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좌익세력’에서 ‘민주인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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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세력’에서 ‘민주인사’로

한상권(중세사 2분과)

1. 급진좌경 사상을 갖고 학교와 재단 전복을 기도하였다

1991년 6월 초 한 통의 우편물이 집으로 배달되었다.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장이 보낸 [교원 징계의결 요구사유 통지]였다.


<사진 1> [교원 징계의결 요구서](평협백서 246쪽)

  통지서에는 징계의결 요구자의 의견이 적혀 있었다.

(인문과학대학 사학과 조교수 한상권은) 평교수협의회의 2대회장을 역임하고 평교협에서 가장 주도적 역할을 하여 학내분규를 조장, 선동하였으며 “역사는 민중혁명에 의해서 발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학생들의 투쟁열기를 고취시켜 혼란과 무질서로 학교와 재단 전복을 기도하여 교수, 학생, 직원이 주도하는 대학을 지향하는 음모와 선동으로 해교행위를 하였기 징계의결을 요구함.

이어 이사장 명의로 작성된 [징계사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징계사유가 기재되어 있었다.


1. 징계혐의자 한상권은 1988.10.11 일부 교수들에 의하여 “교권을 확립하고 연구 활동을 진작시키는 동시에 학교운영을 민주화함으로써 대학사회의 진정한 주체로서의 일익을 담당하고자 한다”는 명목 하에 조직된 소위 평교수협의회(이하 “평교협”이라고 함)의 초대 운영위원으로 또한 2대 회장을 역임하면서(1989.3.1-1990.3.15) 평교협 창립당시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활동하고,

일면 1989.7.5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이하 “민교협”이라고 함)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라고 함) 대학위원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1987년 이후의 수차의 교수들의 시국성명에도 참여하였는바, 평소 “역사는 민중혁명에 의해 주도된다”는 급진좌경사상을 갖고 학내 제반 문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으로 불평, 불만을 일삼아 왔고 학내문제 발생 시에는 학생들로 하여금 투쟁으로 대처하도록 선동을 서슴치 않고 대외적으로도 교내문제를 신문에 게재하여 학교의 명예와 권위를 실추시키는 행위를 한 자인바,

(1) 성명 및 공개질의를 통한 학내분규 조장 (2) 재임용 탈락교수의 재임용 요구 등으로 인한 분규 조장 (3) 교원승진인사에 대한 불만 행동 (4) 사학과 조교추천 문제에 있어서의 항명 (5) 집단항의농성 등 (6) 입시업무  방해 등 (7) 교수회의 참석거부 하는 등으로 사립학교법 및 교육관계법령에 위반하여 교원의 본분에 배치되는 행위를 하고, 교원으로서의 성실한 학생지도 등 의무에 위반하며,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를 한 것임

2. 징계혐의자는 위 징계 사유와 같은 행위로 활동을 계속하여 왔으므로 사립학교법 제58조 1항 제 4호, 동법 제55조, 국가공무원법 제56조ㆍ 제57조ㆍ제66조, 공무원 복무규정 제 3조, 사립학교법 제 61조 제 1항 제 1ㆍ2ㆍ3호 동법 제 61조 제 2항을 적용하여 파면으로 중징계 함이 마땅하나 아직 장래가 있는 젊은 교수이며, 1991년 1학기 동안 조교임명에 관한 항명사건을 제외하고는 과거와 같은 적극적 평교협 활동과 성명서 및 대자보 등에 의한 대학당국과 재단에 대한 비난공격 학생선동행위 매스컴을 통한 대학의 명예훼손 행위 등이 없었으므로 정상을 참작하여 정직 2월의 징계로 의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

섬뜩한 내용의 징계의결요구서를 받은 직후, 나는 학교 측의 징계사유를 반박하는「서면진술서」를 작성하여 6월 8일 덕성학원 교원 징계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사진 2> [서면진술서](평협백서 253쪽)

