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濟 政治制度史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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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위논문 –
「百濟 政治制度史 硏究」
(2008. 8.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정동준(고대사분과)

학위논문을 낸지 벌써 6개월이 넘었다. 다소 늦게 학위논문에 대한 소개를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논문 소개에 대한 자신감이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학위논문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논문의 완성도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최근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주제인 데다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보는 시론적 성격이 강한 연구성과가 과연 얼마나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간 주저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 공감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앞으로 공감을 얻어나가야 하는 것이 연구자로서의 소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소개를 결심하게 되었다.

  서론이 좀 길었지만,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백제 전 시기에 걸쳐서 정치제도사의 변천과정을 통하여 당시의 정치구조에 한 발짝 더 접근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필자는 본래 석사학위논문에서는 대외관계사를 다루었으나 박사학위논문을 쓰면서 정치제도사로 주제를 다소 바꾸게 되었다.

  대외관계사는 기본적으로 국내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고, 국내정치를 설명하려다 보니 기존의 정치사적 설명방식(즉 사건과 인물 위주의 변동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설명방식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설명방식을 모색하면서 찾아낸 것이 제도사적 설명방식(즉 제도를 바탕으로 구조 등 변동이 적은 부분에 대한 설명방식)이었다.

  또 기존의 제도사 연구가 제도 자체의 해명에 그치거나 그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제도를 넘어서 정치구조의 해명까지 나아가는 데에 목표를 두게 되었다. 즉 기존의 정치사적 설명방식이 아날학파가 말하는 ‘사건’을 다루었다면, 필자는 ‘구조’를 다루려고 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앞서 언급하였듯이 정치구조의 해명에 다른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할 수는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기존의 제도사적 설명방식이 한계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극히 한정된 사료를 여타의 방법론에 의해 도움을 받지 못한 채로 그 자체만 가지고 천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논문에서는 고구려ㆍ신라 및 중국왕조의 사례를 대폭 참조하면서 관련사료가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수단으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그 결과로 나온 결론이 얼마나 타당한가는 향후 평가받아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적어도 이러한 방법론 자체는 앞으로 필요한 부분임을 보여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림 1> 양형청자(羊形靑磁) : 4세기 이래 중국왕조와 백제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원주시 법천리에서 출토되어 토착세력에게 위세품으로 사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동준)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이 논문에서는 백제사 전체를 제도의 변동을 기준으로 4개의 시기로 나누어서 고찰하였다. 첫번째 시기(B.C.18~A.D.346)는 온조왕(溫祚王)~계왕(契王)으로, 초기의 좌(左)ㆍ우보(右輔)가 좌장(左將)ㆍ좌평(佐平)으로 개편되면서 초보적 형태로 일원적인 관등제(官等制)가 실시된 것이 주된 변화상인 성립기(成立期)였다.

  두번째 시기(346~501)는 근초고왕(近肖古王)~동성왕(東城王)으로, 장군(將軍)ㆍ박사(博士), 상좌평(上佐平: 三佐平), 내두(內頭)ㆍ영군(領軍), 남북조(南北朝) 관제[將軍號ㆍ王侯ㆍ太守ㆍ府官] 등 다양한 형태로 중국왕조의 관제를 수용하여 변용하면서 관제 정비와 개편을 시도한 발전기(發展期)였다.

  세번째 시기(501~600)는 무령왕(武寧王)~법왕(法王)으로, 22부사(部司) 중심의 체제가 정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관제 개편이 이루어지는 완성기(完成期)였다. 특히 22부사(部司), 16관등(官等), 방군성제(方郡城制), 상설화된 장군(將軍) 중심의 중앙군과 방령(方領) 중심의 지방군, 측근[內官] 중심의 정치운영 등 백제 특유의 제도가 완성된 시기로서 더욱 주목된다.


