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44년의 비원』(2010, 너머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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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을 말한다>
‘고종 44년의 비원’ (2010, 너머북스)

 

장영숙(근대사분과)


고종을 연구의 소재로 삼은 지는 꽤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석사과정을 시작할 때부터 이미 논문의 주제를 정하고 출발했으니까, 햇수로 따지면 근 15년 가까이 된다. 그땐 정말이지 무엇엔가 홀린 듯 고종에 대한 재평가의 필요성 운운하며 ‘고종 다시보기’를 시도했었다. 시작하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나보다 한 발 먼저 출발한 연구자들이 여럿 있었다. 한결같이 고종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부정적인 쪽에 치우쳐 있고, 고종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가 진전되지 않은 상태에서 허상의 이미지만 확대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나 역시도 그런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였다. 고종을 부정적이고 우유부단한 군주상에서 보다 개혁적이고 능동적으로 한말을 통치해간 군주로 새롭게 자리매김하고 싶었다. 돌이켜보면 근대의 서막에서 고종과 함께 활동한 인물 가운데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지켜낸 올곧은 민족주의자의 원형으로, 명성황후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탈 앞에 온몸을 던진 구국의 영웅으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특히 영화나 소설, 드라마와 같은 문화콘텐츠 속에서 그들은 새롭게 재탄생하고 있었다. 반면고종은 여전히 엄부(嚴父)와 엄처(嚴妻) 시하에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못한 우유부단한 군주, 무기력한 군주로 각인되어 왔을 뿐이다. 난 바로 그 점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림 1> ‘고종 44년의 비원'(2010, 너머북스)

그런데 연구를 하면 할수록, 자료를 읽으면 읽을수록 연구소재에 대한 무턱댄 사랑과 관용은 의식의 판단을 흐리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역사에 실재한 그대로를,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 모두를, 가감 없이 드러내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당대나 후세에 좋은 영향을 미친 국왕으로서의 역할과, 설령 그렇지 못한 부분일지라도 과오와 허물을 솔직하게 들추어내려 하였다. 고종의 집권 전 시기에 걸쳐 일어난 정치적인 변화와 대소사건을 다루되, 그러한 장면과 마주하는 고종의 내면과 인식을 최대한 쫓으려 하였다. ‘망국의 군주’라는 일면적인 평가를 넘어서서 전환기의 고종을 다면적으로 평가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사실 고종은, 망국과 연동시켜 어두운 기억 속에만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다양한 면들이 중층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인물이다. 대원군과는 다른 대외관 속에서 동도서기정책을 밀어붙이고, 개명된 사고와 열린 마음으로 신지식과 서적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사조를 확산시키는데 있어서는 개혁군주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군통수권을 계통적으로 발효시키고 절대화할 수 있는 군령기관을 확립함으로써, 군의 질서와 체계를 세운 데서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권을 신장시키려 한 집권 44년간의 꿈과 의지가 드러난다. 친정초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처족세력인 민씨세력을 비롯하여 순수무인 출신, 서양경험이 풍부한 개화실무진들, 근왕세력들을 교차적으로 등용해 나간 데서는 폭넓은 인재등용이라는 신축적인 자세가 읽혀진다.

그러나 그의 모든 개혁의지와 꿈을 성사시킬 기회를 번번이 놓치고 말았다는데 그의 한계와 불행이 있었다. 개화라는 이름으로 시행한 통치기구의 중첩은 행정의 비효율화와 국정의 난맥상을 초래하였다. 왕권강화에 대한 의지가 지나쳐 개혁은 시행하였으나, 민중을 위한 개혁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지지기반의 폭은 넓혔으나, 어느 세력도 정권의 전위대는 되지 못하였다. 제국주의 국가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초라한 국가적 규모와 암둔한 형세파악은 고종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국가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정치적 보완자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던 명성황후가 사망한 후, 이미 정적으로 돌아선 대원군을 비롯한 숱한 정객들이 정권을 넘보았다. 이들은 때론 외세보다 더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고종의 신하였지만 외세를 향해 손짓하는 관료군이 생겨난 것은 흔히 ‘우유부단함’으로 묘사되는, 부드럽고 온화한 국왕의 리더십에 기인하는 바도 컸다. 그에겐, 혼란한 시대를 선도해 나가는데 필요한 명쾌한 판단력과 결단력이 결여되어 있었다.

되도록이면 고종의 집권 전 시기에 걸친 정책을 분석하고, 실패로 이어진 과정과 결과까지도 총체적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그래야만 편견과 덧칠로 왜곡된 고종의 이미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다. 출발할 때의 기대와 실제 결과물 간에는 언제나 조금씩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책이 출간된 지금에 와서는, 이 한 권의 대중서가 더도 덜도 말고 고종의 알려지지 않은 이면을 보여주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소망할 뿐이다. 한일병합 100년이 되는 시점에 망국 책임론의 한가운데 있는 고종을 새롭게 불러낸 것은, 의도한 바도 아니나 우연의 일치 치고는 꽤나 절묘하다. 이 부분도 독자들의 의식을 환기시키는 매개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스물거리는 것은 나의 속물근성이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