(1) ‘급진좌경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먼저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할 대학에서 이와 같은 이념시비가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징계사유서」에 기재된 저의 학내외 활동에 대한 모든 평가가 이와 같은 시각에 근거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이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개인적인 명예손상은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의 학문생활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에 한해서만은 명예회복의 차원에서라도 백일하에 명명백백히 밝혀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서면 진술서를 제출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소위‘급진좌경사상’의 시비를 밝히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제가 이른바 ‘급진좌경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어떠한 자료에 근거하여 도출하였는지「징계사유서」에는 분명히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근거를 보다 분명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2) ‘학교와 재단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주장에 대해

저는 평교수협의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2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이러한 활동을 하면서 연구시간을 뺏기는 것이 아까워 한때는 회의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내의 불합리한 점들을 지적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 또한 학교발전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징계사유서」에 쓰여진 것처럼 만약 본인이 평교수 협의회활동을 통해 ‘학교와 재단전복의 기도’와 같은 엄청난 음모를 꾸민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모험을 통해 제가 달성하려는 야심이 분명히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엄청난 음모를 꾸미느라 분주한 나머지 연구 활동을 태만히 하여 연구 실적이 저조하거나 연구내용 또한 형편없을 것입니다. 강의 또한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호히 말씀드리건대 저는 천성적으로 음모를 싫어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모든 행동을 철저히 공개주의적인 원칙하에 행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저의 생활철학이기도 합니다.

  본인은 평교수협의회 활동이 대학의 민주화 실현을 위한 학자적인 양심의 발로일 뿐, 어떤 사악한 야욕이나 불순한 음모도 작용하지 않았다고 감히 떳떳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3) ‘재임용 탈락교수의 재임용 요구 등으로 인한 분규조장’에 대해

저는 성낙돈 교수와 누구보다도 절친했습니다. 그와 같이 장래가 촉망되는 학자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키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 학교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본인은 성낙돈 교수에 대한 재임용탈락조치는 부당하며 즉각 철회되어야 한다고 당시 생각하였으며 이 판단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91년 5월 31일이라는 시점에서 이들 사항들을 징계사유로서 새삼스럽게 거론한다는 사실 그 자체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본인은 1991년 3월 1일자로 ‘인문대학 사학과 근무를 명’하는 재임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상기 사실들은 모두 본인이 재임용을 받기 이전에 발생한 일들입니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상기 사실들을 둘러싼 본인의 행동에 대한 평가는 저의 재임용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검토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임용을 한 지 3개월이나 지난 현 시점에서 상기 사실들을 다시 거론하여 징계를 하겠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본인은 재임용 이전 사실을 재임용 이후에 징계사유로 삼는 것은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3. 정직 3월(‘91.8.26-11.25)로 의결한다

  나의 반박으로 ‘급진좌경사상’ ‘학교와 재단 전복 기도’ 등의 죄목(?)은 빠졌다. 그러나 양형은 이사장이 요구한 것보다 1개월 늘어나 정직 3월이 되었다.

<사진 3> 징계처분 결정서(평협백서 257쪽)

나 외에도 평교수협의회 교수 5명이 정직, 감봉, 견책 등의 징계처분을 받았다.

<사진 4> 평교협 교수 6인 징계(*덕성여대신문 325호, 1991.9.2 *평협백서 244쪽)

성 교수의 복직을 약속한 학교가 평교수협의회 교수들에게 징계처분을 내린 처사는 신의와 성실의 원칙을 배반한 보복성 징계였다. 그럼에도 나는 교육부 징계재심위원회에 재심청구를 하지 않았다. 학교 측의 징계처분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억울함을 증명할 증거가 없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은 성 교수 복직 약속을 ‘문서’가 아닌 ‘구두’로 하였다. 문서를 요구하는 평교수협의회 협상대표단에게 학교 측 대표는 다음 이유를 들어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학교가 문서로 복직을 약속할 경우 문건은 공개될 것이고 그리하면 학교가 교수와 학생들의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는 비난을 다른 사학으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학교가 안팎의 눈치를 보느라 성 교수를 복직을 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 없다. 협상은 상호 신뢰가 중요하다. 교육기관인 학교에서 거짓말을 하겠는가. 만약 학교가 복직을 시키지 않으면 또 다시 일어나 싸우면 되지 않는가. 그리되면 학교가 명분을 잃고 위기를 자초한 꼴이 되는 것이다. 학교가 복직을 시키지 않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당시 평교수협의회는 비상총회를 열어 학교 측 약속의 진정성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였다. 학교 측의 약속을 믿고 농성을 해산하자는 주장이 21명, 학교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기만책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2명으로 협상안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이사장은 평교수협의회 투표결과를 전해 듣고, 협상안을 거부한 두 사람을 지목하여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이고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진노하였다고 한다).