<그림 2> 무령왕릉 지석 (출처: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

네번째 시기(600~660)는 무왕(武王)~의자왕(義慈王)으로, 수당관제(隋唐官制)의 영향으로 6좌평 중심의 체제가 성립되면서 완성된 관제에 재편이 시도되는 재편기(再編期)였다. 성립기(成立期)가 독자적인 발전과정이었다면, 발전기(發展期)는 중국왕조의 특정 관제 단위로 다양한 수용과 변용이 시도되었으며, 완성기(完成期) 이후에는 특정한 모델을 바탕으로 시스템 전반의 수용과 변용이 모색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완성기의 모델은 『주례(周禮)』, 재편기의 모델은 수당(隋唐)의 육전제(六典制)였다고 볼 수 있었다.

  이 논문의 특징적인 부분은 무엇보다도 좌평제(佐平制)의 전개에 대한 새로운 파악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에 좌평제에 관한 견해는 크게 보아 세가지였다. 첫번째는 고이왕대(古爾王代) 6좌평 기사를 그대로 인정하여 무령왕(武寧王) 이전까지 특정 직무를 분담하는 6좌평이 존재하였고, 이후에는 6좌평 대신 22부사가 그 기능을 대신하면서 좌평(佐平)이 관등화(官等化: 官階化)되었다는 것이다.


<그림 3> 묘주복원 : 익산시 입점리고분군의 전시관에 있는 묘주(墓主)의 추정복원 모형인으로 백제시대 관인의 모습을 복원한 것이다. (@정동준)

두번째는 고이왕대(古爾王代) 6좌평 기사를 부정하여 무왕대(武王代)에 특정 직무를 분담하는 6좌평이 성립하였고, 그 이전의 좌평(佐平)은 모두 관등적(官等的: 官職的+官階的) 성격의 것이라는 견해이다. 세번째는 고이왕대(古爾王代) 6좌평 기사는 부정하면서도 6좌평이 한꺼번에 성립하지 않고 6세기 정도까지 하나씩 설치되었다는 견해이다.

  이 논문은 기본적으로 두번째 견해에 입각하고 있다. 다만 그간 두번째 견해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문제들의 해명을 시도하였다는 것이 이 논문의 특징이다. 하나는 무령왕대(武寧王代) 이후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특정 직무를 분담하는 6좌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해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왕대(武王代)에 성립한 6좌평 중심의 체제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가분석한 것이다.

  전자는 무령왕대(武寧王代)를 전후한 사료에 원사료 계통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표기상 차이가 드러났음을 해명하였고, 후자는 수당관제(隋唐官制)와의 비교를 통해 ‘관직체계의 수직적 계열화’라는 것이 특징임을 분석하였다.

  이 밖에도 장군(將軍)ㆍ박사(博士)의 변천과정, 22부사체제의 성립과정과 내관(內官)ㆍ외관(外官)의 개념, 백제의 율령 반포시기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견해를 제출하였다. 지면관계상 간단히 말하면, 장군(將軍)ㆍ박사(博士)는 4세기 중반에 등장하여 대민지배의 진전과 왕권의 강화에 따라 6세기 초반에 상설화ㆍ체계화되면서 정치적 비중은 상대적으로 감소되었다.


<그림 4> 신촌리고분 금동관 : 6세기 초반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에게 사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주시 신촌리고분군에서 출토된 것으로, 6세기 초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이 여전히 독자성을 띄면서도 간접지배의 형태로라도 백제 세력권에 편입된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정동준)

  22부사체제는 4세기 말~5세기 초부터 성립되기 시작하여 5세기 중반 외관(外官)의 전신이 먼저 완비되고, 이후 내관(內官)의 전신이 성립되었다가 6세기 중반 내관의 완비와 함께 체제 전체도 완성되었다. 내관(內官)은 단순한 궁정기구가 아니라 정치ㆍ행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시기구도 포함하였고, 외관(外官)은 그 나머지의 행정기구였다.

  백제의 율령 반포는 서진(西晉) 태시율령(泰始律令)의 영향으로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 전후에 된 것이라기보다는 진한율령(秦漢律令)의 바탕 위에서 아신왕(阿莘王)ㆍ전지왕대(腆支王代) 즈음에 되었을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가급적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고, 기존 견해와의 차별화에 골몰하다 보니 다소 무리한 부분도 많이 있었기에, 차후 보완이 많이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절대적으로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 연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자료의 폭을 넓히고, 그렇게 폭이 넓어진 자료를 어떤 방식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으로부터 출발한 시도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