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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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2)

한상권(중세사 2분과)

6. 어찌됐던 학교 문제로만 기소가 떨어졌으니
아빠의 근심은 덜하겠지요

98년 3월 초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덕성 학원자주화 운동은 모두 끝난 듯한 분위기였다. 학내 분위기는 침체되어 작년의 투쟁 열기는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급을 불사하고 수업거부 투쟁을 벌였으나 돌아온 것은 겨울방학 동안의 보충수업, 보충수업이 끝나자마자 새 학기 개강, 박원국 전 이사장이 미는 인물의 총장 선임 등 투쟁의 성과로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치열한 투쟁 이후 아무런 성과를 가지지 못함에 따라 패배의식은 그만큼 컸다.심지어는 다른 학교에서 학원 자주화 투쟁을 벌이면서 ‘덕성처럼은 되지 말자’는 말이 나돌 정도로 후유증이 컸다. 가장 선두에 서서 학원자주화를 부르짖으면서 힘든 싸움을 벌이며 모든 대학의 모범이 되어왔던 덕성이 왜 이러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학생들은 싸움에 지치기는 했으나 투쟁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다시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폭제가 필요하였다.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고 새로이 학원자주화 투쟁의 불길을 지피기 위해 총학생회와 민주동문회(회장 조송미, 약학과 87)가 주체가 되어 문화제공연을 기획하였다. 공연 제목은 90년 성낙돈 교수 복직을 위한 문화제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를 본 따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로 하기로 하였다.


<사진 8>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포스터

1990년 사립학교법 개악에 의해 처음으로 재임용 탈락된 교수를 복직시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표명하기 위해 개최된 문화제 공연이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였다. 이 공연은 학생 시민 등이 1만 명 가까이나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그러나 박원국 전 이사장의 기만적인 약속에 속아 해직교수 복직은 물거품이 되고 투쟁에 참여한 교수와 학생들은 징계를 당하고 말았다
(나의 복직투쟁기 (2), [새 교수님 필요 없다. 한 교수님을 돌려 달라!])

 
<사진 9>  교수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플래카드

한상권 교수는 그때 징계를 당하고 7년 후인 97년에 해직되었다. 실패는 한 번으로 족하였다. 학생들은 지금 한 교수님 복직을 가로막고 있는 세력이 그때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여전히 한 교수님 복직을 가로막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8년 전의 교훈을 절대 잊지 않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문화제 공연 제목을 이렇게 정했다.

  8년 전의 뼈아픈 실책을 반성하며 다시는 속아 넘어가지 않겠다는 각오의 표시이며, 8년간 진행되고 있는 미완의 싸움을 올해는 기필코 완결지어 한 교수님 복직과 덕성의 완전한 정상화를 이루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문화제 공연을 한창 준비 중인 4월 26일(일) 총학생회장 이수미 학생이 학교 앞에서 불법 연행되어 남대문 경찰서에 구속되었다. 공연을 무대에 올리기 불과 3일 전의 일이었다. 학생들이 인터넷에 올린 사건 전말은 이렇다.

4월 26일 오후 6시 학교 앞 인근 커피 전문점에서 전철연(전국 철거민연합) 간부를 사칭한 모 여학생(?)의 연락을 받고 나간 이수미 덕성여대 총학생회장(도서관 4년)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면서 불법 연행되었다.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형사 4인은 혐의사실을 증명할 뚜렷한 증거나 영장제시도 없이 무작정 연행해 갔다고 한다. 북부경찰서 담당자에 따르면 현재 전국 총학생회장단 검거령이 경찰당국에 의해 추진 중에 있다 하니 이는 전국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으나 총학생회장 부모님이 당시 구금 중에  있던 남대문 경찰서로 문의해 본 결과로는 학내농성과 회의참석 문제 때문이라는 데에 대하여 덕성인들은 총학생회장 연행의 배후가 누구인지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나타내고 있다.

