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이야기] 전통기생’의 부활을 꿈꾸는 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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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기생’의 부활을 꿈꾸는 이에게

박정애

 

경상남도 진주에서 기생 양성 프로젝트가 시도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작년에 있었던 일이었다. 진주시에서는 2003년 5월, 전통기생문화를 복원하여 관광상품화하겠다는 취지를 밝히고 <전통기생문화원>의 건립을 제안하였다. 이 기생문화원에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진주기생교육원과 다양한 기생문화를 전시하는 홍보전시관, 그리고 기생의 가무․예절 등을 체험하는 기생문화체험관의 설치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계획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여성단체의 항의를 받아 결국 무산되고 말았지만, 한편으로 <전통기생문화원>의 건립을 옹호하는 주장도 만만치가 않았다. 이유는 이랬다. 기생은 전통문화예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데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왔다. 기생이 성매매 여성이었다는 것은 일면적인 사실에 불과하고 더욱이 근대시기 이후에 기생문화가 왜곡됨으로써 강화된 현상이다. ‘북평양, 남진주’라고 하여 예부터 색향(色鄕)으로 이름 높아 기생문화의 중심지였으며 의기(義妓) 논개를 배출한 진주에서 기생문화를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는 것은 합당하다.

지하에 있는 논개와 황진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다 통탄할 소리이다. 논개는 기생이라서 애국을 한 것이 아니라 정의와 용기를 지닌 인간으로서 적군의 장수를 대면할 수 있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실천한 것이다. 황진이가 기생이라서 시와 춤에 능했다기보다는 재능이 뛰어난 여성으로서 자신을 부단히 갈고 닦을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술’을 발휘한 것이다. 문제는 조선시대까지 기생쯤 되어야 여성의 몸을 가지고도 이러한 뜻과 재능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황진이가 죽으면서 남겼다는 부탁,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시체를 동문 밖에 그냥 내쳐두어 천하 여자들에게 경계를 삼으라”는 이야기가 어디 자신의 운명이 기꺼워서 한 소리였을까. 기생이었기 때문에 양가 여성들이 겪는 것과는 또 다른 삶의 제한에 부딪혀야 하는 것이 한스러웠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었을까.

요즈음 기생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종종 ‘전통기생’에 대한 환상을 보고는 한다. 재능이 뛰어나고 의지가 강한데다가 용모마저 아름다운 -아름답다고 믿어지는- 몇몇 유명 기생의 아우라가 너무 강해서일 수도 있고, 공창을 들여온 일제로 인해 성만 사고파는 행위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선의 전통을 폭력적으로 단절 당해버린 식민지 경험에 대한 보상 심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기생‘문화’에 감동받은 나머지 전통을 복원한다는 미명으로 ‘기생’문화의 부활을 꿈꾸고 있지는 않은가. 기생제도는 어떻게 비롯되었으며 기생이 누구를 위해 존재했었나를 간과한 채 말이다.

기생은 고대의 유녀(遊女)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고, 제사장의 역할에서 밀려난 무녀가 기생화된 결과라고도 하며, 신라의 원화제도가 폐지된 뒤 갈 곳 없어진 원화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연원찾기는 모두 기생의 성매매적 측면을 주목한 것이다. 기생이 확실한 신분계층을 이루는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고려는 초기에 교방(敎坊)을 설치하고 관비를 뽑아 가무를 익히게 하여 여악(女樂)으로 삼았는데, 이로써 기생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 뒤로 기생제도는 1909년에 관기(官妓)가 폐지될 때까지 천여년 동안 지속된다.

기생은 천민으로 기안(妓案)에 올라 관리되었으며, 관의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궁이나 관청의 잔치에 노래와 춤을 제공하여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았고, 이 때문에 엄격한 기예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즉흥으로 시를 지어 양반과 주고받을 만큼 박식한 학문을 익히기도 하였다. 지식을 독점했던 양반층 남성들은 그들의 지적 유희에 성적인 자극을 보태기 위해 기생에게 그들의 특권을 나누는 것을 허용했던 것이다. 양반이 기생을 끼고 놀면서 그들만의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것은 풍류(風流)라는 이름으로 ‘속된’ 저자의 놀이와 구분되었다. 유교사회에 걸맞는 품위있고 멋스러운 여흥문화로 여겨지면서 전통문화의 일부로 안착하게 되었다. 이때 풍류를 누리는 것은 양반층 남성이요, 기생은 풍류의 대상이었다.

 

신윤복, <청금상련(聽琴賞蓮) : 연못가의 가야금>

양반 셋이 기생 셋과 함께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다.

