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경과 개경사람] 개경의 물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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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의 물과 생활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다. 동물과 식물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땅도 물이 없으면 죽은 땅이 된다. 예로부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는 것은 농사지어 밥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일이었다. 더구나 물 없이는 농사도 지을 수 없으니 물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개경에서 제일 먼저 우물을 판 여자는 용녀

고려왕조의 수도 개경은 예로부터 수덕이 순조롭지 못한 땅, 곧 물 사정이 나쁜 곳으로 생각되었으며, 실제로 수해도 많았다고 한다. 「고려세계」에 전하는 김관의의 [편년통록]에 다음과 같은 설화가 실려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 서해 용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왔는데, 용녀는 개경에 오자마자 개주(開州)의 동북 산록에 가서 은그릇으로 땅을 파서 물을 길어 썼다고 한다. 이곳이 바로 개성의 큰 우물(開城大井)인데, 이 우물은 개성의 서쪽에 있다. 서해 해상세력의 상징인 용녀가 송악에 오자마자 우물을 판 것은 이전부터 이곳에서는 물이 매우 귀하고 중요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 후 용녀는 송악산 남쪽에 새 집을 짓고 살았는데, 용녀는 침실 창 밖에 우물을 파고 그곳으로 용궁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곳이 개경 궁궐터 서북쪽의 광명사(廣明寺) 우물인데, 고려왕실에서는 한 동안 이 물을 어수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결국 용녀는 고려왕실, 더 나아가서 개경에 식수를 공급해 준 상징적인 인물로도 인식된 셈이다. [편년통록]에는 작제건이 우물을 드나드는 용녀를 엿보자 용녀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이는 이후에도 개경의 물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우물은 내 가까이에 있었다

우리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물은 말할 것도 없이 식수 곧 먹는 물이다. 개경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대도시의 경우 먹는 물의 공급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먹는 물을 어떻게 확보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서해 용왕의 딸이 개성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우물을 팠다는 설화에서 우물의 중요성을 유추할 뿐이다.

개경의 우물에 대해서 [동국여지승람]에는 앞에서 소개한 용녀가 팠다는 개성 큰 우물(大井)과 광명사 우물을 비롯하여 이인로의 글에 등장하는 홍도정(紅桃井), 어수로도 썼던 달애정(炟艾井), 공민왕 19년 명 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는 양릉정(陽陵井) 등 유래가 있는 우물 몇 개가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려도경]에 따르면 (고려국 사람들은) 대개 내[川] 가까운데 우물을 파서 물을 긷는데, 위에는 녹로(鹿盧)를 만들어서 배 모양의 통에 물을 옮긴다고 하였다. [고려도경]의 묘사만으로 당시 우물의 형태와 그곳에서 물을 긷는 모습을 알 수는 없지만, 녹로는 두레박이나 용두레 같은 것으로 생각된다.

 

{사진으로 보는 조선시대 (속) – 생활과 풍속} (서문당, 1987) 96쪽에 실린 옛 우물 사진. 우물이 내 근처에 있다고 한 [고려도경]의 내용과 일치한다. 산세로 보아 서울 혹은 개성 주택가의 우물인 듯하다.

[고려도경]에서는 우물이 내(川) 주변에 많다고 했지만 역시 어느 정도 보급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보제사 등 내 옆에 세워진 절에 있는 우물은 절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식수를 공급하기도 하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은 우물을 이용하기가 상대적으로 더 쉬웠을 것이다. 조선시기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물을 팔았다는 이야기는 말 할 것도 없고, 서울에서 한강 물을 길어다 팔았던 때가 지금부터 100년도 안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고려시기 개경에서 모든 사람이 우물물을 먹는 혜택을 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샘물을 병에 넣어 벗에게 선물

우물 외에도 샘물이나 계곡의 물도 식수로 이용되었다. 1202(신종 5) 이규보는 성 동쪽에서 성 남쪽의 안신리(安申里)로 이사했는데, 그 마을 왼쪽 바위틈에서 찬 샘물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물론 이규보는 이 물은 식수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또한 이웃 사람들이 모두 시원하게 마셨다는 홍도정 역시 산 기슭의 샘물이었다. 한편 이색의 「성거산문수산기(聖居山文殊寺記)」에 의하면 성거산에서는 겨울에 어름이 얼면 구멍을 뚫어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하는데 그 물은 계곡의 물이었다. 특히 깊은 산중의 샘물이나 계곡의 물은 왕을 비롯한 특권계급들만이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고려말의 사례이기는 하지만 안화사나 영통사 계곡의 샘물을 병에 담아 벗에게 선물로 보낸 예는 그 만큼 그 지역의 물이 맑고 깨끗하여 맛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귀한 물은 술을 담거나 차를 끓여 마셨을 것이니, 그런 일은 일반 민들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다.