  학생들은 총학생회장 연행에 틀림없이 배후가 있을 것이라며 학교당국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학생들이 지니는 의구심은 다음 세 가지 면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나는 총학생회장이 구속될 당시의 공안탄압 분위기다.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국민의 정부가 새로 출범하였다. 많은 이들이 3.13 특별 사면 복권 조치 시 구속학생들에 대해 대승적 차원의 대폭적 석방을 하여 새 정부와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로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한총련 관련 총학생회 학생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의 사례가 빈발하였다. 영장도 없이 불법적으로 대학생들을 연행하거나 지난 시기의 활동 또는 지극히 자의적인 판단 하에 각 대학 총학생회장 등 한총련 학생들이 마구잡이로 연행되어 98년 5월 현재 50여명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였다. 정부 당국의 대학생들에 대한 무리한 강제연행과 구속조치는 이적단체로 규정된 한총련 대의원대회를 무산시키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수미 총학생회장은 정부가 학생운동을 불온시하여 체제전복세력이나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한총련(NL) 계열이 아니었다. 검찰은 수사과정 중 ‘한총련 관련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총련을 자진 탈퇴한 총학생회장을 과거에 불기소처분을 받은 바 있는 사안을 들먹이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를 적용하여 구속하였다.

  이는 한총련을 와해시키려는 공안탄압 분위기에 편승하여 총학생회장을 구속시킴으로써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는 민주화운동의 열기를 차단하려는 조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른 하나는 총학생회장 구속사유다. 경찰이 총학생회장을 연행한 것은 국가보안법위반 때문이었다. 다시 학생들의 말을 들어보자.


<사진 10> 자유로운 소통의 대학을 향한14대 총학생회, [덕성정상화의 의지 없는 이강혁 총장과 이사진은 퇴진해야 합니다], 1998.5.11 (백서 3-1, 439쪽)

4월 26일 이수미 총학생회장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연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연행된 후 제출되었던 영장 내용은 너무나 기가 막힌 내용입니다. 작년 새터자료집, 간부수련회자료집을 배포한 것이 이적물 소지ㆍ취득ㆍ배포죄이기에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덕성인 들을 분노하게 한 것은 학내문제에 대한 죄명입니다. 불법집회죄, 교통방해죄, 업무방해죄, 건조물침입죄입니다. 지금 경찰의 조사 중에서 국가보안법의 사안보다 학내문제의 사안이 더 크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업무방해죄와 건조물 침입죄는 학교 측의 고소 없이는 수사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학원의 문제로 이렇게 총학생회장을 연행하고 구속한 사례는 어느 학교에도 없습니다.

총학생회장이 잡혀간 것이 국보법 위반이라고 하지만 국보법에 걸리는 사안은 설득력이 떨어지며, 오히려 비중 있는 사안은 97년 수업거부투쟁 당시에 있었던 불법집회죄, 교통방해죄, 건조물침입죄, 업무방해죄라는 것이다.

  그런데 업무방해죄와 건조물침입죄는 피해자의 고소고발 없이는 수사할 수 없는 사안들이었다. 보직교수들이 중앙운영위원회(중운위)와 만난 자리에서 “총장실점거를 오래 계속한다면 총학생회장은 나오기 힘들다. 이렇게 총장실 점거를 한다면 중운위 모두에게 사법절차를 밟겠다.”고 한 발언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검찰이 공안 분위기에 편승하여 총학생회장을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하였지만 실제로는 97년 수업거부 투쟁 주도, 200일 넘게 진행하고 있는 총장실 점거농성 등 학원민주화투쟁에 대한 보복이었다.

  마지막으로 총학생회장이 체포된 시점이다. 4월 23일 이강혁 총장은 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 회의 개최 연기를 선언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인 26일, 문화제 행사를 사흘 앞두고 총학생회장이 연행되었다.