이날 투표를 마지막으로 나는 평교수협의회 농성장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앞으로는 학내문제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연구생활에만 전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더 이상 학교 측과 불필요한 소모전을 하면서 연구생활을 침해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평교수협의회 회장은 참으로 이사장이 성교수를 복직시켜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내 연구실로 찾아와 학생을 설득하여 농성을 풀도록 하는 문제, 그리고 지금까지의 투쟁을 어떻게 마무리할 지 등을 의논하였다.

  나는 투쟁의 전 과정을 기록한 백서를 내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성 교수는 복직되지 않았으며 물론 활동백서도 나오지 않았다. 평교수협의회가 공식해체된 지 10년이 다 되는 2002년 3월, 나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자료를 모아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를 냈다.(평교수협의회는 학교 측의 집요한 탄압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1993년 3월 16일 자진해체했다.)


<사진 5>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

  백서 발간에 앞서 교수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前) 평교수협의회 교수님께

(前) 평교수협의회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아뢸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1987-1993년까지 활동한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 발간에 관한 건입니다.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는 마땅히 1990년에 발간했어야 하였으나 당시 경황이 없어 미처 발간하지 못하였기에 뒤늦게나마『평교수협의회 활동 백서(1987-1993)』라는 제목으로 발간하고자 합니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라 자료가 많이 유실되어 백서 발간에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지금까지 자료를 소중히 보관하신 분이 계셨고 당시 활동 상황을 덕성여대신문 등을 찾아서 보완하였기에, 현재 약 1500여 페이지(책 2권) 정도 분량의 자료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평교수협의회 회원으로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셨던 선생님께 다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평교수협의회 활동과 관련된 자료 중 보관하고 계신 것이 있으시면 보내주시면 자료가 겹치지 않는 한 백서에 첨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발간 비용이 예상외로 많이 들어 주문생산을 하기로 하였사오니, 평교수협의회 활동백서 소장을 원하시는 선생님께서는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 경우 선생님께서 1/n의 비용을 부담하셔야 합니다. 비용은 추후 말씀 드리겠사오나, 현재 복사비와 편집비, 제본비 등을 계산하면 대략 한 질당 5-10만 원 정도가 되리라 봅니다.

선생님께서 평교수협의회 활동 자료를 보관하고 계시거나 활동백서 소장을 원하시면 저에게 2월 20일까지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이 없으면 현재 확보된 자료에 의거하여 백서를 편찬할 것이며, 비용 분담의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참고로『평교수협의회활동백서(1987-1993)』 머리말을 보내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2년 2월 15일

(前)평교수협의회 2대(1989년) 회장 한상권 올림


나는 머리말에서『평교수협의회활동백서』를 뒤늦게 발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평협이 해체된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2001년 학원민주화 투쟁을 승리로 이끈 지금, 뒤늦게나마 평협 활동백서를 내는 것은 다음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의 연원과 전통을 기록을 바탕으로 역사적․실증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덕성여대 민주화 투쟁의 연원은, 적어도 교수들의 경우, 평협 활동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째, 평협 활동의 실패를 반성하고 발전으로 정리함으로써 과오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1990년 투쟁의 패배는 섣부른 타협과 근거 없는 낙관론 때문이었다. 반면 1997년과 2001년의 승리는, 불복종 정신에 따라 원칙을 견지하면서 강고한 연대를 바탕으로 비타협적 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셋째, 대학의 자유정신과 자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교수, 학생, 직원, 졸업생 등이 신뢰와 성실에 바탕을 둔 조직적인 연대를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평협 활동은,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원칙의 견지’ ‘불복종 정신’ ‘신의와 성실에 바탕을 둔 연대’ ‘비타협적 투쟁’ 등이 있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깨우쳐 주었다. 10여 년 전 평협 활동을 중심으로 맺어진 교수, 직원, 학생, 졸업생들 간의 ‘아름다운’ 기억이 오늘날의 덕성을 민주화하고 개혁하는 힘으로 되살아 날 수 있기를 바란다.


