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복직투쟁기 연재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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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투쟁기 연재를 시작하며

한상권(중세사 2분과)

  나는 1997년 덕성여대에서 재임용탈락 되었다가 1999년 2년 만에 복직되었다. 나의 복직은 덕성 구성원은 물론 학계와 언론 등 사회 여러 방면에서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한국역사연구회의 전폭적인 지원은 커다란 힘이 되었다.

1997년 3월 17일, 한국역사연구회 회장 박종기(국민대교수)외 300여 역사연구자 일동은 [덕성여대 한상권 교수의 재임용탈락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최초로 발표하여 “한국역사연구회 300여 명의 역사학자들은 한상권 교수에 대한 재임용 탈락처분의 철회를 위하여 끝까지 함께 싸울 것“이라고 선언하였으며,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켰다.

나는 지난 7월 28일 연구회 웹진싸이트 [나의 책을 말한다]란에『차미리사평전』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해직에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이후 운영위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해직에서 복직까지의 뒷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처음에는 사양을 하였으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복직투쟁 과정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무의미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나의 복직투쟁이 대학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적지 않았다는 사회적 평가 때문이다. 나의 복직투쟁은 재임용탈락처분을 학내 구성원과 사회 민주세력이 연대하여 뒤집은 사례로 해직교수들 투쟁의 전범(典範)이 되었다. 덕성여대 싸움 승리 이후 제주산업정보대, 세종대, 서울대, 동의대 등 여러 대학의 해직교수들이 복직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복직투쟁은 재단과 교수의 싸움에서 교수사회의 주장이 사회적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복직투쟁을 계기로 재임용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졌다. 내가 해직되기 이전까지 교육부는 재임용제도가 교수들의 학문연구 진작을 위한 선법미제(善法美制)라고 선전해왔다. 그러나 내가 해직되면서 재임용제도가 양심적 교수를 통제하는 악법이라는 비난여론이 일자, 1997년 5월 21일 교육부는 교수재임용제를 대폭 개선하여 재임용의 기준과 절차를 법으로 명시해 ‘악용’을 막도록 하겠다고 공식발표하였다.

  이어 2000년 1월 18일 서울행정법원이 김민수 교수가 서울대를 상대로 낸 교수 재임용 거부처분 취소청구 소송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교수의 재임용 여부는 임용권자의 자유재량 행위로 교수는 재임용을 요구할 권리는 없다”는 것이 기존 판례였다(1992년 10월 대법원판례).

  이에 근거하여 서울대측은 “재임용 탈락은 계약기간 만료에 대한 사실 확인에 불과하므로 행정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펴왔다. 재임용은 전적으로 대학 재량 사항이지 심사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교수재임용제는 행정소송의 대상이며 합리적 근거 없는 대학 측의 재임용 거부는 취소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이후 1심 판결은 2심에서 뒤집어 졌으나, 2004년 4월 23일 대법원이 각하 처분한 2심 판결을 파기하고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교수의 재임용 기대권과 적법한 심사를 받을 권리를 사법부가 인정한 것이다. 이 이후로 정년트랙 교수는 물론 비정년트랙 교수들에게도 재임용 심사를 받을 권리가 부여되었다.

  재임용탈락직후 나는 나의 해직이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거나 또는 일회적인 사건으로 치부되지 않으려면 투쟁의 전 과정을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사건의 전개상황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출처 : 덕성여자대학교 홈페이지>

  그 결과 2년간의 투쟁을 기록한『덕성여대한상권교수재임용탈락처분철회투쟁백서』를 다섯 권 발간할 수 있었다. 투쟁백서의 발간은 복직운동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제 와서 10년 전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려 복직투쟁기를 쓸 엄두를 낼 수 있게 된 데에는 투쟁백서가 내 곁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