  이강혁 총장은 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를 발족시키면서 한 교수 복직 등 덕성문제 해결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그 본질을 간파한 총학생회는 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에의 참여를 끝까지 거부하였다. 총학생회는 일관되게 한상권 교수 복직의 권한과 책임을 가진 당사자는 엄연히 이강혁 총장이므로 하루빨리 한상권 교수 복직을 제청할 것을 촉구하며 총장실 점거농성을 계속하고 있었다.

  4월 29일 열릴 문화제 공연은 덕성학원의 민주화투쟁을 가장 선두에서 이끄는 덕성인들의 결의를 모아내고, 그 결의에 힘을 주고자 하는 자리였다. 문화제 공연을 기점으로 덕성인은 다시 일어서고자 하였으므로 민주화 투쟁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총학생회장을 구속시켜야만 했었다.

5월 11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정의와 인권위원회(위원장 이명남 목사)가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이후 처음으로 위원회를 개최하고, 새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한총련 관련 총학생회 학생들을 연행하는 과정에서 인권유린의 사례가 있으며, 무리한 법적용으로 다수의 학생들을 구속하는 것에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사진 11>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와 인권위원회, [정부의 무리한 학생운동 탄압행위를 우려한다], 1998.5.11 (백서 3-1, 442-3쪽)

국민의 정부임을 표방하는 현 정부가 과거의 구태의연한 인권의식과 잣대를 가지고 학생운동을 무조건 불온시하여 체제전복세력이나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처사라 할 수 있다.
한편 구속학생들 대부분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사실이다. 10여 년 전에 발간된 책을 문제 삼거나 교지에 실은 글 또는 서점에서 판매하는 서적과 교수의 논문을 통신에 올렸다는 이유만으로 국가보안법을 적용하여 구속한 것은 형평을 잃은 편법행위이다. 또한 한총련으로부터 자진 탈퇴한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이수미)의 경우 한총련 탈퇴 이전에 소지한 문건-97년 9월 불기소처분까지 받음-을 새삼 문제 삼고 학내문제와 관련한 집회에 대해서도 학교 측이 처벌의사가 없음에도 이를 문제 삼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한 것은시기적으로나 사안의 내용으로 보아 부적절하고 온당치 못한 처벌이라 할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서 현 정부가 과거의 구태의연한 인권의식과 법무행정의 관행을 쇄신할 것과 강경일변도의 학생운동에 대한 대응도 전향적으로 전환할 것을 촉구한다는 성명서를 내자, 검찰[서울지방검찰청 북부지청(담당검사 이두희)]도 총학생회장을 가.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위반, 나. 업무방해 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위반 등 학내 문제로만 기소하였다.

 


공 소 사 실

피고인은 1997 덕성여대 사회대학 학생회장을 역임하고, 1998.1.21. 위 대학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자로서,(중략)

1. 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및 학생 등과 공모공동하여
(중략)
위 대학 총장 직무대리 권순경 및 총장 이강혁의 수회에 걸친 총장실점거농성해제촉구에 불응하여 총장실을 침입하고, 위와 같은 총장실점거농성 및 1997.10.2.부터 같은 해 12.7.까지 수업거부 등의 실력행사를 하여 위력으로써 총장의 대외적 대학대표권, 대내적 교무총괄권, 학생ㆍ교직원에 대한 지도감독권과 학사행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위 총장 직무대리 권순경 및 총장 이강혁의 업무집행을 방해하고

2. 관할경찰서장에 신고하지 않고
1997.12.1. 15:00경부터 같은 날 15:45경까지 같은 시 종로구 안국동 소재 해영외관 앞 인도 상에서 학생 70여 명을 인솔하여「유급으로 협박하는 재단측은 각성하라」는 등의 피켓 15개를 앞세우고「덕성여대 재단은 각성하라」는 구호와「덕성진군가」등의 노래를 부르며 연좌하여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는 시위를 하고, 종로경찰서 정보과장으로부터 해산명령을 받았음에도 지체없이 퇴거하지 아니한 것이다.