4.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잡다

정직 기간이 학기 중이므로 나는 학교에 나갈 수 없었다. 당장 2학기 한국사 수업이 문제였다. 사학과 학생들은 과 토의를 하여 내 강의인 2, 3학년 전공필수 선택과목 대체수업의 수강신청을 거부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사장은 내가 학교에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기간을 학기 중으로 잡아 징계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나에게 1991년 여름방학부터 1992년 2월말까지 8개월의 안식기간을 준 셈이 되었다.

 

  그런데 당장 갈 곳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당시 규장각 도서관리 실장으로 계신 이태진 선생님의 배려로 규장각에 조그마한 연구공간을 얻을 수 있었다.(당시에는 규장각도서관리실이 도서관 산하기관으로 있었다. 때문에 직위도 규장각 도서관리 실장이었다. 규장각도서관리실이 도서관에서 분리, 서울대학교 규장각으로 독립한 시기는 1992년 3월이었다.)

그때 마침 규장각 서가에 『일성록』 영인본이 꽂혀 있었다. 일성록 영인 작업은 1982년부터 시작하여 1년에 두 권씩 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일성록 영인을 국가적 사업으로 삼고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 결과 1991년 12월에는 정조 24년까지 영인되었다
.(일성록 영인본은 86권으로 1996년 3월 완간되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있기는 하였으나 학교에 속았다는 분함과 억울함 등 갖가지 상념이 교차되어 좀처럼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서가에 꽂혀있는 일성록 영인본을 꺼내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특정 단어가 반복적으로 나온다는 점이 눈에 띠었다. 그 부분을 연필로 표시하고 복사를 떠서 카드에 오려 붙인 후 내용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것은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국왕에게 올린 소장 즉 상언ㆍ격쟁이었다. 그리하여 정조대 상언ㆍ격쟁을 분석하여 1992년 2학기 박사학위 청구논문으로 제출하였다. 부당하게 징계를 받은 ‘억울함’ 때문에 ‘억울함’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쓰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는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여러 편의 논문을 발표한 후 그 성과를 묶어 학위논문으로 제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에 비추어 볼 때, 그동안 관련 논문을 단 한편도 발표하지 않은 채 뜬금없이, 그것도 생소한 주제를 가지고 학위논문을 내었으니 심사위원들이 연구내용을 신뢰할 리 만무하였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재심에서 탈락하였다. 초심에서 심사위원들이 모여 역할분담을 한 후 재심부터 본격적으로 논문내용을 심사하는 관례에 미루어 볼 때, 본격적인 심사에 들어가기도 전에 탈락한 셈이었다.

나는 크게 낙담하였다. 심사위원 중 한 분이었던 김용섭 선생님을 찾아뵙자, 논문주제가 워낙 좋아 심사위원들이 한 학기 더하도록 결정한 것이라며 위로해 주셨다. 문제는 재임용이었다. 나는 1991년 2월 재임용이 되었으므로 1993년에 재임용 심사를 받아야 했다(당시 대부분 사립대학은 조교수 재임용 기간이 4년이었으나 덕성여대는 그 절반인 2년이었다. 이에 대해 1997년 국민회의 소속 배종무 의원이 교육부장관에게, 교수재임용제도와 관련하여 교육부의 방침은 교수 재임용기간을 교수 10년, 부교수 6년, 조교수 4년, 전임강사 2년으로 지시하였는데, 덕성학원은 그 기간의 절반인 교수 5년, 부교수 3년, 조교수 2년, 전임강사 1년으로 줄여 놓은 것은 부당한 조처라 생각한다며, 이에 대한 견해와 재임용 기간을 교육부의 지시에 반하여 절반으로 줄인 대학의 현황을 질의하여 시정을 촉구하였다.)

재임용 기간 동안에 정직3월의 중징계를 받았으므로, 이를 만회하려면 적어도 박사학위 정도는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1993년에 재임용이 되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정한파가 몰아쳤기 때문이었다. 상지대 김문기 이사장이 학교 공금횡령과 부정 편ㆍ입학 등의 혐의로 문민정부 사정 대상 1호로 지목되었다.