목욕과 빨래는?

한편 [고려도경]에는 목욕과 세탁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도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고려사람들은 깨끗한 것을 좋아해서 중국 사람들이 때가 많은 것을 비웃는다. 그들은 새벽에 일어나서 반드시 목욕을 한 후에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 목욕을 한다. 대개 (목욕은) 계곡에서 남녀 구별 없이 하는데, 의관을 둑에 벗어놓고 흐르는 물에 속옷을 드러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옷을 빨고 옷감을 표백하는 것은 모두 여자들이 했는데 비록 밤낮으로 일해도 힘들다고 하지 못한다.

[고려도경]의 기록을 있는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겠지만 중국사람 서긍이 스스로 중국 사람들은 때가 많다고 인정한 듯한 이 표현은 재미있다. 또한 고려후기의 인물 홍자번(洪子藩)은 매일 반드시 한 두 번은 목욕을 하였다는 [고려사]의 기록 역시 [고려도경]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마실 물도 충분치 않았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위의 내용은 여름철에나 가능한 매우 예외적인 일로 생각된다. 고려시기 목욕과 관련된 것으로 온천에 대한 기록도 찾아진다. 고려의 왕들은 주로 개경 북쪽의 평주(平州) 온천을 주로 찾았으며, 왕을 제외하고는 몸이 아픈 관리나 관리의 부모 정도가 특별히 온천욕을 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원한 계곡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한편 물은 개경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되었다. 당시 지배층들도 풍광 좋은 못과 계곡을 찾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지었으며, 학동들은 시원한 계곡에서 여름 수련회(夏課)를 갖기도 하였다. 송악산의 여러 계곡, 개경 동북쪽 물줄기에 위치한 귀법사 근처의 계곡, 동남쪽 개국사 근처의 못, 적전(籍田) 주변의 못 등은 당시 문인들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특히 귀법사 근처의 계곡은 학동들의 여름 수련회 장소로 자주 이용되었다.

 

지리산 쌍계사 계곡(2004년 4월 박종진 사진)

 

그 중에서도 황성(皇城) 동쪽에 있었던 동지(東池)는 왕을 위한 공간이었다. 동지는 만월대에서 동쪽으로 약 13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으며, 이곳에는 귀령각(龜齡閣)이라는 건물이 있었다. 왕은 여기에서 무사를 사열하고 활쏘기를 구경하기도 하였다. 또 동지에 배를 띄워놓고 왕족이나 관료와 함께 시회․연회를 베풀었으며, 주변에 백학(白鶴)․산양(山羊) 등 동물을 기르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왕들은 개경 주변의 계곡에서 여러 신하들과 각종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중기 의종은 많은 노동력을 동원하여 곳곳에 둑을 쌓아 물길을 막았으며 그곳에 정자를 만들고 일부 측근 관료들과 그곳에서 각종 연회를 베풀었으며, 어떤 때는 그곳에 배를 띄워 놓고 즐기기도 하였다. 더욱이 고려말 우왕(禑王)은 계곡에서 궁녀들과 어울려 목욕을 하기도 하였으니, 이러한 행위는 휴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를 위해 많은 백성들의 노동력을 징발하여 민원을 샀다. 이렇게 개경 주변의 주요 물길에 둑을 쌓고 유희공간을 만드는 것은 그 자체가 개경 근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할 거의 모든 물줄기를 왕을 비롯한 일부 지배층이 독점하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이 때 각종 정자가 세워졌던 곳은 대체로 개경의 동북쪽과 동쪽인데, 이곳의 물길을 막는 것은 하류 농업지대의 물줄기를 막는 일이기도 하여서, 이에 대한 민의 불만이 컸을 것은 자명하다. 의종이 무인정변으로 몰락한 배경 중에는 물을 독점하여 민의 원성을 샀던 것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박종진, 중세1분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