검찰의 공소사실을 보면 총학생회장 체포 당시 제출한 “이적물을 소지ㆍ취득ㆍ배포하여 국보법을 위반하였다”는 영장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총학생회장의 무리한 강제연행과 구속조치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작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공권력이 덕성 민주화운동을 탄압하는데 부당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공소장을 받아 본 이수미 총학생회장은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북부서 유치장에서 문화제를 맞이했고, 이곳 성동에서 대동제를 맞이했습니다. 보안법이 걸려 있을 때는 줄곧 저희 아빠 걱정을 했더랬습니다. 아빠가 제일 걱정하였던 게 그거였으니까요. 어찌됐던 학교 문제로만 기소가 떨어졌으니 아빠의 근심은 덜하겠지요.
7. 대통령의 지팡이

국민회의가 실업기금 조성을 위해 마련한「실업대책마련을 위한 온 국민 한마음 바자회」가 4월 25, 26일 양일간 국회에서 열렸다. 바자회가 열린 국회 후생관 앞 광장에는 조세형 총재권한대행 등 고위 당직자와 사무처 요원들이 총 출동, 실업문제에 대한 당 차원의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각계각층 유명 인사들이 물품을 기증하고 연인원 5만 여 명이 참여한 이번 행사에서 단연 인기를 끈 품목은 김대중 대통령이 기증한 지팡이와 친필휘호였다. 김 대통령이 최근까지 사용하던 검은색 등산용 지팡이는 1천2백50만 원을 써넣은 국민회의 한화갑 총무대행에게 돌아갔으며, 나머지 두개의 지팡이도 모두 1천 2백만 원 이상에 낙찰됐다.

「DJ 지팡이」 3개가 3천 6백 50만원에 팔린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박정희 군사정권 때 의문의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지팡이를 짚고 다닐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 불편한 걸음걸이와 지팡이에 국민들은 연민과 아울러 존경을 보냈다. 그 지팡이를 고통 받는 실직자들을 위해 내놓은 것은 의미 있어 보였다.

  이 밖에 김 대통령 양복 한 벌이 3백 50만원, 넥타이 1백만 원, 벨트 1백만 원, 구두 한 켤레 40만원, 소장해온 책 ‘부활’과 ’서양철학사’ 각각 10만원과 30만 원 등을 호가했다. 또 이희호 여사가 기증한 휘호 ‘경천애인’은 3백만 원, ‘남북통일’은 3백50만원에 낙찰되었다. 김 대통령의 소장품 중 가장 비싸게 팔린 물건은 친필「실사구시(實事求是)」대형액자였다.

  김 대통령이 봄에 쓴 휘호액자 ‘실사구시’박원국 전 덕성여대 이사장이 마감시간을 10여분 앞두고 경쟁자와 서로 50만원을 올리는 경합 끝에 1천 7백만 원에 사들였다.


<사진 12>「DJ 지팡이」 3개가 3천 6백 50만원, 조선일보 98.4.27/ 김대통령 친필휘호 1700만원에 팔려(한겨레 98.4.27, 백서 3-2, 539쪽)   

