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변함없는 기쁨, 무용총 벽화의 음식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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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함없는 기쁨, 무용총 벽화의 음식준비

전호태(울산대 역사문화학과)

  한 때 ‘밥상공동체’라는 말이 유행했다. 공동체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가장 좋은 자리가 밥상을 함께 할 때라는 데에서 비롯된 말이다. 잔치나 축제에서 밥 먹는 자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흥도 나지 않고, 축하하는 마음도 사그라진다. 남녀가 사귀면서도 식사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둘 사이는 어딘지 서먹함이 남아 있게 마련이다. 사람들이 서로 좀 더 가까워지기 원할 때면 어느 한쪽에서든 어김없이 나오는 말이 ‘식사 한 번 하시죠’라는 말이다.

무용총 널방 벽화에는 시녀 두 사람이 부엌에서 음식상을 차려들고 나오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그림1)무용총 벽화 상차림

  빼곰이 열린 건물의 나무문 안이 부엌이겠지만 아궁이 모습이 어떤지, 음식이 얼마나 마련되었는지, 상과 그릇들은 얼마나 쌓여 있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안악3호분 벽화에서처럼 조리하는 곳과 상 차리는 곳이 나누어졌고,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는 고구려식 아궁이가 설치되었을 수도 있다. 부엌 안에서는 여전히 몇 사람의 시녀가 음식을 마련하고, 상을 차리는 데에 여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말 그대로 몇 줄 남아 있지 않은 고구려인의 식생활에 대한 기록 가운데 눈에 두드러지는 것은 맥적(貊炙)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즐기며 이웃나라 사람들에게 자랑하기도 하는 불고기와 얼마나 비슷한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식 불고기에 해당하는 맥적은 당시 이웃나라 중국에도 널리 알려진 음식이다.
고구려의 고기요리와 관련하여 떠오르는 일화는 고구려 고국천왕의 왕비 우씨와 관련된 내용이다. 왕이 세상을 뜨자 왕위를 이을 자격이 있는 왕의 동생들 가운데 형사취수의 전통을 그대로 이을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왕비는 왕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발기와 연우를 차례로 찾는다. 발기는 후사가 없는 왕의 자리를 잇는 논의를 가벼이 할 수는 없다며 야밤에 자신을 찾은 왕비의 행위를 나무란다. 반면, 연우는 자초지종을 묻고 논하기에 앞서 왕비를 예로 맞고 친히 주연을 베풀어 왕비가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든다. 연우는 예를 더하고자 친히 칼을 잡고 고기를 베다가 손가락을 다쳤다고 한다. 결국 연우가 고국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니 어찌 보면 연우는 고기요리 한 번으로 왕위를 얻은 것과 진배없다.
후에 산상왕으로 즉위한 연우가 왕비 우씨를 맞을 때 준비했던 고기요리는 고구려의 전통적 음식 가운데 하나이던 맥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대사회의 일반적 조리법을 참고로 할 때 맥적은 약간 숙성시키거나 옅은 연기로 그을려 보관하던 고깃덩어리를 일정한 크기로 잘라내어 그 위에 간편한 향신료를 얹은 뒤 불 위에 올려 구워낸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로 치면 갖은 양념으로 버무려 재운 것을 굽는 불고기보다는 스테이크 요리에 가깝다고 하겠다.
고구려인은 또한 콩을 원료로 삼은 장 담그기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콩의 원산지가 만주일대일 뿐 아니라 408년 제작 덕흥리벽화분의 묘지명 내용 중에 한 창고분이나 마련된 장(醬)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까닭이다. 묘지명에 언급된 장이란 일본의 반숙성 콩장인 낫토(納豆)처럼 삶은 콩에 소금을 얹어 숙성시키는 방법으로 만든 콩장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당시 고구려인의 주식으로 조, 콩, 수수, 보리, 기장 등의 밭작물들이 쓰였을 것을 고려하면 더욱 그 개연성은 높아진다.
조, 보리, 수수 등의 곡물은 가루를 내어 시루에 쪄 먹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먹을 수 있는 양이 풍족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고대의 부족한 곡물생산량을 감안하면 음식물로 쓰일 곡물 가루에 도토리를 포함한 채집열매식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을 것이 거의 확실한 까닭이다. 도토리는 지금도 칡이나 마 등과 함께 산간벽지에서는 주요한 식량자원의 하나로 취급받는다.
무용총 벽화의 시녀들이 받쳐 든 음식상에는 바깥이 검은 그릇이 두 개씩 놓여 있고, 음식상을 받은 널방 안벽 벽화의 주인과 두 손님의 상위에는 크고 작은 검은 그릇이 5개씩 올려져 있다.


(그림2)무용총 벽화 손님맞이

  당시의 관례로 보아 귀족의 식탁 위를 장식한 이 그릇들은 모두 칠기(漆器)였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시대까지 칠기는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급용기였다. 손님과 두 주인 사이의 한쪽 켠 소반들 위에 각각 놓인 커다란 그릇들과 그 위에 쌓인 음식물이 무엇인지는 그림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정체가 무엇이든 귀족과 손님의 상 위 그릇 크기에 비하면 지나치게 양이 많다. 벽화를 그린 화가나 그림 속 주인공 모두 넘치도록 많이 마련된 음식 그 자체로 이미 마음이 흡족해지고 눈으로 배부르기를 바랐기에 이런 그림이 그려진 것이 아닐까. 상을 내오는 시녀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는 것도 음식상 차림을 위해 보낸 시간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 때문이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