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高麗 元宗代 麗·蒙 關係와 東寧府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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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高麗 元宗代 麗·蒙 關係와 東寧府 설치」
(2015.2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강재구(중세 1분과)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은 1270년(원종 11)~1290년(충렬왕 16), 약 20년 간 고려의 북계일대에 존재했던 “동녕부”의 설치 과정과 목적에 대하여 다루었다. 동녕부는 쌍성총관부, 탐라총관부와 같이 고려 영역 내에 설치된 몽골의 관부라는 중요성 때문에 일찍부터 연구자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주로 몽골의 부당한 영토침탈이나 ‘간섭’의 실례로서만 다뤄져 왔을 뿐, 본격적인 검토가 이뤄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한계는 우선 ‘동녕부의 실체’에 대하여 전해지는 사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다. 필자 역시 그러한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논문은 부족하게나마 그간의 고민에 대한 첫 번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동녕부’는 그리 새로운 연구주제가 아니었다. 선행 연구에서는 몽골의 ‘동녕부’ 설치를 ‘이이제이(以夷制夷)’로 파악하였다. 즉, 몽골이 강제로 고려의 영토를 편입시켰다는 점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고려 내의 정치 격변-임연의 원종폐위사건과 최탄 등의 북계반란-이 직접적 원인이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원인이 되었던 두 사건이 어떻게 동녕부 설치로 이어지는지는 명쾌하게 해결되진 않았다.

필자는 먼저, 강화 성립 이후 고려-몽골 관계의 궤도 위에서 임연의 원종폐위사건과 최탄 등의 북계반란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동녕부 설치의 배경을 해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김준·임연으로 이어진 무신정권의 잔존과 강화 이후 고려와의 관계를 장악하여 남송·일본 정벌과 같은 동방정책에 활용하고자 했던 쿠빌라이 간의 갈등 요인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무신정권과 결탁하면서도 몽골과의 관계를 주도하여 왕권의 회복을 꾀했던 국왕 원종까지 세 정치주체(원종, 무신정권, 몽골)의 이해관계가 충돌 혹은 봉합되는 양상을 통해 동녕부 설치로 귀결되는 일련의 정치 격변에 대한 해명을 해보고자 했다.


[그림1] 원 세조 쿠빌라이 초상 ⓒ네이버 캐스트(‘충렬왕’, 2010.05.09)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쿠빌라이는 왜 동녕부를 설치했는가」였다. ‘동녕부’ 설치는 몽골의 정책이었고, 그 결과 북계일대가 고려로부터 분리되었으므로 ‘이이제이’정책의 일환이라는 선행 연구의 지적은 타당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진 않았다. ‘이이제이’의 일환이라면, 그것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정책적 목적을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동녕부’ 설치라는 정책을 통해 몽골, 즉 쿠빌라이가 얻고자 했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려 했다.

나름의 큰 포부를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지만, 그 과정은 녹녹치 않았다. 앞선 연구 이상의 논의가 가능할지, 이 논문이 과연 연구사적인 의의가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언제나 필자를 괴롭혔던 것 같다. 그렇게 갈피를 못 잡고 있을 때, “편견 없이 처음부터 사료를 다시 보라”는 지도교수님의 조언에 따라 도서관에서 『고려사』를 읽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그림2] 『고려사』 원종 11년 2월 정축 동녕부 설치 기사 ⓒ누리미디어 고려사 이미지 편집

「詔令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라는 기사가 눈에 띠었다. 동녕부의 설치를 전하는 이 사료는 그동안 너무도 평범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필자 역시 그동안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그날만큼은 전혀 달라보였다. 이 기사는 정형화된 구절로 국내외 관련기사에서 거의 빠짐없이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이 기사는 항상 이렇게 묶여서 기록되어 있을까.’ 특히,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동녕부를 두었다는 것과 자비령을 경계로 삼았다는 두 사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 기사는 항상 서로 붙어서 기록되었던 것은 아닐까?

이런 발상들로부터 필자는 쿠빌라이가 동녕부를 설치한 의도가 단순히 고려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자비령을 경계로 동녕부의 영역을 명확히 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자비령 이남의 고려 영역에 대한 보존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동녕부는 ‘이이제이’ 정책의 일환이기는 했지만 더 큰 목적인 고려-남송-일본을 포괄하는 동방정책의 정책적 수단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었다. 즉, 남송·일본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고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쿠빌라이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필자는 동녕부의 지정학적 위치에 주목하였다. 동녕부가 설치되었던 북계일대는 고려전기 이래로 북방의 침입으로부터 내지를 보호하는 완충지적 역할을 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동녕부가 설치되며 고려에게는 북계지역의 고유한 군사적 기능이 상실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지만, 반대로 몽골로서는 고스란히 그 기능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효과는 당시 요동지역에 근거하여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던 동방 3왕가에 대한 쿠빌라이의 견제로 이어진다. 즉, 쿠빌라이는 요동의 동방 3왕가가 고려로 진입하는 길목인 북계지역에 동녕부를 설치하여 요동세력이 고려 방면으로의 세력 확대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쿠빌라이가 동녕부를 설치했던 이면에는 우방인 고려왕조를 보호하고 이를 활용하고자 했던 포괄적인 정책목적이 반영되어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상 필자의 논문에 대한 개략적 소개를 마쳤다. 사실 논문을 준비하면서 보낸 시간과 나름의 고민, 그리고 논문의 디테일까지 짧은 소개글에 담지 못하여 아쉽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정리가 될 만큼 필자의 내공이 미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필자가 답하고 싶었던 질문은 「고려와 몽골, 서로는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가」였다. 부족하지만 이 논문이 앞으로 그 어려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첫 성과로서 작게나마 의미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