박원국 전 이사장이 왜 갑자기 바자회 장소에 나타나 김 대통령의 휘호를 샀을까. 정말 실업기금 조성을 위해 마련된 바자회의 취지에 동의해서였을까.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다. 우익세력들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영원한 빨갱이였다. 지만원의 글이 우익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지난 5월 23일 노무현의 사망에 이어 이번 8월 18일 오후 1시 43분에 김대중이 운명했다. 두 빨갱이 수장이 3개월 차이로 운명한 것이다. 김대중은 1997년 4월 17일, 역사바로세우기 대법원 판결시점까지는 공식적으로 빨갱이였으나, 판결 이후는 민주화운동의 영웅이 됐다. 우익이 지배하던 세상에서는 빨갱이였지만, 좌익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자 충신으로 세탁된 사람인 것이다. 여기에서 좌익이란 대한민국을 파괴-전복하여 적화통일 시키려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우익이란 이런 빨갱이들로부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지만원,「김대중의 사후처리문제와 우리의 교훈」,『시국진단』9월호, 2009.9)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하자 이명박 정부는 국장으로 장례를 치루고 시신을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안장하였다. 그런데 지난 9월 10일 대한민국 어버이연합, 보수국민연합 등 보수단체 회원 150여 명이 국립 서울 현충원 앞에 가짜 묘를 만들고 낫과 곡괭이로 이를 부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묘를 파헤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은 김 전 대통령이 현충원에 안장된 것을 ‘친북세력의 알박기’라고 비난하면서 김 전 대통령 묘를 광주 망월동 묘역으로 옮기라고 요구했다.

우익세력이 이토록 증오하는 김대중 대통령의 친필휘호를 박원국 전 이사장이 마감시간에  경합을 벌이면서까지 끝내 사들인 까닭은 무엇일까. 이해찬 교육부장관의 압력을 의식한 때문은 아닐까.

  98년 4월 3일(금) 덕성여대 수학과 원대연 교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음 주 월요일(4월 6일)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 등이 교육부 장관을 면담하는데, 한 교수 문제를 어떻게 도와주었으면 좋겠는가 물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1)작년 교육부감사결과 이행여부 확인 (2)총장실 점거농성으로 행정업무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 이를 통한 이강혁 압박 (3)한 교수 문제를 언제까지 어떻게 풀 것인지 등을 장관에게 서면으로 요구해달라고 하였다. 4월 7일(화) 원 교수가 면담 결과를 전해주었다.

(1) 전적으로 신임하는 사람으로부터 일주일에 한번 씩 보고를 받는다(교육부 관료는 제외).
(2) 덕성여대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재단의 5개 요구 사항도 알고 있다.
(3) “덕성여대에 대해 벼르고 있으니 참을 때 잘하라”고 학교 측에 전달하였다.
(4) 교협에서 추천한 이사 한 분이 대단히 애쓰고 있다. 한교수도 Flexible한 자세를 갖도록 하라
(5) 복직 문제를 교육부가 중재할 생각은 없다
(6) 재임용 문제는 법적으로 구제할 수 없다.
(7) 박원국 활동은 실체이던 허상이던 인정해야 한다(이 문제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남).
(8) 사립학교법 개정은 현재로서 어렵다(이대나 연대에서 보듯이 3대나 내려가면 개혁이 가능).
(9) 교육부가 직접 해결할 수는 없다
(10) 작년 감사 결과에 대한 이행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교육부가 새로이 감사를 하려고 벼르고 있다.

  덕성여대 문제를 잘 알고 있지만 사학의 자율성 때문에 직접 개입하기는 어려우므로, 감사 등의 방법을 통해 사태를 해결하려 한다는 요지의 장관 답변서였다. 4월 8일(수) 교육부가 장관 명의로 덕성학원 이사장에게 학내분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를 묻는 공문을 보냈으며, 14일(화)에는 교육부차관이 김계수 이사장과 이강혁 총장을 만나 “한교수를 복직 못시키면 학교 문을 닫아라. 교육부가 덕성여대에 대해 일체 지원하지 않겠다. 신임 이사(박원택) 승인도 보류한다”고 하였다고 한다.