<사진 6> 김문기 관련 언론보도(weekly 경향, 798호, 2008.11.4, <사학분쟁조정위냐, 분쟁조장위냐?>)

그는 학원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장악한 후 온갖 비리를 저질렀고, 이에 항거하는 교수들을 해직시키는 등 교권탄압을 자행했다. 1986년 7월에는 신문에 교수 채용 과정에서 금품을 수수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이 사건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인 학생을 빨갱이로 모는 용공조작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학생과 직원을 시켜 ‘가자 북의 낙원으로’ 등의 내용이 적힌 유인물을 제작하도록 하고, 이를 학생들의 농성장 주변에 뿌린 후 경찰병력을 요청하여 학생들을 연행하게 했던 것이다. 용공조작 사건의 진실이 1995년 10월 언론에 보도되면서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문민정부 사정의 칼끝이 비리사학을 겨눈 덕분에 나는 재임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 천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95년 재임용 또한 의외였다. 1994년 3월 익명의 투서가 교내에 살포되었다. 투서인은 학과 통폐합 음모 즉각 중지, 정도에 입각한 전공과목 중심의 교수 확보, 계약제 음모 즉각 중지, 교수 승진 보장, 재단의 대학 행정에 대한 간섭 중단 등 9개 항을 요구하고, 만약 이 결의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현 재단의 퇴진투쟁을 강력히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학교당국은 투서인이 “과거 대학의 보직에 있었음이 명백하고 따라서 재단의 신임도 많이 받은 자일 터인데 재단의 비리 폭로 운운하고 협박 공갈함은 인간으로서 의무와 직장윤리(직무상 알게 된 비밀은 재직 중은 물론 퇴직 후에도 엄수해야 한다)를 헌신짝처럼 저버리는 자”라고 비난하고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 1995년에는 이사장 측근이었던 교수를 투서인으로 지목하고 해직시키는 바람에 나는 또다시 재임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7년에는 더 이상 행운이 따라 주지 않았다. 나는 2월 25일(화) 교원인사위원회에서 임기만료대상자로 처리되었다. 교원인사위원회 회의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원장: 세 번째 안건으로 1997년 2월 28일자 임기만료대상자로 면직의 안을 상정하고 대상자 명단을 배부된 유인물을 통해 낭독하다.

L위원: 임기만료 대상자의 재임용 탈락 사유를 묻다

위원장: 사학과 조교수 한상권에 대한 임기만료대상자 면직의 안을 총장이 심의 요청하게 된 사유는 대상자 사학과 조교수 한상권은 1983.8.22부로 인문과학대학 사학과에 임용된 후 1991.7.31자로 교내 질서를 문란케 한 사유로 3개월 정직의 중징계를 받았으나, 이후 계속 반성 및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으며 근무태도도 성실하지 않았으므로 재임용대상자로 부적절하여 재임용 대상에서 제외되었음을 설명하다.

L위원: 이의 없다면 원안대로 처리함에 동의하다.

Y위원: L위원의 동의에 제청하다.

전 위원: 전원 찬성하다.

위원장: 원안대로 1997년 2월 28일자 교원 임기만료대상자 면직의 안이 전원 합의에 따라 통과되었음을 선언하다.


<사진 7>
백서 1, 136-137쪽

  내가 교원인사위원회회의록을 입수한 것은 4월 12일이었다. 4월 11일 덕성여대 측이 인사위원회회의록을 교육부 교원징계재심위원회에 재심사건변명자료의 증거자료로 제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앞서 3월 13일 국민회의 배종무 의원이 덕성여대에 인사위원회회의록 제출을 요구하였으나 대외비라며 거부하였다.(배종무 의원은 목포대 사학과 교수출신으로 목포대총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는데, 같은 과 교수였던 이해준 교수가 다리를 놓아주었다.) 3월 27일에는 배종무, 설훈, 정희경 등 국민회의 의원 연명으로 4월 3일까지 인사위원회회의록 제출을 요청하였으나 이 역시 거절하였다. 이처럼 학교가 강경하게 버티자,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사위원회회의록 자체가 없기 때문일 것이라는 의견이 파다하였다.

