북도 진천군 장관리, 전라남도 장흥군 용산면 운주리, 경상남도 김해시 상동면 여차리, 경기도 군포시 삼성리 일대 등이었다.

이들 지역에 대한 실지조사는 대개 해당 동리 이장의 협조를 받아 연장자를 방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는데, 다행히 이장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구술자료를 다량 축적할 수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필자의 조사에 관하여 정보를 접한 지역주민들의 요청으로 해당 촌락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제천시 평동리 촌락공용림 67-1번지 일대의 (구)임야대장으로 평동리 소유 임야의 소유자가 1931년도에 백운면으로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지역에 대한 조사결과 필자는 조선후기 이래 촌락공용지가 다수 출현하였고 동계 혹은 송계가 ‘풀령’ 등의 관행을 준수하는 방식으로 이들 산지를 금양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들 임야를 임야조사사업 당시에 행정동리유 재산으로 규정하는 한편 1920년대 말부터는 面有재산으로 강제 편입하려 하였다. 이들 임야를 면유재산으로 편입하게 되면 향후에 임산물 판매를 통하여 면재정을 확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 일제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면유재산화 조치는 지역주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에 부딪혀 제대로 이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가 확인한 사례들에 의하면 관행적으로 주민들이 계속 금양, 이용하는 대신에 서류상으로만 면유재산으로 편입된 것이 다수였기 때문이다. 촌락림을 면유재산으로 빼앗긴다는 것은 농민들로서는 매우 심각한 위기였다.

  따라서 이에 폭력을 동원하여 항의하는 경우가 빈발하였던 것인데, 행정당국자들은 이 때문에 수구막이 ‘마을숲’ 등 풍수지리 혹은 마을신앙의 대상으로서 벌목이 절대 금지된 곳을 면유재산화하여 상부에 보고하는 편법을 택하거나 소유자 명의만 변경하고 그대로 촌락이 이용하도록 내버려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변칙적 처리는 해방 이후 그대로 이어져서 지금까지 각지에서 소유권을 둘러싼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다.

민유림에 대한 정책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의 돌입과 함께 전면적 공출체제로 변모하였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목재수요에 대응한다는 명분 아래에 조선인 소유 임야를 적극적으로 벌채하였다. 이로써 ‘금벌주의’는 폐기되고 산림에 대한 무차별적인 벌목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일제는 이 당시 산림을 ‘공익’의 목적에 동원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공익’이라는 것은 조선인들의 경제적 이익으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로 대변되는 자신들의 이익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이 아니었다. ‘국책’ 혹은 ‘공익’이라는 이름 하에 조선의 임야는 ‘금벌’과 ‘공출’을 오가는 극단적인 정책을 경험하여야 했고 조선인들은 다액의 삼림조합비와 임야세를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일제는 외형상으로는 임야에 대한 배타적인 ‘1물1권’주의를 관철하였지만 이러한 이른바 ‘근대적’ 정책은 기존의 ‘共利’관념을 부정하고 ‘국익’이라는 이름 하에 소유자들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근대적’ 정책은 민인에게 산림천택의 이익을 분배한다는 기존의 통치관념과 배치되는 것인 동시에 조선인의 경제적 이익을 제한하는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