  4월 22일(수)에는 장관이 덕성여대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관선이사 파견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김계수 이사장은 사퇴의사를 밝혔으며, 이강혁 총장은 위축되어 박원국 전 이사장과 교육부 사이에서 방황하다 교육부 눈치를 보는 쪽으로 선회하였다고 한다. 박원국 전 이사장이 국민회의가 마련한 바자회로 긴급히 달려간 까닭은 이처럼 학내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8. 대법원 판례 위에 ‘덕성여대 판례’를 만들겠습니다

4월 29일 수요일 오후 6시, 총학생회(회장 이수미)와 민주동문회(회장 조송미)가 주최하는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Ⅱ” 문화제 공연이 공안탄압을 뚫고 약 500여 명의 학생과 졸업생이 참여한 가운데 영근터에서 마침내 막을 올렸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국대학노동조합연맹’(대학노련), ‘전국사립대학교교수협의회연합회’(사교련),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참학), ’참여민주사회를 위한 시민연대‘(참여연대),  ’학술단체협의회‘(학단협), 한국역사연구회(한역연) 등 9개 시민사회교육단체가 후원하였으며, 내빈으로 김진균ㆍ 박거용(민교협), 김귀식(전교조), 강정구ㆍ김성민ㆍ박종진ㆍ정원호ㆍ김혜린(학단협), 김기덕ㆍ박종기ㆍ배경식ㆍ이세영ㆍ채웅석ㆍ유혜정(한역연), 김용식ㆍ유양훈ㆍ장운ㆍ조춘화ㆍ정준애부부(대학노련), 박원석(참여연대), 금창영ㆍ송찬섭ㆍ이상찬(역사학연구소), 김명호(성균관대 한문학과), 성낙돈 등이 참석하였으며, 교협에서도 오영희 교수 부부를 비롯하여 10명의 교수가 자리를 함께 했다.


<사진 13>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외빈( 채웅석,강정구,박종진, 김성민,김기덕) 


김진균 교수는 격려사에서 “철옹성 같던 박원국 이사장체제가 무너진 것은 여러분과 선배의 힘”이라며 학생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무대는 최광기(사회학과 88)의 사회와 가수 최도은, 안치환 등의 노래공연으로 달아올랐다. 이정열, 서울지역 노래패 연합 ‘삶의 소리’, 서총련 노래패 조국과 청춘 등의 공연이 많은 관중의 호응을 얻었다.


 <사진 14>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개막식 행사

 

  이번 문화제에서 가장 돋보인 것은 영상물이었다. 한금선(심리학과 85)과 방송국에서 제작한 90년부터 97년까지의 덕성 자주화 투쟁이 지나온 길을 슬라이드로 보면서 장내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이날 문화제는 ‘덕성투쟁승리’라는 불 글씨에 점화하고, 자리에 모인 이들이 모두 강강수월래를 통해 대동한마당을 펼치면서 4시간 만에 막을 내렸다.


<사진 15>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공연


<사진 16>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Ⅱ 불글씨

 

  4ㆍ29 문화제 공연은 새 학기가 시작된 후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는 학생들이 다시 한 번 힘을 얻고 일어서기 위한 다짐의 장으로 마련되었다. 결의발언을 하는 자리에서 나는 학교 측의 요구로 그동안 중단 되었던 한국사 강의를 재개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저는 5월 4일(월)부터 지난 3월 23일(월) 이후 중단되었던 한국사강의를 다시 시작할 것이며, 어떠한 속임도 없는 투명성, 어떠한 야합이나 담합도 하지 않는 비타협, 어떠한 부당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불복종의 정신에 따라, 나의 부당한 재임용탈락조치를 철회시키고 대법원 판례 위에 ‘덕성여대 판례’를 만들겠습니다.

내가 한국사강의를 재개하겠다는 발언을 한 까닭은 공연제목처럼 더 이상 물러서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국사 강의는 학생들과의 합의하에 3월 10일부터 시작되었다. 3월 23일(월) 사무처장임의 강의를 중지할 것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사진 14> 사무처장, [임의 강의 중지 촉구], 98.3.23

1. 최근 인문사회관 강의실 및 옥내 휴게 공간 등에서 우리 대학교 일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귀하의 강의(한국 최근세사, 고적조사연구방법론Ⅱ, 한국사 연습)에 대하여 강의질서 유지가 심히 우려됩니다.