학교에서 제출한 인사위원회회의록을 백서에 수록하여 교내 교수들에게 배포하자, 나의 재임용탈락에 동의한 것으로 되어 있는 L교수가 덕성여대 인사위원회회의록이 조작되었다는 양심선언을 하였다. 자신은 재임용 탈락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는데도 회의록에는 동의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며 만장일치는 터무니없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L교수는 백서가 발간되기 전까지는 발언이 뒤바뀐 걸 몰랐으며, 진실을 숨기면 역사 속에 오명을 남겨 후학들 볼 낯이 없을 것만 같아 고심 속에 밝히기로 결정했다고 하였다. L교수는 한겨레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동의와 Y교수의 제청 뒤 인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한 교수의 탈락 안건을 통과시켰다는 회의록의 기록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인사위원회에서는 한 교수 안건과 관련해서 동의는 물론 제청도 없이 투표도 못한 채 안건이 통과됐다”며 인사위원회회의록이 조작되었다고 거듭 주장하였다.

이사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학교 행정에 관여치 않으며 교수 재임용에는 전해 개입한 적이 없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L교수의 증언은 이사장이 나의 재임용탈락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진 8> 백서 2, 296쪽

덕성학원은 인사위원회가 열린 다음날인 2월 26일 신라호텔 불란서식당 “라 콘티넨탈”에서 이사회를 열어 나를 면직처리 하였다. 이사회 회의록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제1호 의안) 덕성여자대학교 교원 인사 안

이사장: 제1호 의안을 상정한 후 사무국장에게 보고하도록 하다.

사무국장: 덕성여자대학교 교원인사위원회 심의를 거쳐 총장의 제청으로 9명의 교원을 1997.3.1자로 신규 임용하고자 한다고 보고한 후 각 교원의 임용분야, 임용직급 등을 설명하다. 또한 1997.3.1자 재임용 대상 교원 6명에 대하여 총장이 제청하였음을 보고하고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한상권 조교수는 1997.2.28자로 임기만료 됨에 따라 면직을 제청하였다고 보고하다.

S이사: 면직 사유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묻다

이사장: 총장이 재임용을 제청하지 않아서 덕성여자대학교 교원인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임기만료로 면직을 제청하였다고 설명하다.

S이사: 원안대로 결의할 것을 동의하다.
(K이사의 제청에 이어 참석이사 전원이 찬성하다)


<사진 9> 백서 1, 139쪽

  내가 면직처리 된 2월 26일은 새 학기 시작을 준비하는 교수연수회가 열린 날이기도 했다. 나는 평소 학교행사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번 교수연수회는 참석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해직된 줄도 모르고 교수연수회장인 학교 구내식당에 모습을 드러냈다.

교수연수회장에는 뜻밖에도 이사장이 와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사위원들은 내가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머 저 선생이 어떻게 나타났지”하면서 기겁을 하였다고 한다. 인사위원들은 내가 해직에 항의하러 연수회장에 나타난 것으로 짐작하고 퍽이나 긴장하였다고 한다.

이사장은 멀리서 나를 쳐다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내가 알리 만무하였다. 나는 해직된 사실도 모른 채 연수회장에서 오랜만에 동료 교수들을 만나 즐겁게 떠들며 식사한 후 귀가하였다. 그리고 그 이튿날 해직통보서를 받았다.

  내가 해직되자 이사장은 어느 만찬장에 참석하여 “앓던 이가 쏙 빠진 기분”이라며 좋아했다고 한다.

5. 미시적 분석과 거시적 분석이 치밀하게 종합된 저서

나는 1993년 가을학기에 박사학위를 받은 후, 이를 수정 보완하여 1996년 『朝鮮後期 社會와 訴寃制度-上言ㆍ擊錚 硏究』라는 이름으로 출판하였다.


<사진 10> 출판된 책 표지

『일성록』에 수록된 18세기 후반 정조연간 백성들의 근심거리ㆍ걱정거리를 담은 상언 3,092건, 격쟁 1,335건 도합 4,427건을 분석한 내용으로, 인간의 권리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차별과 억압에 맞서 싸우는 과정을 통해 쟁취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 하에 역사 속에서 기층민들의 권리의식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추적한 연구였다.

