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이야기] 남은 자리에 서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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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리에 서린 역사

홍순민(중세사 2분과)

프랑스로 간 의궤들은 그나마 거기 있으니까 다행이라고나 할까. 나머지 책들과 물건들은 다시 찾을 길이 없다. 지금 “고려궁지”에 있는 동종(銅鐘)도 프랑스군이 끌어가다가 못 가져가고 길에 내버린 것을 옮겨 놓은 것이다. “고려궁지”는 그런 수난의 사연을 품고 있다. 그러나 수난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병인양요 5년 뒤에는 미국이 침범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다시 그 5년 뒤에는 일본이 무력을 앞세워 이른바 병자수호조약 (丙子修好條約), 말이 수호이지 완전한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였다. 이러한 외세의 압박 아래서 “근대화”가 진행되었고 근대화 과정에서 고려궁지는 더욱 파괴되었다. 근본적인 파괴는 터가 잘려 나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의 “고려궁지” 바로 아래에는 올라 가면서 오른 편에 강화 초등학교가 있고, 왼 편에는 천주교 강화성당이 있다. 둘 다 역사가 근 백년이 되었다던가 넘었다던가 할 정도로 오래 되었다. 지형으로 보나 전후 맥락으로 보나 이 학교와 성당은 고려궁지, 곧 조선시대의 행궁 및 관아 터를 잘라 세운 것이다. 또 지금 고려궁지의 뒷쪽 경계는 명위헌이 있는 잔디밭 바로 위 축대를 지나가는 개나리 울타리로 되어 있다. 궁궐은 그만 두더라도 조선시대 관아만 하더라도 이렇게 바투 경계를 지을 리가 없다.

이런 의문을 품고 그 개나리 울타리를 돌아 올라가 보면 꽤 넓은 터가 열리고 어떤 종교단체의 허름한 건물이 길게 차지하고 있다. 미심쩍은 생각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다. 지표를 이리저리 살펴보니 건물이 들어선 터를 바쳐주는 축대가 기다란 돌―장대석으로 되어 있다. 현대식 건물을 지으면서 이런 돌로 축대를 쌓을 리가 없다. 이는 옛날 건물이 들어서 있던 자리라는 징표이고, 그렇다면 이곳이 바로 행궁과 외규장각, 장령전, 만령전이 있던 터임에 틀림없다. 하긴 지형적으로 관아가 있는 바로 윗 터에 그보다 격이 높은 행궁 등이 아닌 다른 건물이 들어설 수는 없는 일이다.

“고려궁지”의 앞뒤가 이렇게 잘려 나갔다면 좌우 역시 온전할 리가 없다. 좌측, 곧 동쪽으로는 야트막한 지맥이 흘러내린다. 그런데 최근에 그 지맥을 걸쳐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된 도서관이 들어섰다. 아무리 좁게 잡아도 그 지맥까지는 고려궁지의 터로 들어와야 할 것이다. 오른편, 서쪽으로는 경계를 짓기가 더욱 쉽지 않다. 무슨 단서라도 없을까 보니 담장 안에 꽤 오래된 나무가 철책을 두르고 서 있다. 얼핏 보면 아카시아 나무처럼 보이지만, 아카시아와는 달리 가시가 없고 크기도 훨씬 더 커서 한결 기품이 있는 그 나무는 괴목(槐木),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고 하는 나무다.

회화나무는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를 서술한 {주례}(周禮)라는 책에 의하면 궁궐의 바깥 문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조정―외조(外朝) 가운데 세 그루를 심게 되어 있는데 그 아래가 곧 최고 벼슬아치인 삼공(三公)이 앉는 자리이다. 이런 까닭에 회화나무는 삼공을 뜻하게 되었고, 괴신(槐宸) 그러면 궁전, 괴정(槐庭) 그러면 조정 하는 식으로 조정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나무로 받아들여졌다. 그런 회화나무가 여기 있다니 이곳이 평범한 곳은 아니었다는 심중을 굳혀 준다. 그렇지만 그 나무는 담장 안에 있으니 이 일대의 영역을 짐작하는 데는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더 두리번거려 보니 담장 밖, 길 건너에 있는 적어도 삼,사백년을 되었음직한 은행나무가 눈에 번쩍 들어온다. 은행나무는 공자님이 그 아래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하여 지방의 향교나 서원 등에 흔하기는 하지만 궁궐이나 관아에도 많이 심었던 나무다. 그렇다면 고려시대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저 은행나무까지는 이곳 행궁과 관아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는 데 무리가 없다. 지금의 “고려궁지”는 고려시대의 궁궐 터로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조선시대 행궁과 관아 터로도 이렇게 그 영역부터 크게 줄어 들어 있는 것이다.

터가 크게 줄어 들었으니 그 안의 모습도 온전할 리 없다. 지금 고려궁지 안에 남아 있는 건물이 유수부의 청사였다던 명위헌과 이방의 집무처로 소개되어 있는 이방청이다. 강화는 최초의 이름이 갑비고차(甲比古次)였고, 고구려의 혈구군(穴口郡), 신라의 해구(海口), 혈구진(穴口鎭), 고려조에는 혈구현(穴口縣) 등으로 바뀌어 오다가 몽골 침입 때 이곳으로 천도하면서 비로소 강화, 심주(沁州)라는 이름이 붙었고, 도읍으로 높여 부르면서 강도(江都)니 심도(沁都)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태종 때 부(府)에서 도호부(都護府)로, 광해군 때 부윤(府尹)이 맡는 부로, 인조 때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행정 구역이 설치된 초기부터 당연히 그 청사도 세워졌을 것이다.