2. 이는 학교 당국에서 승인한 것이 아니므로 학생들이 선의의 피해나 동요가 없도록 즉시 중지해줄 것을 촉구합니다.

3월 24일(화) 교무처장이 오늘 이사회 간담회가 열린다며 한국사 강의를 잠시 중단해 줄 것을 요구하여 일단 1주일 정도 중단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틀 후인 3월 26일(목) 교무처장은 다시 한국사 강의 중단을 몇 주 더 연장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교무처장은 3월 24일 열린 이사 간담회에서 총장에게 조속한 시일 내에 저의 복직제청을 하도록 의견을 모았으므로 조만간 복직이 될 것이며, 나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도 피해가 없도록 하겠다는 확약을 하였다.

  그 후 이강혁 총장은 4월 6일 ‘학원정상화추진위원회 운용 일정’을 발표하고, 4월 다섯째 주말인 4월 30일까지 인사위원회 상정 및 법인에의 채용 임명 제청을 하겠다고 문서상으로 약속하여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는 듯하였다. 그러나 4월 중순부터 ‘덕성여대 사학과 졸업생일동’ 명의로 나를 비방하는 정체불명의 괴문서가 전국 대학에 배포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복직 제청을 불과 1주일 앞둔 4월 23일, 이강혁 총장은 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 회의 개최 연기를 일방적으로 발표하였다. 학원정상화 추진위원회 1과제(한상권 교수 문제) 회의를 4월 25일(토) 개최하려 하였으나, 총학생회에서 학생대표 참여를 거부하고 있어서 부득이 회의개최를 연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이로부터 사흘 뒤인 4월 26일 총학생회장 이수미 학생이 학교 앞에서 강제 연행되었다. 총학생회장은 북부경찰서로 이첩되어 구속영장이 발부된 상태였다.

  나는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을 보고, 나의 복직에 대해 주위에서 낙관을 하는 분도 많이 있었지만, 이강혁 총장이 4월 30일 인사위원회에서 복직제청을 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에도 4월 30일까지 수업을 중단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일련의 흐름으로 보아 이후 발생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 전가를 나에게 하리라 짐작하였기 때문이었다.

  학교 측과의 약속을 지킨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한국사 강의가 불법이니 중단하라’는 협박성 강요뿐이었다. 내가 학생들 앞에서 한국사 강의를 다시 시작하겠다는 투쟁결의를 밝힌 것은 이처럼 암울한 상황을 돌파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9.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4ㆍ29 문화제 공연은 침체된 학내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다. 문화제 공연에 참석한 청중 500여 명은 97년 2학기 학원 민주화 투쟁 당시 1,000여 명 씩 모였던데 비하면 현저히 적은 숫자였다. 문화제 공연 도중, 이후에 시작되는 덕성의 민주화를 이끌, 덕성의 투쟁력을 결집시킬 중앙간부들의 결의성 발언 하나 없었던 것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 모두가 총학생회장 구속으로 인해 나타난 문제점들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리의 싸움은 이유 있는 싸움이고, 이 싸움에서 우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작년 한 해의 힘든 싸움에서 우리는 이제 그 마무리를 짓기 위해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 없다”는 각오로 문화제를 준비하였다. 공연은 열기가 있었다.