 

풍류의 끝에는 양반층 남성에게 제공되는 기생의 성이 있었다. 성(性)은 즐기되 성(性)스러운 것은 성(聖)스럽지 못하게 여겼던 양반층 남성들은 원칙적으로는 기생과 동침을 하는 것을 금하였다. 하지만 기생이 동침을 거부하였을 때 정작 기생에게 돌아오는 것은 매타작이었다.『용재총화』에 나오기를, 수원의 관기가 수청을 거절하여 매를 맞았다고 한다. 이 관기는 “어우동은 음탕한 짓을 하였다고 벌을 받았고, 나는 음탕하지 않았다고 벌을 받았으니 어찌 조정의 법이 이처럼 고르지 못한가” 하였다는데, 여기에 조정은 어떤 대답을 하였을지 심히 궁금하다. 조선 세종조에 관기의 존폐여부가 논의되었을 때, 지방관들이 동침을 거절한 관기를 다스리느라 정사를 돌볼 틈이 없다는 것이 관기혁파를 주장하는 이유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보면 꽤 많은 기생들이 원치 않은 남성과의 동침을 피하기 위해 원칙을 내세웠음을 알 수 있다. 맞을 것을 각오하고 말이다.

관청에서는 아예 방기(房妓) 혹은 수청기(守廳妓)라 불리는 기생을 두어 이들로 하여금 사신이나 관리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또한 군대가 주둔하는 수영이나 병영에 가장 많은 기생을 두었다고 하니, 이쯤 되면 기생과 성매매 여성을 애써 가르려는 노력이 무색해지기도 하겠다. 생존의 대가로 성을 제공해야 한다는 면에서 이 둘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기생제도의 이면에는 양가 여성들이 지켜야 하는 정조관념이 있었다. 성리학의 종법정신을 받아들인 조선사회는 적장자의 가계계승을 중시하는 강력한 부계 가족질서를 확립하면서 여성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여성의 성은 출산, 그것도 아들의 출산을 위해서만 인정되었고 양가의 여성이 배우자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맺거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성과 정을 통하거나 쾌락을 목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은 금기항목이었다. 정절이 여성이 지켜야 할 최고의 덕목으로 여겨졌으며 양반층 남성들은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여성의 정조를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졌다. 그리고 첩제도나 기생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성적 욕구와 일반 여성에게 요구한 성적 도덕의 불일치를 해소하였다. 세종 때 허조가 관기 혁파를 반대하면서 “남녀관계는 인생의 큰 욕구의 하나라 금할 수 없는데 관기를 혁파하면 젊은 선비들이 양가의 부녀를 범하여 많은 인재들이 벌을 받는 손실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여성에 대한 정조관념이 강화될수록 기생제도는 더욱 정당화되었다. ‘대를 잇기 위한 성’과 ‘쾌락을 위한 성’을 각각 다른 이성에게 충족할 수 있었던 남성에게 성적 욕구는 금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금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반면 정조를 지키는지의 여부로 여성을 가치 판단하는 성에 대한 이중윤리는 더욱 뿌리 깊어 갔다.

의녀나 침선비 등 소위 전통사회의 특수직에 종사했던 여성들도 약방기생이나 상방기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를 통해 기생이 지닌 전문적 기능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집밖에서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이 예부터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된다. 궁녀는 ‘임금님의 여자’라서 함부로 할 수 없다고 했던가? 무녀가 지녔던 성매매적 측면까지 아울러 생각하면 일정한 남성에게 속해 있지 않은데다가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늘상 남성의 성적 접근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기생제도는 이처럼 남성중심적 성문화의 산물이었으며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에 기반해 있었다. 기생은 본질적으로 특권층 남성의 사치노예이자 성적 대상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시를 짓고 예술을 익히는 것이 허용된 존재였다. 이들이 자신에게 허락된 기회를 어떤 방식으로 전유하여 삶을 영유하는 자산으로 삼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기생이 이어온 전통문화예술이 감동적이라면 전통춤이나 전통노래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면 될 일이다. 기생이 내보인 애국심이 감동적이라면 옳다 믿는 것을 위해 맞서 싸웠던 소외된 이들의 역사를 소중히 할 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에게 그러한 사회참여의 기회를 주지 않았던 역사를 성찰해야 할 일이다. 기생교육원을 두어 ‘전문 인력’을 양성하면서까지 ‘전통기생’을 부활시켜야 할까. <전통기생문화원>을 방문한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무엇을’ 계승할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