  이 책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를 대상으로 가능한 한 치밀하게 반대되는 사료까지 검토해서 종합‧이해하려는 꼼꼼한 실증, 많은 노력을 들인 사료의 컴퓨터 입력과 통계처리 수준, 상언과 격쟁이라는 아직 아무도 다루지 않은 좋은 사료가 가장 자세하게 수록된 정조연간 『일성록』”을 활용, “미시적 분석과 거시적 분석이 치밀하게 종합된 저서”라는 평가를 학계로부터 받았다.


<사진 11> 가톨릭대 국사학과 박광용 교수 「백성의 걱정거리를 통해서 분석한 조선후기 근대적 민권의식의 대두」, 『역사와 연실』 22, 1996

그리고 1998년 언론계와 교육계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주력하였던 월봉(月峰) 한기악(韓基岳)선생(1898-1941)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월봉저작상을 받았다.


<사진 12> 월봉저작상 수상

  이기동(동국대)ㆍ이태진(서울대)ㆍ유영익(연세대) 교수로 구성된 월봉저작상 심사위원들은 이 책에 대해 “18세기 후반 상언·격쟁의 소원사례를 총괄 분석해 중세적 민본정치 토대 위에서 근대적 민권의식이 싹트는 기층민의 동태파악에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사진 13> [학계 권위 월봉저작상, 한상권 전 교수 수상 영예] 문화일보 1998.4.13, 백서 3-2, 536쪽)

  당시 나는 해직상태에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번 수상은 힘겨운 복직 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 교수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학계의 명실상부한 인정이라는 점에서 뜻이 깊다”고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월봉저작상 수상 소식은 침체된 복직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6.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다

2000년 8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다 희생된 사람들과 그 유족에 대하여 명예회복 및 보상을 행함으로써, 민주주의발전과 국민화합에 기여한다는 기본이념을 표방하고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민보상위)가 출범하였다.

  나는 1991년의 징계와 1997년의 해직은 덕성학원의 권위주의적 통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민보상위에 명예회복을 신청하고 이를 뒷받침할 증거물로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 재임용탈락 처분 철회 투쟁백서』5권을 제출하였다. 신청한지 5년이 지난 2005 10월 11일,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는 나의 덕성학원 민주화 투쟁을 사학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한다는 통지서를 보냈다.


<사진 14> 통지서


<주문ㆍ이유>

신청인 한상권(1953.11.8생)은 1984.3.1부터 덕성여자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등으로 재직하면서 ‘덕성여대 평교수 협의회’ 제2대 회장으로 활동 중,

  1989.2.경 위 대학교에서 같은 대학교 재단이사장의 일방적 총장선임기도에 저항하며 총장직선제를 주장하는 등 인사행정의 부당성에 항의하고,

  1990.4.경부터 같은 장소에서 사립학교법 개악을 주도한 사립재단과 국회문공위를 규탄한 사실 등을 이유로 1990.8.31. 같은 대학교 성낙돈 교수가 강제 해직되자 복직투쟁을 위하여 장기간 농성에 참여하는 등 사학민주화 활동 등에 참여한 사실을 이유로,

  1991.7.24. 덕성여대 교원징계위원회로부터 정직 3월의 징계처분을 받고, 1997.2.25. 같은 대학교 교원인사위원회에서 위와 같이 중징계를 받고도 반성 및 개전의 뜻이 보이지 않는다고 재임용 제외를 제청하여 1997.2.28. 해직된 사실은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등에 관한 법률 규정에 따라 민주화운동을 이유로 해직당한 것으로 인정함.



  불과 10여 년 전에는 급진좌경 사상을 가지고 학교와 재단 전복을 기도하였다며 ‘좌익세력’으로 매도당했던 내가 지금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문란케 하고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하여 민주헌정질서의 확립에 기여한 ‘민주인사’가 되었다.

동일한 사람이 10년 사이에 정반대의 평가를 받는 이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한편 민보상위는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 통지서를 보내면서 “명예회복의 구체적인 조치는 그 내용이 확정되는 대로 추후 통지하여 드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명예회복을 위한 구체적인 조치는 아직까지 취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