  문화제 공연에 참석한 새내기 서지형 학생의 글이 덕성여대 교지『근맥』에 실렸다. 4ㆍ29 문화제 공연이 학생들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는지 이 글을 통해 되짚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 98 문화제를 바라보며

“「선생님 물러서지 마세요」3탄은 없습니다.” 단상에 서신 성낙돈 교수님은 목이 메이셨던지 얼마간의 침묵 끝에 말씀을 시작하셨다. 교수님의 이 한마디에 온 장내가 숙연해진다.  이미 어둑해져버린 영근터엔 서로의 숨소리만이 그곳을 가득 메우는 가운데 나는 앞서 지나갔던 학원자주화 슬라이드와 사진자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90년, 벌써 8년이란 세월이 지난 지금, 빛바랜 사진들과 낡은 비디오테이프들이 이토록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그때의 문제가 바로 지금 우리가 부딪쳐야 할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덕성은 오랜 투쟁의 길을 걸어왔다. 매 해 학원 자주화를 위한 크고 작은 궐기는 끊임없이 일어났고 그것은 전국적인 학생 운동과 맥을 같이 하면서 우리는 오늘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다.

이제야 대학문화의 한 귀퉁이에 발을 내디딘 새내기인 나로서는 가슴 한쪽이 버거워질 만큼 힘든 현실이었다. 남들이 보기에 우리 학교는 결코 평범하지 못한 학교다. 쌈닭이라 불리 울 만큼 대가 세고 끈질긴 성향이 일반인들에게는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나 보다. 사실 나도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이곳에 오게 된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덕성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다만 상식일 뿐이라고,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우리의 성향이 독특해서가 아니라, 상식에 배치되는 힘 앞에 굴하지 않을 뿐이라고 말이다. 이러한 생각들과 함께 한 선배의 권유에 따라 나는 자원 봉사단에 참여했고, 다들 분주한 손놀림 속에서도 싱긋이 웃어가며 일하는 선배들의 여유가 한없이 푸근하게만 느껴졌다. 너무도 당당하고도 의젓한 모습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자신을, 아니 우리 모두를 밑바닥에서부터 긍정해주고 있나보다. 갑자기 문화제가 자신 있어 진다. 스트로에 비끄러 매단 풍선 색깔만큼 영근터가 싱그러워 진다. 누가 그랬더라, 자신감은 미모를 돋보이게 해준다고…

문화제는 처음엔 일반 학우들의 춤과 노래로 꾸며졌고 나중에는 외부 학생들과 민중가요를 부르는 이들로 채워졌다. 각 학교들의 지원과 인사말들은 학내 문제가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들을 일깨워 주었다.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으며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그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리고 절대 물러서지도 않는다. 문화제는 서총련 노래패와 안치환의 공연 때에 이르러 거의 절정에 다다른다. 특히 서총련 노래패는 그 구성원들이 젊은 만큼 강한 이미지를 남겨준다. 그들이 무대에 올라서자마자 관객에서는 “예뻐졌어요.”, “살 빠졌어요.” 등의 친근한 인사말들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중간 중간에 벌어지는 공연들은 구호를 힘 있게 해주고 일체감을 더해준다. 너무 밤이 늦었다는 이유로 부근에 사는 한 주민의 과격한 항의 때문에 공연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었지만 나름대로의 진지한 분위기를 계속 이끌어 갔다.

맨 마지막으로 사회자는 한상권 교수님을 무대 위로 모셨다. 그리고 한 교수님의 복직을 도우셨던 다른 교수님들과 함께. 내 옆에는 복직투쟁에 앞장섰던 선배가 서 있었다. 선배는 교수님이 단상에 서시자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그토록 존경하는 교수님을 문화제를 하면서 뵈니 그 느낌이 각별했을 것이다. 교수님께서는 간단하면서도 힘 있게 말씀하신다. 어떤 타협과 비굴함도 있을 순 없다고 말이다. 그 단단함과 여유로움….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분한테 사사를 받을 수 있다면…. 복직에 대한 열망이 더 간절해졌다.

새내기가 되어 첫 경험한 문화제, 다른 문화제와는 매우 성격이 다르다. 우리에게는 여러 사람들의 공연보다 의식과 격려가 더 중요했다. 내가 없어지고 우리가 되어 부르는 노래가 끊이지 않기를 소망한다. 갑자기 안치환의 노래가 귓전을 울린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근맥』 34ㆍ35집,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