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위논문 – 「여말선초 대중국관계와 국왕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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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논문을 말한다

 「여말선초 대중국관계와 국왕시호」

(2016. 02. 한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안기혁(중세2분과)

  원 간섭기 이래 고려와 조선의 국왕들은 서거 후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국왕시호 관련 의례의 전개는 한·중 관계에서만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일반의 부정적 인식으로 국왕시호는 지금까지 평가 절하되어 왔다. 시호를 받은 사실을 민족 자주성 문제와 결부시켜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려의 훼손된 자주성을 이야기할 때 거론되는 ‘충(忠)’자 시호는 이런 부정적 인식의 대표적 사례이다.

중국으로부터 시호를 받았음을 자주성 훼손이라 평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그렇다면 같은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책봉 수용은 왜 실리적 외교인 것인가? 고려를 극복했다는 조선은 무엇 때문에 국왕시호 의례를 국가의례로 편입시켰을까? 시호는 어느 순간부터 필자에게 여러 궁금증을 던지고 있었다. 이 논문은 부족하나마 이런 의문들을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남송의 멸망은 동아시아가 원 중심의 일원적 질서로 재편되는 신호탄이었다. 유래가 없던 슈퍼파워의 등장 속에서 고려 왕실은 원 황실을 후원세력으로 삼아 대내외적 현안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 실행 방법의 하나로 고려는 원에 통혼을 요청했고, 결국 원 세조의 ‘부마’ 지위를 얻음으로써 목적한 바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원 세조 서거 후 ‘부마’ 지위에 기반한 고려국왕의 대내외적 위상은 흔들리게 된다.

대원교섭에서 황제와의 개인적 관계는 교섭의 성패를 결정하는 요소였다. 세조 서거 후 황제와의 혈연적 거리가 멀어진 상황에서 부마 위상을 활용한 대원교섭이 한계에 부딪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설상가상으로 복잡한 국내외 정쟁과 얽혀 고려국왕은 그 지위마저 위협 받게 되는데, 충선왕의 폐위는 당시 불안정한 고려국왕의 처지를 보여준 사건이다.

충선왕은 폐위 후 원에 머물며, 차기 황제 후보 가운데 하나였던 카이샨 형제를 지원했다. 결국 이들 형제는 황제로 등극했고, 충선왕은 ‘황제를 옹립한 공신’의 지위를 얻고 복위할 수 있었다. ‘황제를 옹립한 공신’의 위상은 원 황제와 고려국왕의 약화된 연결 고리를 강화시킬 좋은 수단이었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종 이하 선왕들까지 원 황실의 공신 반열에 올리고자 했다.

국왕시호는 고종 이하 선왕들의 공신 지위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등장한다. 충선왕은 고려왕실의 복속 시기를 칭기즈칸 당시로 올림으로써 고려가 원에서 갖는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기반인 고려왕실을 높인다는 것은 곧 충선왕 자신의 위상을 공고히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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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충렬왕에게 시호를 올리자는 대신의 요청을 거절하고 충선왕은 원에 국왕시호를 요청했다.’(동아대학교 소장 고려사 판본 : 네이버 제공- 『고려사』 권33, 세가33 충렬왕 복위년 10월 병진 -)

국왕시호를 요청하는 과정에서 충선왕은 고려 왕실을 칭기즈칸 이래 원에 혁혁한 공을 세워 부마로 대우 받은 세력으로 묘사했다. 결국 충선왕 2년(1310), 원으로부터 고종 이하 선왕들의 시호가 내림으로써 왕실의 공신 지위는 인정된다. 원이 수여한 ‘충’이라는 시(諡)는 당대 원 국내의 부마, 공신가문의 일원들에게 수여되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원은 이후 고려왕실을 훈척(勳戚)으로 인식했다. 고려 역시 대원교섭에 선왕들의 공적을 부쩍 강조했다. 이후 고려국왕들은 정치적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원에 국왕시호를 요청한다. 원이 국왕의 임명권을 실제로 행사하는 상황에서 선왕에 대한 시호 수여는 왕가의 계승자로서 고려국왕을 신임하겠다는 원 황제의 의중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긴밀했던 양국 관계의 확인과 신임 획득 방법으로 국왕시호를 이용한 것은 원도 마찬가지였다. 공민왕의 개혁 이후 국왕시호는 국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수단의 기능을 상실한다. 이 때문에 공민왕은 충혜왕 이하 국왕들의 시호를 원에 요청하지 않았다. 이들 국왕의 시호는 원이 자의적으로 수여했다. 이때 원은 국운이 기울어져 제주로 피난을 준비하던 상황이었다. 원활한 피난 생활을 위해 고려에 환심을 살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명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해 자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명에게 책봉은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책봉에 근거해 이루어지는 시호 수여 도 같은 맥락이었다. 고려는 공민왕대 개혁 과정에서 국왕의 독점적 외교권 확보를 위해 선제적으로 명과 사대관계를 수립한다. 그러나 곧 명의 요동 진출과 맞물려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왕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요청된 국왕시호는 명과 불안정한 관계 속에서 책봉과 연계되어 안정된 양국 관계 구축을 위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조선 건국 후 국왕시호에 대한 인식은 기본적으로 우왕대의 인식과 다르지 않았다. 태조는 건국 직후 명과 관계 악화로 국왕 책봉을 받지 못하고 서거했는데, 태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왕시호를 요청한다. 이는 태조의 정통성 확립은 물론 태종 즉위 후 안정된 대명관계를 과시하기 위한 의도였다.

안정적 대명관계와 더불어 유교적 이상 국가 건설이라는 조선의 이념적 지향은 국왕시호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의례를 정비하는 배경이 된다. 이를 실현하는 방법의 하나로 유교적 국제관계인 ‘사대자소’에 기반한 대명관계를 구축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은 국제관계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제후로 규정한다. 명과 관련된 외교 의례들은 『주례』를 비롯한 여러 고전에 근거해 정비 되어 갔다. 앞서 원대부터 이어진 국왕시호 역시 고전의 사례들에 근거해 정당화 되었고, 당대 명과의 협의를 통해 정비된다. 국왕시호 의례 정비에 있어 명과 긴밀한 논의 과정을 거친 이유는 시호 관련 의례가 다른 것과 달리 과정 대부분이 명과 긴밀한 관계 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예제 정비의 결과 조선은 당대 다른 나라들과 달리 명과 국왕시호 의례를 지속하는 국가가 되었다. 제후를 표방하는 의례의 지속은 이후 명이 외교에서 조선을 우대하는 여러 배경 중 하나였고, 이를 바탕으로 조-명 양국은 200년 동안 큰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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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태종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낸 청시표문의 내용’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원문서비스, 『세종실록』 권16, 세종 5년 5월 15일 신미)

처음 국왕시호에 대한 여러 의문들을 해결해 보고자 논문의 주제를 잡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문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조선 초 국가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중국이란 존재는 어떤 의미였을까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공부를 계속해 볼 생각이다. 나름의 답을 얻을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