현재 청사에 관해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병자호란 직후인 1636년(인조 16)에 개건하였다는 것, 그 이름이 이관당(以寬堂), 또는 현윤관(顯允觀)이었다는 것 정도이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데 이는 건물 전체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그 가운데 유수의 집무처인 중안 마루 부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는데 좀더 확인해 보아야 하겠다. 조선 숙종에서 영조 연간의 명필 백하 윤순의 글씨로 알려져 있는데 글씨를 볼 줄 모르는 내가 보아도 오랜 세월 전해 오면서 획이 많이 죽은 듯하기는 하지만 유연한 흐름의 초서체에 힘이 느껴진다.

명위헌도 몇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지만, 이른바 “이방청”은 이방청이었다는 가장 기본적인 설명부터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안내판 뿐만 아니라 강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이 이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연유를 모르겠다. “이방청”은 온돌방이 8간, 마루방이 12간, 부억이 1간으로 모두 21간이나 되는 ‘ㄷ’자 형태의 건물이다. 지방 관아에서 이방의 지위가 어떻길래 이렇게 큰 건물을 차지하고 집무를 하였겠는가. 지방 관아에는 벙거지를 쓰고 울긋불긋한 군복을 입은 사또와 염소 수염을 하고 간사스런 목소리를 내는 이방만 있었던 것으로 아는 인식의 소치가 아닌가 싶다.

유수부인 강화부에는 품관(品官), 곧 정규 관원만 해도 종2품의 유수가 둘(한 자리는 경기관찰사가 겸임), 그 밑에 종4품의 경력(經歷)이 하나, 종9품의 분교관(分敎官)과 검율(檢律)이 각각 하나씩 모두 다섯 자리가 있었다. 그 밖에 비장(裨將)이 10, 월령(月令) 1, 향소(鄕所) 2, 그리고 이예(吏隸)가 서리(書吏) 40, 청직(廳直) 55, 예(隸) 25, 노(奴) 33, 비(婢) 55 등이 있어 실무 행정을 담당하였다. 또 각 리(里)에는 풍헌(風憲), 약정(約正), 권농관(勸農官), 서원(書員), 토포장(討捕將) 등이 있어 일선 행정을 도왔다. 이는 일반 행정 계통만을 든 것이고, 장령전, 만령전, 사각(史閣) 등 왕실 관련 기관과 진무영(鎭撫營)을 비롯한 군사기관에는 또 그에 걸맞는 많은 관리자와 군관, 군졸들이 있었다. 한 유수부의 행정과 군사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있었던 것인데 그 가운데 이방은 별도의 이름조차 없는 서리의 하나에 불과하였다. 그런 이방이 이렇게 큰 건물을 차지하고 집무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설명이 정설처럼 굳어졌을까. 이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조금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자료를 잠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783년(정조 7) 강화유수였던 김노진(金魯鎭)이라는 분이 펴낸 {강화부지 (江華府志)}라고 하는 책에 들어 있는 강화읍의 약도를 보면 송악 기슭에 행궁(行宮), 규장외각(奎章外閣), 진전(眞殿. 長寧殿), 만령전(萬寧殿)이 한 줄 벌여있고, 그 아래로 상아(“上牙”), 객사(客舍), 천추문(千秋門)이 있으며, 객사와 천추문 사이 약간 아래 자리에 이아(“二牙”)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상아”는 “상아(上衙)”로 표기해야 할 것을 간략한 글자로 바꾼 것으로서 유수의 청사, 곧 오늘날의 명위헌이며, “이아” 역시 “이아(貳衙)”를 간략히 표기한 것으로 지금의 “이방청”으로 설명하는 건물에 해당한다. 위 책의 “이아”를 설명하는 내용은 “객사의 동쪽에 있으며, 경력이 집무하는 곳이다(在客舍東 經歷聽治之所)”라고 되어 있다. 이로 보건대 이아는 유수부의 제2인자인 경력의 집무실이며 유수의 집무처 동쪽에 있는 객사보다도 조금 더 동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현재는 위치는 뒤바뀌어 있다. 문을 들어서서 북쪽을 향해 보자면 명위헌은 축대 위 단 동쪽 끝에 있고, 이방청은 아랫 단 서쪽 구석에 있다. 동서가 완전히 뒤바뀌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일제시기, 그리고 해방 이후 이 건물들의 기구한 사연이 서려 있다. 유수의 청사―명위헌은 일제시기부터 해방 직후까지 군청으로 사용되었고, “이방청”은 강화 등기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언제부터인가 빈 건물로 있다가 1975년에서 77년 사이 복원 수리하면서 그 위치도 바뀌고 모양도 변형된 것이다.

나는 답사를 인솔할 때 말이 많다. 평상시에도 과묵한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쓸데없는 말은 될 수 있으면 줄이려고 애를 쓰는데 답사를 할 때는 말이 줄지를 않는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보고 짤막짤막하게 말하면서 다니면 답사가 참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아니 보이지 않는 이면이 이렇듯 사연이 구구절절한데 어떻게 좋은 것, 아름다운 것만 찾아다닐 수가 있겠는가. 고려궁지 아닌 고려궁지, 제 모습을 거의 완전히 잃어버린 조선의 행궁과 관청 터, 이리저리 밀려다닌던 끝에 엉뚱한 곳에 가 앉아 있는 건물 두어 채에서 파란만장한 우리 역사를 떠 올려 보려 남는 것 없이 기를 쓰는 것, 이것이 나의 답사 행태요, 기껏 답사를 하면서 골치아픈 이야기를 빼버리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병통이다. 말이 그렇다 보니 답사기도 하릴없이 뻑뻑해지고 길어졌다. 독자 여러분들께서 너그러이 접어 주시기를 삼가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